뻔한 선인은 없다…재난서 팔고 팔리는 악인들의 '몸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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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노유정의 무정한 OTT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몸값>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몸값>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진부하지만 이 드라마를 설명하는 데 그 이상 어울리는 표현을 찾기 힘들다. 재난 속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는, 인류의 희망 같은 선한 사람은 여기에 없다. 대부분의 인물들은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하고 개인은 이용가치에 따라 값이 매겨진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몸값>은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강렬하다. 장기밀매가 이뤄지던 날, 모텔이 지진으로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제각기 다른 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2018년 이충현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단편영화를 재구성한 6부작 시리즈다.
<몸값>은 올해 열린 제6회 칸 국제시리즈 페스티벌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각본상을 받았다. 칸 국제시리즈 페스티벌은 프랑스 칸 영화제가 여는 부대 행사로 전 세계 TV 시리즈를 대상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각 신을 끊지 않고 이어 보여주는 ‘원테이크 기법’으로 입소문이 났다. ○뒤바뀌는 몸값의 의미
초반 흐름은 약 14분 길이의 원작과 같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주영(전진서 분)은 경기도 가평의 한 모텔 방에서 중년 남성 형수(진선규 분)를 만난다.
이들이 처음 흥정하는 것은 주영의 몸값이다. 성매매를 하러 온 형수는 주영이 처녀 여부가 불확실하고 고등학생도 아닐지 모른다며 가격을 깎는다. 둘뿐인 공간에서 ‘구매자’인 성인 남성 형수와, 애초 100만원이던 가격이 7만원까지 깎여도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하겠다는 ‘판매 대상’ 주영의 관계는 갑과 을처럼 보인다.
관계는 극적으로 반전된다. 주영은 전화가 걸려오자 형수를 남겨두고 모텔방을 나선다. “고등학생이고 처음이라 100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대사를 되풀이하는 그녀가 향한 공간에는 경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경매품’은 팬티 바람으로 수술대에 꽁꽁 묶여 있는 형수다. 경매사로 변신한 주영이 말한다. “신장부터 췌장 간 쓸개…<중략>… 순으로 판매되고요. 입찰 원하시는 분은 원하시는 몸값을 말씀해주세요.”
여기까지는 단편영화 내용이다. 그러나 티빙 시리즈 <몸값>에서는 재난으로 모두의 몸값이 초기화된다. 경매가 진행되던 도중 지진이 발생하며 건물 입구는 막히고 모든 층의 한 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뚫린다. 강하고 똑똑한 자만 살아남는 재난 속에서 주영의 몸값도, 형수의 몸값도 이전과는 달라진다.
○거짓이 쌓아올린 아슬아슬한 연합
이 드라마는 정의와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모두가 악인으로 변한다. 지나가는 조연 같던 인물이 돌연 대량 학살자가 되고,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말의 향연이 펼쳐진다. 특히 주인공인 형수와 주영이 숨쉬듯 내뱉는 거짓말들은 이들이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저 경찰입니다”는 형수가 극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재킷 속 지갑에서 나온 경찰공무원증이 진짜인지부터 의심스럽다. 경찰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보여주는 장면은 한 컷도 없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장기밀매 잠입수사를 위해 성매매를 하는 척 모텔에 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디테일은 계속 바뀐다. 주영도 거짓말의 화신이다. 장기밀매단 사장이 돈을 숨겨놓은 장소가 어디인지 안다며 같이 훔치러 가자고 여러 사람을 설득하고 이간질한다. 지진 후 모여 있던 경매 참가자들 앞에서 형수와 주영이 즉석으로 꾸며내는 ‘3년간의 잠입수사와 정보원 스토리’는 너무나 구체적이라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들은 상대가 자신처럼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건물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동시에 상대에게서 여성과 강아지 등 약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좁쌀만한 인간성도 엿봤다. 그래서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시적인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다.
자신의 장기를 적출하려 했던 주영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형수에게 주영은 말한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아이러니하게도 탈출을 앞두고 주영이 형수에게 하는 말들 중 상당 부분은 진실이다. 이를테면 모르핀이 화폐보다 훨씬 가치 있어질 것이라는 말들이다. 그러나 형수는 믿지 않는다. 합리적인 행동 같았던 의심은 그렇게 사람의 눈을 가린다.
아버지를 살리려 신장을 사러 온 극렬은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다. 부모를 살리려 최후의 방법을 선택한 그의 심정을 시청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형수의 신장을 떼어가기 위해 형수를 지켜주는 아이러니한 행동,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와 찍은 휴대폰 배경사진 등은 그의 진심과 절박함을 보여준다. 그래도, 그 역시 죄 없는 사람의 장기를 불법으로 구매하려 한 악인이다.
○개운하지 않은 결말
극의 전개는 게임과 유사하다. 주영과 형수 모두 지진 직후 지하 맨 아래 층 시체처리방으로 떨어진다. 이들은 레벨 업을 하듯 고군분투하며 한 층씩 올라간다. 게임의 기본 캐릭터처럼 빨간 속옷만 입고 시작한 형수는 마지막에는 옷과 무기, 가방 등 각종 아이템을 갖춘다.
각 층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NPC(게임 속 등장인물) 같은 느낌을 풍긴다. 시체를 처리하는 괴물 같은 덩치와 체력의 인물들, 장기매매의 미끼로 일했던 주영의 여성 동료들, 경매 참가자들과 조직의 폭력배 등이다. 이들은 차례로 등장해 주영과 형수에게 정보나 아이템을 주고, 극을 진행시킨 후 사라진다.
결말은 게임의 엔딩과 다르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퀘스트’를 완수하나 싶었지만 끝은 모호하다. 시즌 2를 예고했을 수도 있지만, 전날 무슨 일이 있었건 오늘은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씁쓸한 현실 같기도 하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의 오리지널 시리즈 <몸값>은 제목만큼이나 내용도 강렬하다. 장기밀매가 이뤄지던 날, 모텔이 지진으로 무너지고 그 안에 있던 제각기 다른 인물들이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다. 2018년 이충현 감독이 연출한 동명의 단편영화를 재구성한 6부작 시리즈다.
<몸값>은 올해 열린 제6회 칸 국제시리즈 페스티벌에서 한국 드라마 최초로 각본상을 받았다. 칸 국제시리즈 페스티벌은 프랑스 칸 영화제가 여는 부대 행사로 전 세계 TV 시리즈를 대상으로 한다. 국내에서는 각 신을 끊지 않고 이어 보여주는 ‘원테이크 기법’으로 입소문이 났다. ○뒤바뀌는 몸값의 의미
초반 흐름은 약 14분 길이의 원작과 같다.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주영(전진서 분)은 경기도 가평의 한 모텔 방에서 중년 남성 형수(진선규 분)를 만난다.
이들이 처음 흥정하는 것은 주영의 몸값이다. 성매매를 하러 온 형수는 주영이 처녀 여부가 불확실하고 고등학생도 아닐지 모른다며 가격을 깎는다. 둘뿐인 공간에서 ‘구매자’인 성인 남성 형수와, 애초 100만원이던 가격이 7만원까지 깎여도 돈을 벌기 위해 성매매를 하겠다는 ‘판매 대상’ 주영의 관계는 갑과 을처럼 보인다.
관계는 극적으로 반전된다. 주영은 전화가 걸려오자 형수를 남겨두고 모텔방을 나선다. “고등학생이고 처음이라 100만원은 받아야 한다”는 대사를 되풀이하는 그녀가 향한 공간에는 경매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경매품’은 팬티 바람으로 수술대에 꽁꽁 묶여 있는 형수다. 경매사로 변신한 주영이 말한다. “신장부터 췌장 간 쓸개…<중략>… 순으로 판매되고요. 입찰 원하시는 분은 원하시는 몸값을 말씀해주세요.”
여기까지는 단편영화 내용이다. 그러나 티빙 시리즈 <몸값>에서는 재난으로 모두의 몸값이 초기화된다. 경매가 진행되던 도중 지진이 발생하며 건물 입구는 막히고 모든 층의 한 가운데 거대한 구멍이 뚫린다. 강하고 똑똑한 자만 살아남는 재난 속에서 주영의 몸값도, 형수의 몸값도 이전과는 달라진다.
○거짓이 쌓아올린 아슬아슬한 연합
이 드라마는 정의와 옳고 그름을 논하지 않는다.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모두가 악인으로 변한다. 지나가는 조연 같던 인물이 돌연 대량 학살자가 되고, 서로 속고 속이는 거짓말의 향연이 펼쳐진다. 특히 주인공인 형수와 주영이 숨쉬듯 내뱉는 거짓말들은 이들이 하는 모든 말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를테면 “저 경찰입니다”는 형수가 극 중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재킷 속 지갑에서 나온 경찰공무원증이 진짜인지부터 의심스럽다. 경찰로서의 사명감과 책임감을 보여주는 장면은 한 컷도 없다.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장기밀매 잠입수사를 위해 성매매를 하는 척 모텔에 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디테일은 계속 바뀐다. 주영도 거짓말의 화신이다. 장기밀매단 사장이 돈을 숨겨놓은 장소가 어디인지 안다며 같이 훔치러 가자고 여러 사람을 설득하고 이간질한다. 지진 후 모여 있던 경매 참가자들 앞에서 형수와 주영이 즉석으로 꾸며내는 ‘3년간의 잠입수사와 정보원 스토리’는 너무나 구체적이라 감탄스러울 정도다.
이들은 상대가 자신처럼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서로 힘을 합치지 않으면 건물에서 탈출할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동시에 상대에게서 여성과 강아지 등 약자에 대한 연민이라는 좁쌀만한 인간성도 엿봤다. 그래서 배신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일시적인 ‘적과의 동침’을 선택한다.
자신의 장기를 적출하려 했던 주영에 대한 의심을 떨치지 못하는 형수에게 주영은 말한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 아이러니하게도 탈출을 앞두고 주영이 형수에게 하는 말들 중 상당 부분은 진실이다. 이를테면 모르핀이 화폐보다 훨씬 가치 있어질 것이라는 말들이다. 그러나 형수는 믿지 않는다. 합리적인 행동 같았던 의심은 그렇게 사람의 눈을 가린다.
아버지를 살리려 신장을 사러 온 극렬은 그나마 숨통을 틔워준다. 부모를 살리려 최후의 방법을 선택한 그의 심정을 시청자들은 이해할 수 있다. 형수의 신장을 떼어가기 위해 형수를 지켜주는 아이러니한 행동, 환자복을 입은 아버지와 찍은 휴대폰 배경사진 등은 그의 진심과 절박함을 보여준다. 그래도, 그 역시 죄 없는 사람의 장기를 불법으로 구매하려 한 악인이다.
○개운하지 않은 결말
극의 전개는 게임과 유사하다. 주영과 형수 모두 지진 직후 지하 맨 아래 층 시체처리방으로 떨어진다. 이들은 레벨 업을 하듯 고군분투하며 한 층씩 올라간다. 게임의 기본 캐릭터처럼 빨간 속옷만 입고 시작한 형수는 마지막에는 옷과 무기, 가방 등 각종 아이템을 갖춘다.
각 층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NPC(게임 속 등장인물) 같은 느낌을 풍긴다. 시체를 처리하는 괴물 같은 덩치와 체력의 인물들, 장기매매의 미끼로 일했던 주영의 여성 동료들, 경매 참가자들과 조직의 폭력배 등이다. 이들은 차례로 등장해 주영과 형수에게 정보나 아이템을 주고, 극을 진행시킨 후 사라진다.
결말은 게임의 엔딩과 다르다. 우여곡절 끝에 최종 ‘퀘스트’를 완수하나 싶었지만 끝은 모호하다. 시즌 2를 예고했을 수도 있지만, 전날 무슨 일이 있었건 오늘은 또 새로운 하루를 살아내야 하는 씁쓸한 현실 같기도 하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