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서방 기업들의 잔류 자산을 압류하는 법안에 전격 서명했다. 러시아는 추후 해당 자산을 완전히 국유화하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15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지난주 푸틴 대통령은 서방 기업들의 자산을 압류해 헐값에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 등을 담은 법안을 비밀리에 통과시켰다. 대상은 지난해 개전 이후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했지만 투자지분이나 자회사, 부동산 등 자산이 일부 남아있는 미국과 유럽연합(EU)의 기업들이다.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대한 보복 차원이다.

FT가 입수한 크렘린궁 내부 문건에 의하면 러시아 정부는 서방 자산을 상당히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해 이익을 남기고 매각할 수 있는 우선권을 부여받게 된다. 또 서방 자산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 국적 투자자들에 해당 자산을 인수하거나 외국인 투자자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절차를 밟도록 요구하는 내용도 담겼다. FT는 "외국 기업들의 출구 전략을 봉쇄하는 조치"라고 전했다.

또한 서방 자산의 새로운 소유주가 될 러시아인 구매자들에게는 자산의 20%를 러시아 주식시장에 유동화하도록 했다. 이번 법안에 적용될 서방 자산 매입가격 기준은 크렘린궁이 앞서 작년 12월 발표한 외국 기업의 자산 처분에 관한 규칙을 따를 것으로 보인다. 당시 규칙에 의하면 서방 기업들은 러시아 국적 구매자에게 자산 가치의 최소 50%를 할인해 주고, 거래 가격의 5~10%를 예산에 자발적으로 기부하도록 해 놨다.

러시아를 떠난 뒤 남은 자산을 매각하는 과정을 밟고 있는 서방 기업의 한 고위직 임원은 "향후 러시아의 국유화 조치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한다"며 "(재정 고갈을 우려하는) 국가는 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는 주로 상품 수출입에 의존해왔던 나라다. 서방의 원자재 기업들이 주로 타깃이 될 것"이라며 "테크기업들은 (대신) 운영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영향을 덜 받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러시아 재정적자는 420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에너지 자원의 원활한 수출길이 막히고 군사비 지출 급증했기 때문이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궁 대변인은 과거 FT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사업을 정리하는 서방 기업들을 '불량(naughty)' 기업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당시 "러시아에서 직원들에 대한 급여 지급을 완전히 중단하거나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러시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서방 기업들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 "기업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불량 기업의 범주에 속한다"며 "우리는 그런 기업들에 작별을 고할 것이고, 그후 그들의 자산으로 무엇을 할지는 우리가 결정할 사안"이라고 강조했다.

러시아는 작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이후 서방의 제재에 맞대응하기 위해 일부 서방 기업을 국유화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FT는 "푸틴 대통령은 지난 4월 핀란드 포텀, 독일 유니퍼의 현지 자회사를 인수하는 등 극히 드문 경우에 한해 부분적으로 이뤄졌던 국유화 조치를 확대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서방에 의해 동결된 3000억유로(약 417조원) 가량의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자산이 어떻게 처리될지를 면밀히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날 미국 상원에서는 동결된 러시아 중앙은행 해외자산을 우크라이나 국가 재건에 쓰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