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쿨한 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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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최승연의 뮤지컬 인물 열전

사실 진이는 또 다른 주인공, 단이에 비해 비중이 크지 않다. 단이의 복수와 성장이 뮤지컬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진이는 작품의 최강 빌런, 시조 대판서 홍국의 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진이를 오해할 수도 있다. ‘단이를 도와주다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비련의 여주인공 아니야?’ 라고. 이런 여성들이 그동안 뮤지컬에 너무 많았던 탓이다.
하지만 진이는 비련과 비애 같은 정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진이는 대담하고 때로는 비장하기까지 하다. 진이는 (가상의) 조선에서 시조 놀음을 하는 국봉관 최고 스타다. 극중 조선은 역모 사건이 터진 이후 백성들의 언로를 막기 위해 15년간 시조를 금지하고 있다. 금지된 시조를 자유자재로 읊는 진이의 기백도 놀랍지만 지금으로 치면 클럽이라고 할 법한 국봉관에서 손님들을 쥐락펴락하는 솜씨도 그만이다.

진이는 재치와 눈치도 남다르다. 다른 생각과 다른 것을 인정하는 포용력도 갖췄다. 진이는 단이를 저자 거리에서 한 눈에 알아본다. 무위도식하는 후레자식이라 모두가 손가락질 하는 단이를, 진이는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을 눈치보지 않고 하는 게 ‘조선 수액’이라는 단이의 말과 행동이 가슴에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이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단이를 아주 품위 있게 도와준다. 이 태도는 단이가 골빈당에 흡수된 이후에도 계속 유지된다. 진이는 단이의 가족사에 눈물 지으면서도 그와 가까워지지 않는다.
그보다 진이는 아버지 홍국과 갈등하며 자신의 가족사에 집중한다. 진이는 아버지를 이해하기에 거역한다. 어머니의 죽음을 나약한 국가의 책임으로 돌리고 강력한 국가 만들기에 주력하는 아버지를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진이 역시 어머니의 죽음이 자신의 행동과 신념의 동력임을 선언한다. “옳다고 믿는 일에 주저해선 안 돼. 머물러 서 있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라는 어머니의 말을 아버지 앞에서 외친다. 아마도 진이는 아버지를 이해하기에 아버지의 이성을 깨우고 싶었을 것이다. 무엇을 해결해야 하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아는 모습이다.
하지만 진이는 자신을 자랑하는 법이 없다. 끝까지 한 길로 달리는 골빈당의 동역자, 신념에 의해 행동하는 존재로 남는다. 골빈당은 우여곡절 끝에 왕이 주최한 시조경연대회에 참여한다. 그러나 진이는 이 축제 같은 대회에 참여하지 않는다. 대신 뒤에서 이들을 지켜보고 있다가 홍국이 놓은 덫에 자발적으로 함께 걸려든다. 진이는 골빈당을 위해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유일하게 나서는 존재이며, 죽음을 앞두고 극도의 정신적 혼란을 겪는 단이에게 다시 신념을 불어넣는 존재다. 진이의 이 신념은 그들을 모두 구원하는 동력이 될만큼 강하다. 진이의 신념에 감복한 홍국의 심복 조도가 목숨을 걸고 이들을 탈출시킨 것이다.

(사진 제공: PL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