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사진)이 자국에서 철수한 서방 기업들이 남기고 간 자산을 압류하는 법안에 전격 서명했다. 서방의 러시아 제재에 대한 보복이라는 평가다. 러시아는 이 자산을 완전히 국유화하는 방안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파이낸셜타임스(FT)의 15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서방 기업들의 자산을 압류해 헐값에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핵심으로 한 법안을 지난주 비밀리에 통과시켰다. 지난해 2월 우크라이나전쟁이 시작된 뒤 러시아에서 사업을 철수했지만 투자 지분이나 자회사, 부동산 등 자산을 남겨둔 미국과 유럽연합(EU) 기업들이다.

FT가 입수한 내부 문건에 따르면 러시아 정부는 서방 자산을 대폭 할인된 가격으로 매입한 다음 매각할 수 있는 우선권을 갖게 된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이익을 거둘 전망이다. 서방 자산의 매입가격 기준은 크렘린궁이 지난해 말 발표한 규칙이 적용될 전망이다.

이 규칙에 따르면 서방 기업은 러시아 국적 구매자에게 최소 50%를 할인해 주고, 거래 가격의 5~10%를 예산에 자발적으로 기부해야 한다. 구매자에게는 서방 자산의 100% 소유권을 러시아 개인 또는 기업이 갖고, 외국인 투자자를 완전히 배제하도록 요구하기로 했다. FT는 “서방 기업들의 출구 전략을 봉쇄하는 조치”라고 평가했다. 가능한 경우 구매자들은 서방 자산의 20%를 러시아 증시에 유동화할 의무도 지게 된다.

러시아에서 철수한 뒤 남은 자산을 매각하고 있는 서방 기업의 한 고위직 임원은 “러시아가 재정 고갈을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서방 자산을 국유화할 가능성을 크게 본다”며 “서방 원자재 기업을 집중적으로 노릴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올해 들어 현재까지 러시아 재정적자는 420억달러(약 54조원)로 추산된다. 서방의 제재로 원유 등 에너지 자원의 수출길이 막히고, 우크라이나전쟁으로 군사비 지출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개전 이후 러시아인 100만 명 이상이 조국을 떠나면서 인력 문제가 심각해져 러시아 경제는 악화일로를 걸을 전망이다.

서방은 러시아가 국유화를 얼마나 확대할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전쟁 뒤 러시아가 국유화한 서방 기업은 핀란드 포텀, 독일 유니퍼의 현지 자회사에 그쳤다. FT는 “푸틴 대통령이 국유화 확대를 본격 검토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며 “서방의 제재로 동결된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자산 3000억유로(약 417조원)어치가 어떻게 처리될지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고 관측했다.

이날 미국 상원에서는 동결된 러시아 중앙은행 해외자산을 우크라이나 국가 재건에 쓰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이 발의됐다. 미국은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등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과 함께 우크라이나에 단·중거리 방공 미사일을 전달하는 등 군사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김리안/김인엽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