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진열된 라면을 둘러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서울의 한 대형마트에서 소비자가 진열된 라면을 둘러보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농심, 삼양식품 등 라면 업체들이 끝내 제품 가격 인하 검토에 나섰다. 라면 기업들은 지난해 9월부터 줄줄이 단행한 가격 인상과 해외 부문 호실적 등의 영향으로 지난 1분기에 대폭 개선된 실적을 잇따라 내놨다.

이를 계기로 소비자들 사이에서 “라면의 원자재 중 상당 비중을 차지하는 밀 가격이 많이 떨어진 만큼 이제는 가격을 내려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했다. 라면 기업들은 “아직 원가 부담이 상당하다”며 손사래를 쳐왔다.

하지만 정부가 나서 강하게 압박하자 태도를 바꾼 것이다. 라면 회사들은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가격을 인하한 후 지금까지 가격을 내린 적이 없다.

입장 바꾼 라면업계

"수익성 겨우 회복했는데"…라면업계 울상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18일 KBS ‘일요진단’에 출연해 라면값과 관련, “기업들이 밀 가격이 내린 것에 맞춰 제품값을 적정하게 내렸으면 좋겠다”고 언급했다. “정부가 가격을 통제할 수는 없다”고 전제를 달기는 했지만 “이 문제는 소비자 단체들이 압력을 행사했으면 좋겠다”며 사실상 강력한 ‘인하 메시지’를 전달했다.

추 부총리의 발언이 알려진 직후만 하더라도 “가격 인하 계획은 없다”고 버티던 라면 업체들은 오후가 되면서 입장을 속속 바꿨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국민 부담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심 측도 “여러 가지 어려운 실상이 있지만 가격과 관련해 다각도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했다. 라면업계 관계자는 “주요 라면 회사 경영진이 ‘국민 고통 분담 방안을 찾아보라’고 지시하면서 분위기가 바뀐 것으로 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라면을 콕 찍은 이유

추 부총리가 라면을 콕 찍어 가격 인하를 사실상 압박하고 나선 데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전반적으로 둔화하고 있지만 라면을 비롯한 주요 먹거리 물가는 두 자릿수로 치솟아 국민들이 이를 체감하지 못하는 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19개월 만에 가장 낮은 상승폭(3.3%)을 나타냈다. 하지만 가공식품·외식 부문의 세부 품목 112개 중 31개(27.7%)의 물가상승률은 10%를 웃돌았다. 특히 라면은 소비자물가지수가 1전 년보다 13.1% 올랐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인 2009년 2월(14.3%) 후 14년3개월 만의 최고치다.

팜유와 합쳐 전체 생산비용의 60% 정도를 차지하는 밀 시세가 하락한 것도 이유 중 하나다. 추 부총리는 이날 방송에서 국제 밀 가격이 지난해보다 많이 내린 것을 라면값 인하의 정당성 근거로 제시했다.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거래되는 소맥 선물의 이달 평균 가격은 t당 231.0달러로 지난해 5월과 10월 대비 각각 44.9%, 27.7% 떨어졌다.

우크라전 격화에 밀가격 반등세

식품업계는 2010년 이명박 정부 때의 선례로 미뤄 라면 회사들이 실제 가격 인하에 나설 공산이 큰 것으로 본다. 당시에도 정부가 밀 가격 하락을 이유로 전방위 압박을 펼치자 농심은 ‘신라면’ 등 주력 제품의 가격을 2.7~7.1% 내렸다. 한발 더 나아가 식품업계 전체적으로 가격 인하에 줄줄이 동참했다.

라면 업체들은 가까스로 회복한 수익성(영업이익률)이 다시 악화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내 1위 농심은 2021년과 2022년 3%대에 머무른 영업이익률이 1분기에 가까스로 7%대로 올라왔다. 이는 비교 대상으로 꼽히는 일본 1위 닛신이 매년 8~10%의 이익률을 꾸준히 내는 것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국제 밀 가격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최근 다시 격화해 반등 추세를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안심할 수 없다는 게 업계의 주장이다. 한 라면 회사 관계자는 “지난 2년간 반토막 났던 영업이익률이 해외 판매 호조로 올 들어 가까스로 정상화됐다”며 “원가 부담이 전반적으로 큰 상황에서 국제 밀 가격만을 이유로 가격을 내리면 수익성이 다시 악화할 것”이라고 토로했다.

하수정 기자 agatha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