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된 나무가 임윤찬이 선택한 피아노가 되기까지
유치원 대신 피아노학원을 다닌 나는 피아노가 진심으로 좋았다. 어지간한 친구네 집에는 피아노가 한 대씩 있던 시절이었고, 나 역시 피아노가 갖고 싶었다. 며칠 밤낮을 울며 떼쓴 결과, 드디어 나에게도 피아노가 생겼다. 이제 열심히 배우고 연습해 피아니스트가 될 터였다.
열정은 중요하지만 열정만으로 안 되는 일이 있다. 예술적 감각이라는 건 1만 시간이 지나도 생기지 않는 듯했다. 그럭저럭 잘했지만, 거기까지였다. 아, 피아노는 가질 수 있어도 재능은 가질 수 없구나.
그리고 세상에는 가질 수 없는 피아노도 있다. 아니, 가질 수는 있지만 콘서트홀 하나 소유할 정도의 재력을 전제조건으로 갖추어야 한다. 전 세계 연주회장을 장악한, 세계적 피아니스트의 공연마다 측면에 새겨진 금빛 로고로 그 위풍당당함을 드러내는 ‘스타인웨이 콘서트 그랜드’(모델명 D274)가 그 주인공이다.
「뉴욕타임스」 기자 제임스 배런은 뉴욕의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 공장에서 콘서트 그랜드 피아노 K0862가 제작되는 과정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자동화의 물결에서 빗겨나 수 세대를 이어온 방식으로 피아노의 각 부분을 만들고 조립하는 숙련공들은 물론이고, 2.73미터의 몸길이에 맞는 공명판으로 쓰일 가문비나무를 보기 위해 직접 밀림으로 향하는 목재공학자, 기계적이 아니라 예술적으로 완벽한 음정을 추구하는 조율사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윤오영의 수필 ‘방망이 깎던 노인’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500년 된 나무가 임윤찬이 선택한 피아노가 되기까지
치밀하게 묘사되는 공정 사이에는 독일의 악기 제작자였던 하인리히 엥겔하르트 슈타인베크 일가가 미국으로 건너와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를 설립하고 미국 최고의, 나아가 세계 제일의 피아노 제조사가 된 과정이 솜씨 좋게 교차한다. 이야기 속에는 세계박람회에서 인정받기 위한 치졸한 싸움도, 부품 제조의 취약점도, 경제적 위기로 인한 불안도 함께 담겨 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스타인웨이가 세계 최고의 피아노라는 사실에 별다른 걸림돌이 아니라는 듯이 읽힌다.
임윤찬
임윤찬
2022년 임윤찬이 반 클라이버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할 당시 선택한 피아노 역시 스타인웨이였다. 얼마 전 스타인웨이 앤드 선스 공식 유튜브 채널에는 임윤찬의 반 클라이번 콩쿠르 세미파이널 실황 영상이 공개되었다(스타인웨이 앤드 선스는 이 실황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다). ‘리스트 초절기교 연습곡 5번’ 연주 영상을 보며, 갖가지 상상을 해본다. 저 날 임윤찬이 연주한 스타인웨이는 어떤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졌을까. 누가 림의 형태를 잡고, 누가 조율해, 어느 피아니스트의 시연을 거쳤을까. 책 한 권으로 음악을 더욱 풍부하게 즐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