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에 증강현실 입힌 화가 진 마이어슨 "AR은 내가 그림에 부여한 '출생기록'"
전세계 '핫한' 전시는 모두 모이는 '예술의 도시' 미국 뉴욕. 그 중에서도 맨해튼 록펠러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 현대미술 전시 '기원, 출현, 귀환'(Origin, Emergence, Return)은 요즘 뉴요커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는 데다 지난해 글로벌 아트페어(미술품 장터)인 '프리즈'가 서울에 진출하면서 한국 미술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서다.

전시 참여 작가 리스트를 보면 박서보·이배 등 익숙한 이름 사이로 낯선 외국인 이름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진 마이어슨'이다. 인천에서 태어나 네 살 때 미국 미네소타주 가정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 작가다. 뉴욕, 파리, 홍콩 등 세계 16개 도시를 돌아다니며 작품활동을 하다가 몇 년 전 한국인과 결혼하면서 서울에 정착했다.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이 떠오른다. '한국보다 미국에서 지낸 기억이 더 많을텐데, 왜 한국 미술의 흐름을 되돌아보는 전시에 참여한 걸까?'

최근 서울 문래동 작업실에서 만난 마이어슨에게 묻자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한국보다 일본에 더 오래 산 이우환도, 프랑스에서 30년간 살았던 이배도 모두 한국 작가이듯, 중요한 건 한국에 얼마나 있었느냐가 아니에요. 그보다는 그 안에 담긴 것이 중요하죠. 저는 그게 '한(恨)'이라고 생각해요."
회화에 증강현실 입힌 화가 진 마이어슨 "AR은 내가 그림에 부여한 '출생기록'"
그런 점에서 마이어슨은 자신도 '한국 예술가'라고 했다. 입양아로서 항상 지니고 살았던, '내가 누구인가'라는 고민과 한이 담겨있어서다. "애초 그림을 시작한 것도 한국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였어요. 미국에 입양되기 전 고아원에서 항상 그림을 그리곤 했거든요. 그림은 제가 한국을 기억하는 방법이었죠."

어렸을 때부터 쭉 그림을 그렸지만, 본격적으로 예술가가 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가 전업 작가생활을 시작한 1990년대 후반 뉴욕엔 아시안 예술가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게다가 회화 자체는 이미 '한물 간 것'처럼 여겨졌다.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뭔가 달라야 했다.

마이어슨이 찾아낸 답은 '포토샵'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당시만 해도 포토샵은 전문가가 아니면 쓰기 어려운 도구였다. 그는 회화에 포토샵을 접목했다. 잡지에 나온 이미지나 사진을 포토샵으로 왜곡한 후 캔버스에 그렸다.
회화에 증강현실 입힌 화가 진 마이어슨 "AR은 내가 그림에 부여한 '출생기록'"
그의 독특한 아이디어는 단숨에 세계 미술계를 사로잡았다. 2004년 런던 프리즈에선 영국 사치갤러리의 설립자인 찰스 사치가 그의 작품을 싹쓸이했다. 같은 해 열린 첫 개인전에선 '슈퍼 컬렉터'이자, 록펠러센터를 소유한 글로벌 부동산운용사 티시만스파이어 공동창립자 제리 스파이어가 그의 5m 길이 대작을 구매했다. 이 때 맺어진 스파이어와의 인연은 이번 록펠러 한국 전시로 이어졌다.

마이어슨은 이번 전시에선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그림을 핸드폰으로 찍으면 그 속에 숨겨진 QR코드를 통해 붓의 레이어와 스케치를 증강현실(AR)로 볼 수 있다. 그가 오랜 시간에 걸쳐 한 겹 한 겹 올린 물감 층이 3차원의 공간에서 되살아난다.

그는 AR이 그림에게 부여한 '출생 기록(birth record)'이라고 했다. "저는 단 한 번도 출생기록을 가져본 적 없고, 가져볼 일도 없잖아요. 하지만 제 그림만큼은 어떻게 태어났는지 자세히 기록하고 싶었어요. 입양아로서의 오랜 고민이 저를 AR로 이끌었다고 할까요. 하하."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