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죽자 남편은 춤췄다…70대 청년의 영원한 러브레터 [영화 리뷰]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영화 리뷰] 사랑하는 당신에게(Last Dance)
프랑스에 사는 70대의 제르맹은 고양이와 함께 온종일 집에서 느긋하게 하루를 보내는 노인이다. 두 차례 대동맥 수술을 받은 걸 빼면 평범한 남자다. 리즈는 매일 아침 남편의 머리 맡에 식사를 챙겨주며 잠을 깨우는 사랑스러운 아내다. 제르맹은 늦은 오후 무용 연습을 끝내고 밝은 목소리로 집에 오는 리즈를 기다리는 게 일상의 낙이다. 그런 아내가 죽었다. 그것도 갑자기.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어느 날 노부부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보통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라면, 어둡고 진지한 신파를 떠올릴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영화는 상실에 관한 유쾌한 극복기이자, 밝고 화사한 러브 스토리다.
홀로 남은 제르맹에겐 아내를 잃은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다. 자식들이다. '걱정이 많은' 아들과 딸, 며느리는 제르맹을 극성맞게 보호한다. 당번 요일과 시간표를 짜서 자식과 손주들이 번갈아 가며 매일 찾아온다. 전화기는 수시로 울려댄다. 다 먹지도 못할 음식들로 냉장고는 넘쳐난다. (제르맹은 시도때도 없이 동네 고양이들을 다 불러 배불리 먹인다!)
그때 제르맹은 오래 전 아내와의 약속이 떠오른다.
"우리,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 남은 사람이 상대가 하고 싶어했던 일을 마무리 짓자."
덥수룩한 흰 수염에 배 나온 노년의 제르맹은 그렇게 현대무용단에 입단한다. '아내를 대신해 무용수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를 세계적인 안무가 라 리보트는 기꺼이 받아준다. 아둔한 몸짓에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시종일관 불편해 하는 그를 보며 안무가는 공연 4주 전 모든 안무를 다 바꾸기로 결심한다. 죽은 아내를 위해 난생 처음 춤을 배우는 그를 작품의 중심에 두기로 한 것. 반발하던 단원들은 서서히 제르맹의 노력에 동화된다.
영화는 춤 장면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자식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춤 연습을 비밀로 한 제르맹에겐 하루 하루가 스파이 작전과 같다. 집을 몰래 빠져나오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에선 웃음이 터진다.
첫 장면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문학적 정서도 볼만하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마르셀 푸르스트가 등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낭독하고, 제르맹은 홍차와 마들렌을 먹는 식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걸작을 유머러스하게 배치해 품격 있는 위트를 보여준다.
영화는 제르맹이 죽은 아내에게 매일 쓰는 편지들로 서사를 이어간다. 제르맹은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매일 춤 연습을 하고, 그 감정을 담아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당신과 작별할 수 있을까? 보고싶어, 영원히 사랑해. -당신의 제르맹.' 제르맹의 편지 장면은 관객들을 계속 궁금하게 한다. 그는 정성껏 쓴 손편지를 동네 도서관으로 가져간다. 그러곤 서가에 꽂힌 책 어딘가에 몰래 접어 꽂아둔다. 그의 이상한 행동의 비밀은 영화 말미에 밝혀진다. 부부가 수십 년 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그 도서관. 당시 제르맹은 25세, 리즈는 22세였다. 각자 쓴 편지를 L(리즈)과 G(제르맹)로 시작하는 책 서가의 22페이지와 25페이지에 꽂아두고 보물찾기 하듯 상대의 편지를 찾아 읽는 연애를 1년 넘게 했던 것.
영화는 제르맹의 첫 공연으로 이어진다. 70대의 아버지를 일곱 살인양 걱정하던 가족들은 그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몸짓에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갈채를 보낸다. 리즈와 제르맹이 처음 만난 그 순간을 말하려는듯,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같은 비트와 절제된 동작들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도서관에서 무대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선 좌석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여성 감독인 델핀 르에리세는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다. 코로나19에 걸려 만날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가 매일 러브레터를 보낸 것을 모티프로, 갑작스럽게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 제르맹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르에리세는 "97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활기 넘치는 할아버지를 보며, 노년기 역시 사춘기처럼 되돌릴 수 없는 변화와 마주하는 인생의 한 단계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영화 곳곳에서 어린 아이같고, 열정 넘치는 청년과 같은 제르맹의 모습은 감독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스페인의 '피나 바우쉬'로 불리는 세계적인 안무가 라 리보트와 그의 무용단원들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2020년 베니스 비엔날레 평생 공로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라 리보트는 르에리세와 함께 예술적 미장센과 음악에만 치중해온 무용 영화의 공식을 깨고 '누구나 춤을 출 수 있고, 춤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데 성공했다.
액션물을 주로 연기해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국민배우 프랑수아 베를레앙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제르맹을 연기했다. 76년 역사의 스위스 최대 영화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지난해 관객상을 받았다. 영화의 원제는 '라스트 댄스(Last Dance)'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제르맹은 자신의 무대를 즐긴 관객들에 둘러싸여 흔들흔들 춤을 이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던 것을 계속 하면서. 이 춤(사랑)은 끝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영화 '사랑하는 당신에게'는 어느 날 노부부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죽음과 이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보통 이런 주제를 다룬 영화라면, 어둡고 진지한 신파를 떠올릴 수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이 영화는 상실에 관한 유쾌한 극복기이자, 밝고 화사한 러브 스토리다.
홀로 남은 제르맹에겐 아내를 잃은 것보다 더 큰 어려움이 있다. 자식들이다. '걱정이 많은' 아들과 딸, 며느리는 제르맹을 극성맞게 보호한다. 당번 요일과 시간표를 짜서 자식과 손주들이 번갈아 가며 매일 찾아온다. 전화기는 수시로 울려댄다. 다 먹지도 못할 음식들로 냉장고는 넘쳐난다. (제르맹은 시도때도 없이 동네 고양이들을 다 불러 배불리 먹인다!)
그때 제르맹은 오래 전 아내와의 약속이 떠오른다.
"우리, 누가 먼저 세상을 떠나든, 남은 사람이 상대가 하고 싶어했던 일을 마무리 짓자."
덥수룩한 흰 수염에 배 나온 노년의 제르맹은 그렇게 현대무용단에 입단한다. '아내를 대신해 무용수로 무대에 서고 싶다'는 그를 세계적인 안무가 라 리보트는 기꺼이 받아준다. 아둔한 몸짓에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시종일관 불편해 하는 그를 보며 안무가는 공연 4주 전 모든 안무를 다 바꾸기로 결심한다. 죽은 아내를 위해 난생 처음 춤을 배우는 그를 작품의 중심에 두기로 한 것. 반발하던 단원들은 서서히 제르맹의 노력에 동화된다.
영화는 춤 장면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자식들의 걱정을 덜기 위해 춤 연습을 비밀로 한 제르맹에겐 하루 하루가 스파이 작전과 같다. 집을 몰래 빠져나오고, 이웃에게 거짓말을 하는 장면에선 웃음이 터진다.
첫 장면부터 끝까지 관통하는 문학적 정서도 볼만하다. 영화의 오프닝에서 마르셀 푸르스트가 등장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낭독하고, 제르맹은 홍차와 마들렌을 먹는 식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문학사의 걸작을 유머러스하게 배치해 품격 있는 위트를 보여준다.
영화는 제르맹이 죽은 아내에게 매일 쓰는 편지들로 서사를 이어간다. 제르맹은 빨간 트레이닝복을 입고 매일 춤 연습을 하고, 그 감정을 담아 아내에게 편지를 쓴다.
'무사히 공연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당신과 작별할 수 있을까? 보고싶어, 영원히 사랑해. -당신의 제르맹.' 제르맹의 편지 장면은 관객들을 계속 궁금하게 한다. 그는 정성껏 쓴 손편지를 동네 도서관으로 가져간다. 그러곤 서가에 꽂힌 책 어딘가에 몰래 접어 꽂아둔다. 그의 이상한 행동의 비밀은 영화 말미에 밝혀진다. 부부가 수십 년 전 처음 만난 곳이 바로 그 도서관. 당시 제르맹은 25세, 리즈는 22세였다. 각자 쓴 편지를 L(리즈)과 G(제르맹)로 시작하는 책 서가의 22페이지와 25페이지에 꽂아두고 보물찾기 하듯 상대의 편지를 찾아 읽는 연애를 1년 넘게 했던 것.
영화는 제르맹의 첫 공연으로 이어진다. 70대의 아버지를 일곱 살인양 걱정하던 가족들은 그의 자유롭고 아름다운 몸짓에 모두 눈물을 흘리며 갈채를 보낸다. 리즈와 제르맹이 처음 만난 그 순간을 말하려는듯, 두근 두근 심장 소리같은 비트와 절제된 동작들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도서관에서 무대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선 좌석 곳곳에서 눈물을 훔치는 소리가 들렸다. 유럽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여성 감독인 델핀 르에리세는 자전적 이야기를 영화에 담았다. 코로나19에 걸려 만날 수 없는 할머니를 위해 할아버지가 매일 러브레터를 보낸 것을 모티프로, 갑작스럽게 아내를 떠나보내게 된 제르맹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르에리세는 "97세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활기 넘치는 할아버지를 보며, 노년기 역시 사춘기처럼 되돌릴 수 없는 변화와 마주하는 인생의 한 단계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영화 곳곳에서 어린 아이같고, 열정 넘치는 청년과 같은 제르맹의 모습은 감독이 자신의 할아버지에게 바치는 헌사와도 같다.
스페인의 '피나 바우쉬'로 불리는 세계적인 안무가 라 리보트와 그의 무용단원들을 스크린에서 만나는 즐거움도 크다. 2020년 베니스 비엔날레 평생 공로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라 리보트는 르에리세와 함께 예술적 미장센과 음악에만 치중해온 무용 영화의 공식을 깨고 '누구나 춤을 출 수 있고, 춤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본질을 이야기하는 데 성공했다.
액션물을 주로 연기해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은 국민배우 프랑수아 베를레앙은 몸에 꼭 맞는 옷을 입은 듯 제르맹을 연기했다. 76년 역사의 스위스 최대 영화제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지난해 관객상을 받았다. 영화의 원제는 '라스트 댄스(Last Dance)'다. 하지만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제르맹은 자신의 무대를 즐긴 관객들에 둘러싸여 흔들흔들 춤을 이어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하던 것을 계속 하면서. 이 춤(사랑)은 끝이 아니라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듯이.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