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라고 하는 것은 어떤 주제가 표현되기 전에, 특정한 질서에 따라 배열된 색들로 덮여진 평면이다.”

-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 1870-1943)
회화의 미래를 내다본 ‘나비파’ 화가들
나비파의 시작을 알린 폴 세뤼지에의 부적 또는 사랑의 숲이 있는 풍경(1888).
제목에 ‘풍경’이 없었다면 주제를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추상적 성격을 띤다.
그의 풍경화에서는 빛의 반사에 따라 색이 달라지지 않는다.

자연을 눈으로 직접 관찰하면서 캔버스 위에 표현한 인상주의 회화의 한계를 언급한 작가들이 있었다. 그들은 어떠한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색 본연의 순수함을 추구하는 것이 회화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상주의는 색채를 표현하는 데에 있어 시각적인 것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작가의 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여기에 과학적 색채 이론을 접목시켜 발전시킨 신인상파의 점묘화도 그들에게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실제로 인상파 이전의 회화 작품들은 대부분 상상화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 모델을 보고 그리며 인체의 움직임에 따른 근육의 변화와 다양한 자세에 대해 연구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화면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들은 작가의 지식과 경험, 상상력을 바탕으로 재현된다. 이렇게 나비파는 영감과 상상에 의존한 회화를 추구해 나갔다. 캔버스 위에는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예술가의 정신이 담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화의 미래를 내다본 ‘나비파’ 화가들
모리스 드니가 그린 폴 세뤼지에의 초상화(1918), 정면을 응시하는 세뤼지에와 손의 위치와 좌측 상단 ‘EN TA PAUME’(당신의 손 안에)라는 글귀와 서체는 비잔틴 시대의 이콘 중 그리스도의 이미지(우)를 연상시킨다.
나비파는 1888년 폴 세뤼지에(Paul Sérusier, 1864-1927) 가 폴 고갱을 만나면서 시작된다. ‘작가는 현실과 구별되어 자신의 직관을 따라가야 하며 본인의 방식대로 실재를 표현해야 한다’는 고갱의 가르침을 받은 세뤼지에는 동료 화가들과 공감대를 이룬다. 언론에서 부정적인 뉘앙스로 쓰였던 단어가 곧 화파의 이름이 되었던 ‘인상’파나 ‘야수’파와 달리, 이들은 스스로를 ‘나비파’라고 명명했다. 히브리어로 ‘예언자’, ‘비밀을 드러내는 자’, ‘신에게 영감을 받는 자’를 뜻하는 ‘나비’(Nabis, nebiim)에서 비롯된 이름에 걸맞게 신지학과 심령주의에 매료되어 있었으며, 고대부터 이어져 온 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관심이 많았다. 이는 감성과 신비로움을 연관지어 표현하고자 했던 상징주의 회화와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회화의 미래를 내다본 ‘나비파’ 화가들
펠릭스 발로통(Félix Vallotton), 행인(La Passante), 1897.

나비파의 회화에는 평면적인 모습이 돋보인다. 인물의 형태나 풍경에서 원근법을 적용시키지 않아 입체감이 사라졌다. 그들은 색의 농담(濃淡)으로 음영과 입체적인 공간을 표현했던 전통 방식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고, 캔버스는 평면임을 인정하고 색은 색대로 그 위에 순수하게 드러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캔버스라는 평면 위에 3차원 공간을 표현하는 것은 허구이며, 관람자들에게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는 착시효과에 그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본 목판화(우키요에)는 그들에게 큰 영감을 줄 수 있었다. 단순한 몇 개의 선으로 하나의 형태를 표현해냈고, 색상을 복잡하게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림의 주제는 명료하게 드러났고, 장식적인 면에서도 훌륭했다.
회화의 미래를 내다본 ‘나비파’ 화가들
가쓰시카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31)와 조르주 라콩브의 파도치는 푸른바다(1893). ‘나비파의 조각가’로 알려진 라콩브는 특히 일본 목판화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나비파는 이집트시대 벽화, 중세시대 스테인드글라스, 비잔틴제국의 모자이크 작품에 적잖은 영향을 받았다. 평면적이고 단순한 표현방식에 이끌렸으며, 상징적 이미지를 통해 신앙과 교육의 목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을 주목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의 장식적 기능에 관심을 가졌는데, 나비파에게 예술이란 삶에 가까이 있어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구분되어 있었던 벽이나 가구 위에 그리는 장식화와 이젤 위에 놓고 그리는 캔버스 회화의 경계를 허물기에 이른다. 실제로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 에두아르 뷔야르(Edouard Vuillard, 1868-1940) , 펠릭스 발로통은 포스터, 목판화, 삽화, 병풍과 부채 등을 활용한 작품을 꾸준히 이어갔다.
회화의 미래를 내다본 ‘나비파’ 화가들
에두아르 뷔야르가 판지 위에 그린 마로니에(1895)와 프랑스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중 일부.

뷔야르의 화면 구성방식과 색의 사용이 중세 시대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회화의 미래를 내다본 ‘나비파’ 화가들
피에르 보나르의 정원의 여인들(1891). 4점의 회화 연작이 병풍식 구조로 나란히 배치되어 있다. 각각 다른 배경들이 패턴처럼 표현되어 장식성을 더한다.
나비파는 색채의 자유로운 사용과 틀에 벗어난 공간의 표현을 통해 회화의 본질을 연구했다. 특히, 색지를 오려 붙인 듯한 평면적 구성 방식은 이후 브라크와 피카소가 입체주의 회화를 발전시키는 데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비록 나비파로서 활동한 기간은 짧았지만 캔버스라는 전통 매체를 벗어나 인간의 삶에 밀접한 예술을 위한 새로운 시도를 하였고,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부터 끊임없이 영감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