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회장 "스스로 판단하라" 부친과 토론서 배운 경영철학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학창 시절 매주 주말 오후에 네 시간씩 이어지는 가족 식사 모임을 했다. 최종현 선대회장을 비롯해 최 회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동생), 최신원 전 SK네트웍스 회장(사촌 형), 최창원 SK디스커버리 부회장(사촌 동생) 등이 참석하는 자리였다. 모임은 매번 정치, 경제, 사회, 과학 등의 이슈를 토론하는 장으로 변했다.

최 회장이 모임 등을 통해 부친으로부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습관을 길렀다. 대학 전공(고려대 물리학)과 유학 당시 전공(미국 시카고대 경제학)도 최 회장의 선택이었다.

부친에게서 들은 이 한 문장은 최 회장이 1998년 그룹 수장을 맡았을 때도 큰 힘이 됐다고 한다. 당시 한국은 외환위기로 ‘대마불사’ 신화가 깨지고 한보 기아 해태 등 대기업이 줄줄이 무너지던 때였다. 서른여덟의 나이로 33조원의 자산을 보유하고 2만4000명이 근무하는 SK그룹 수장에 올랐다. 당시 SK그룹도 부채비율이 500%에 육박하는 등 유동성 압박을 받았다. 최 회장은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올해 신년사에 “SK 역사는 고난을 극복한 뒤에 더 큰 도약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최 회장은 위기 속에서도 기회를 포착해 인수합병(M&A)과 대규모 투자에 나서는 등 승부수를 던졌다. 2011년 11월 10일 새벽 서울 종로 SK서린사옥에서 이틀간 열린 경영진 회의가 대표적이다. 당시 그룹 경영진 사이에선 매물로 나온 하이닉스 입찰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최 회장은 “나의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야성적 충동)을 믿어달라. 인수 가격은 중요하지 않고 인수 후의 기업가치가 중요하다”고 경영진을 설득했다. 결국 입찰 마감일 날이 밝자 회의실에서 나와 마감 7분 전에 인수 제안서를 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매출 44조6500억원을 올리고, 영업이익 7조원을 내 SK그룹 핵심 계열사로 자리 잡았다.

2015년 반도체 제조용 특수가스 회사인 OCI머티리얼즈(현 SK머티리얼즈)를 샀고, 2017년엔 웨이퍼 회사인 LG실트론(현 SK실트론)을 인수했다. 2019년 미국 듀폰 SiC웨이퍼사업부, 2020년엔 인텔의 낸드사업부를 10조3000억원에 각각 품었다. 다우케미칼 에틸렌아크릴산 사업부와 세계 1위 동박 제조사인 KCFT도 사들였다. 동박은 2차전지 핵심소재다. 미국의 의약품 생산회사인 앰팩(AMPAC)도 SK그룹 계열사로 들였다.

이 같은 승부수는 그룹 매출 구조를 내수에서 수출로 바꾸고 반도체·배터리·석유화학·바이오 등으로 그룹 주력 사업을 ‘피버팅’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는 평가다. 지난해 SK그룹의 수출액은 83조원을 넘었다. 지난해 한국 수출(864조원)의 10%를 차지했다. 자산은 327조원으로 회장 취임 때보다 10배 가까이 불어났고, 임직원은 12만6000명으로 증가했다. 자신을 그룹 오너가 아니라 ‘디자이너’로 불러달라는 최 회장은 BBC(배터리·바이오·반도체)를 더 키우겠다고 공언했다. 2026년까지 BBC와 관련해 247조원을 투자하고 5만 명의 국내 인재를 뽑기로 했다.

김재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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