캡체이스·파이프·고위드까지…'대안 금융'이 뜨는 이유 [긱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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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트업은 벤처캐피털(VC)의 투자를 통해 성장한다. 투자를 많이 받을수록 높은 기업가치를 평가받는 데 유리하다. 이런 성장 공식에 '반기'를 든 사람이 있다. 베스트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 자산운용사 대표로 활동하다 지천명(知天命)을 바라보는 나이에 대안 금융 모델을 만드는 스타트업을 창업한 김항기 고위드 대표다.'VC 펀딩=성장' 공식에 반기..."공헌이익 기반 혁신기업에 은행 대출 허용해야"
캡체이스·파이프 등 '매출 기반 대출' 플랫폼 부상 속
발생할 매출을 할인해 즉시 현금 지급하는 '매출채권할인 서비스' 하반기 출시 27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고위드 사무실에서 만난 김항기 대표는 "건강한 벤처 생태계를 만들려면 금융이 바뀌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극초기 스타트업은 액셀러레이터와 벤처캐피털이 키우는 역할을 해주는 게 맞다"라면서도 "기업이 공헌이익을 내는 단계부터는 '대출' 모델이 있어야 효율적인 자금조달이 가능해져 기업이 올바른 성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주식으로 자본 조달만 계속하다 보면 성장 과욕을 부리기 일쑤다. 무엇보다 창업자 지분율이 과도하게 희석되는 부작용이 생겨 오히려 건강한 스타트업 생태계가 안 만들어진다는 지적이다.
현실적으로 담보와 신용이 없는 스타트업에 은행 대출의 장벽은 높다. 김 대표는 "기존 은행 대출은 산업혁명 시대 사업에 특화돼 있어 이익과 오프라인 담보물권 유무에 따라 대출을 해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성장하는 산업에 금융의 돈이 흘러가게 해야 한다'는 게 김 대표의 지론이자, 고위드의 목표다. 그는 "2005년 이후 유럽연합(EU)의 국내총생산(GDP) 추이가 정체된 가운데 미국 GDP는 지속해서 증가했다"며 "인터넷 빅테크 기업에 자금이 흘러 들어갔느냐 아니냐의 차이"라고 역설했다.
"공헌이익을 기준으로 대출 허용해야"
김 대표는 "공헌이익이 혁신기업에 대출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개념"이라며 "혁신기업은 실제 비즈니스에서 나오는 이익과 고정비가 합쳐지면 어쩌면 영원히 적자로 보이게 된다"고 강조했다.
공헌이익은 단위당 판매액에서 단위당 변동비를 뺀 것으로, 고정비를 회수하고도 얼마나 이익이 기여하는지를 보여준다. 플랫폼 기업은 제품 원가와 같은 변동비가 거의 없기 때문에 공헌이익률(매출액/공헌이익)이 높다. 지난해 3분기 흑자전환에 성공한 쿠팡은 2015년부터 공헌이익을 냈다. 진즉 공헌이익을 냈지만, 개발자 인력을 늘리고 물류센터를 확대하다 보니 대규모 적자 상태가 이어졌다.
공헌이익=판매액 - 변동비
영업이익=공헌이익 - 고정비
공헌이익을 기준으로 혁신기업에 대출이 허용되면, VC 펀딩은 필요 없을까. 김 대표의 대답은 Yes다. 예를 들어 투입비 10으로 15를 산출하는 기업이 미래에 대한 투자를 위해 50이 필요하다면, 10을 넣으면 15가 나오는 매출 구조를 담보로 돈을 빌려줘서 60을 투입하면 90을 내게 한다면, 기업은 잉여 현금흐름이 30이 생기기 때문에 3개월간 월 1% 이자를 부담하면서 증자 없이 회사를 운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는 "공헌이익을 기준으로 기업에 대출해주는 것은 산업혁명 시대 토지에 국한됐던 등기등록 제도를 공장, 자동차, 기계, 선박 등으로 확대한 것과 같은 혁신적인 시도"라며 "당시 등기제도를 확대 적용한 것도 결국 성장하는 곳에 돈을 빌려주기 위해서였다"고 설명했다.
세계적으로 부상하는 매출 기반 대출
공헌이익을 기준으로 혁신기업에 대출을 허용해야 한다는 김 대표의 주장은 세계적으로 매출 기반 대출(RBF·Revenue Based Financing)이 부상하고 있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반복적으로 매출을 내는 스타트업에 담보 없이 돈을 빌려주고, 미래 발생하는 매출액의 일정 비율을 상환하게 하는 것이다. 지분 희석이나 제한적인 독소 조항 없이 예상되는 반복 매출을 기반으로 현금 흐름을 당겨 조달할 수 있다.
캡체이스, 파이프 등 글로벌 핀테크 기업들이 매출 기반 대출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슬랙, 센드버드 등을 고객사로 둔 파이프는 간편하고 빠르게 대출이 실행돼 기업 내부의 지불 시스템과 연동돼 자금 흐름을 한눈에 확인하고 쉽게 상환할 수 있도록 했다.
서비스형 소프트웨어(SaaS) 기업을 대상으로 매출 기반 대출 서비스를 제공하는 캡체이스는 자금난을 겪고 있는 SaaS 기업을 위해 소프트웨어 제품을 먼저 구입하고 돈은 나중에 지불하는 기업용 'BNPL(Buy Now Pay Later)' 결제 시스템을 도입해 호응을 얻고 있다.
시작은 45일 단기대출
고위드는 공헌이익을 기반으로 은행에서 스타트업에 대출을 실행할 수 있도록 기업 신용평가 모델을 만드는 게 목표다. 1년에 한 번 나오는 기업 재무제표로는 기업의 재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실시간으로 변동비와 고정비 영역을 분리해 공헌이익을 계산할 수 있는 지표를 개발하고 있다.
2020년 4월 출범 이후 고위드가 가장 먼저 스타트업 법인카드 사업에 매진한 이유다. 김 대표는 "법인카드의 본질은 45일 단기 무이자 대출"이라며 "법인카드 사업으로 45일 동안 실시간으로 기업의 현금흐름을 예측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3·6·9개월 단위로 기업의 현금 흐름을 예측하는 단계로 확대하는 것을 시험 중"이라고 말했다.
카드 시장도 대출이라 스타트업은 법인 카드 발급이 어렵거나 낮은 한도를 받고 있었다. 고위드는 스타트업의 현금흐름과 월 활동자 수(MAU), 일간 이용자 수(DAU) 등 사업지표에 기반한 대안 신용평가 모델을 자체 개발해, 카드사를 설득했다. 스타트업의 자본금, 투자유치금, 비용지출 등을 분석해 법인카드를 발급해 주는 미국 핀테크 기업 브렉스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상황도 도움이 됐다.
마침내 2020년 5월 국내 최초로 스타트업을 위한 법인카드 ‘고위드 카드’가 출시됐다. 발급 3년 만에 7000여개 누적 고객사를 확보했다. 발급 첫해 누적 거래액 30억원을 시작으로 지난해 2710억원을 달성하며 전년 대비 3배 증가했다. 현재까지 누적 거래액은 4430억원, 누적 신용 한도액은 700억원에 이른다.
하반기 매출채권 할인 서비스 출시
고위드는 지난해 4월 고위드인사이트대부를 설립하고 스타트업 전용 단기 대출 서비스를 시작했다. 1500억원 규모 자기자본금을 가지고 법인카드 고객사를 대상으로 연간 매출 추정액의 15~20% 한도로 대출을 해줬다. 클래스101은 연 이자율 9.05%로 100억원을 빌렸다. 하지만 고금리 여파로 스타트업 불황이 이어지면서 스타트업 전용 대출 서비스는 출시 몇 달 만에 접고 말았다.
1년여 준비 끝에 대출 서비스 대신 매출채권 할인 서비스 '미래 매출 미리지급'을 올해 하반기에 선보인다. 과거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매출을 기반으로 향후 발생 예정인 매출을 할인해 즉시 현금으로 지급받는 방식이다. 앞으로 발생할 매출을 당겨 받는 것으로, 현금을 대여하고 상환하는 대출과는 차이가 있다.
고위드가 향후 발생 예정인 매출채권의 일부를 할인해 매입하면, 고객사가 해당 채권에서 유입되는 현금흐름을 모아서 채권 매도액의 3분의 1씩 분할해 3개월 동안 고위드에 지급하게 된다.
김 대표는 "매출채권할인 서비스는 기존 대출 서비스보다 제약 조건이 적어 서비스 이용이 수월하고 상품 집행 속도가 빠르다"며 "혁신 스타트업이 창업 팀과 주주의 지분을 희석하지 않고 자금을 빠르게 조달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2개월 누적 매출 30억원 이상 등 특정 조건을 충족한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을 논의 중이다. 벤처캐피털로부터 추천서도 받아야 한다.
쉽지 않은 길
업력이 짧은 핀테크 스타트업이 수십 년 경험과 네트워크가 축적된 은행의 영역인 대출을 파고든다는 것은 쉽지 않다. 김 대표는 "지난 3년간 스타트업 대출 모델을 만들려고 계속 데이터를 쌓고 법인카드를 만들고 자기자본으로 대출도 해보며 여러 가지 테스트했다"며 "이게 금융상품으로 나와 시중 은행에 공급할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2년은 더 소요될 것"이라고 했다.
10년 넘게 여의도 금융권에서 애널리스트, 펀드매니저로 활약하다 39세에 알펜루트자산운용을 창업한 김 대표는 10년 만에 다시 고위드를 통해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었다.
그는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인생인데 무슨 역사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뜻도 없지만, 또 내일 죽을지도 모르니깐 그냥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시기가 자연스럽게 찾아왔다"고 말했다.
전통 금융권과 벤처시장, 스타트업을 두루 경험하면서 세상이 좀 더 좋게 변화하려면 돈이 올바른 곳에 가야 한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는 "기존 은행이 못 한다면 어디든 혁신의 단초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허란 기자 wh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