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의 '똑똑한 조수'가 된 AI … ‘3人 3色’ 한국 작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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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상우, 멸종위기종 그래픽 작품 선봬
두민, AI와 인간의 협력 가능성 모색해
이규원, 첨단기술 속 예술가 역할 찾아
두민, AI와 인간의 협력 가능성 모색해
이규원, 첨단기술 속 예술가 역할 찾아
국내 미술계에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해 작품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이 작가들이 AI를 활용하게 된 동기는 다양하지만, 신기술과 예술의 관계에 대한 탐구정신이 작업의 원동력이라는 점은 매한가지다.
작품 유형도 한정판 특수 프린트, 극사실화, 네오팝 등으로 다양하다. 신기술에 대한 작가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새로운 미술 사조를 만들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고상우 작가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로 동물 극사실화를 그리는 그래픽 회화 작가다. 멸종위기 동물의 초상을 제너레이터로 만든 뒤 이를 응용하고 재해석해 그래픽으로 그리는 게 그의 작업 과정이다. 그는 작품을 프린트했을 때 한 변이 5m가 넘도록 크게 뽑아도 깨지지 않게 이미지의 해상도를 높인다. 한 작품을 만드는데 2~3개월이 걸릴 정도로 고된 작업이지만, 이렇게 하면 작품이 매우 생생한 느낌을 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평가를 듣는다. 작품이 완성되면 한정판 특수 프린트를 해 컬렉터에게 선보인다.
고 작가는 "AI를 활용해 작업의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직접 동물 사진을 찍으러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제너레이터를 활용함으로써 발품을 팔지 않고도 고품질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물의 퀄리티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는 피사체의 모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지만, 제너레이터로 이미지를 만들 때는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어 원하는 이미지의 작품을 만들기가 더 용이해졌다"고 했다.
국내에서 고 작가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지난 3월 국내 경매에서 천만원대에 낙찰됐다. 한정판 프린트가 이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작가는 흔치 않다. 지난해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신년 인사를 할 때 고 작가의 작품이 연단 뒤에 걸렸다. 그는 오는 9월 김천시립박물관에서 반달곰 보호를 위한 캠페인성 전시를 한다.
고 작가는 "예술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믿어왔는데 이제 이 믿음에도 균열이 가고 있다"며 "AI를 어시스턴트(조수) 삼아 이 물결을 타고 질주하겠다"고 했다.
두민 작가의 작품은 AI와 인간의 협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는 제너레이터가 만든 이미지를 특수 프린트로 뽑고, 자신이 붓과 물감으로 그 위에 리터치한 작품을 선보인다. AI가 그린 그림 위에 인간의 손길을 덧입히는 것이다. 사람이 반쪽을 그리고, AI가 나머지 반쪽을 그려 둘을 하나로 합칠 때도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AI와 인간의 협력, 나아가 공존의 가능성을 미학적·개념적으로 탐구하는 게 두민 작가 작업의 목표다.
두민 작가는 기업과 협력하는 AI 프로젝트를 많이 했다. 2019년 발표한 국내 첫 AI 작품은 이 분야 전문기업 펄스나인이 제공한 제너레이터를 활용해 제작했다. 지난해 8월에는 방위산업체 한화시스템과 협력해 AI 작품을 만들었고, 카카오의 제너레이터 '칼로'를 활용해 만든 작품을 카카오 판교아지트 1층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적극적인 활동에 덕에 두민 작가의 AI 작품에 대한 인지도가 최근 국내에서 많이 높아졌다. 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도 그의 작품을 찾고 있다. 올 초 그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 AI 작품을 전시했고, 오는 10월에는 수원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에 작품을 낸다. 지금까지 미술가들이 발표한 AI 작품은 대부분 그림이었지만, 그는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에서 영상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두민 작가는 "AI와의 협력은 예술가에게 새로운 영감의 기회를 주고, 예술가가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며 "AI에 대한 예술가들의 호기심이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이 작가의 작업도 제너레이터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게 첫 단추다. 독특한 건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이 작가가 붓과 물감으로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픽이 이 작가 손을 거쳐 캔버스에서 아날로그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 작가가 전 과정을 디지털로 작업하고 두민 작가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 작업을 한다면, 이 작가의 작업은 시작이 디지털이었을 뿐 마지막은 가장 아날로그에 가깝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 작가가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미술가의 지위를 격하시킨 듯한 이 작업이 역설적으로 "AI 시대에 미술가가 해야하는 역할이 뭔지 깨닫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너레이터가 만든 이미지는 디지털 세계에서 창조된 만큼 끝까지 디지털 세계에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걸 구태여 사람의 손으로 아날로그로 만듦으로써 손 작업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고 그 가치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미래에 제너레이터 활용이 보편화돼 사람들이 '인간 미술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AI를 피하고 외면할 생각은 없다"며 "그 시대에 미술이 뭘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건 미술가에게 던져진 사회적 책무"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
작품 유형도 한정판 특수 프린트, 극사실화, 네오팝 등으로 다양하다. 신기술에 대한 작가들의 적극적인 관심이 새로운 미술 사조를 만들고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AI로 동물 극사실화 그리는 고상우
최근 AI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AI 이미지 제너레이터'(이하 제너레이터)를 활용하는 게 보통이다. 제너레이터는 문자로 요구 사항을 입력하면 제너레이터가 딥러닝한 내용을 바탕으로 그에 맞는 이미지를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다. '부자가 된 호랑이를 그려줘'처럼 은유적 요구를 입력할 수도 있고, 작가의 평소 작품 스타일을 학습해 그에 맞는 새 이미지를 만들어 주는 제너레이터도 있다.고상우 작가는 포토샵이나 일러스트레이터로 동물 극사실화를 그리는 그래픽 회화 작가다. 멸종위기 동물의 초상을 제너레이터로 만든 뒤 이를 응용하고 재해석해 그래픽으로 그리는 게 그의 작업 과정이다. 그는 작품을 프린트했을 때 한 변이 5m가 넘도록 크게 뽑아도 깨지지 않게 이미지의 해상도를 높인다. 한 작품을 만드는데 2~3개월이 걸릴 정도로 고된 작업이지만, 이렇게 하면 작품이 매우 생생한 느낌을 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평가를 듣는다. 작품이 완성되면 한정판 특수 프린트를 해 컬렉터에게 선보인다.
고 작가는 "AI를 활용해 작업의 효율성을 크게 높일 수 있다"고 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그는 직접 동물 사진을 찍으러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제너레이터를 활용함으로써 발품을 팔지 않고도 고품질의 이미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물의 퀄리티에 대한 만족도도 높다. 그는 "사진을 찍을 때는 피사체의 모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었지만, 제너레이터로 이미지를 만들 때는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어 원하는 이미지의 작품을 만들기가 더 용이해졌다"고 했다.
국내에서 고 작가의 명성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지난 3월 국내 경매에서 천만원대에 낙찰됐다. 한정판 프린트가 이정도로 높은 가격에 거래되는 작가는 흔치 않다. 지난해에는 문재인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신년 인사를 할 때 고 작가의 작품이 연단 뒤에 걸렸다. 그는 오는 9월 김천시립박물관에서 반달곰 보호를 위한 캠페인성 전시를 한다.
고 작가는 "예술은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라고 믿어왔는데 이제 이 믿음에도 균열이 가고 있다"며 "AI를 어시스턴트(조수) 삼아 이 물결을 타고 질주하겠다"고 했다.
AI와 인간의 '공존' 탐구하는 두민
고 작가의 작품 제작이 전 과정 디지털이라면, 두민 작가의 작품에는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모두 있다. 그는 미술계의 얼리 어답터(새 기술을 남들보다 먼저 경험하는 사람)로 잘 알려져 있다. 2019년 국내 미술가 최초로 AI 활용 작품을 선보인 것도 두민 작가다.두민 작가의 작품은 AI와 인간의 협력으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는 제너레이터가 만든 이미지를 특수 프린트로 뽑고, 자신이 붓과 물감으로 그 위에 리터치한 작품을 선보인다. AI가 그린 그림 위에 인간의 손길을 덧입히는 것이다. 사람이 반쪽을 그리고, AI가 나머지 반쪽을 그려 둘을 하나로 합칠 때도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AI와 인간의 협력, 나아가 공존의 가능성을 미학적·개념적으로 탐구하는 게 두민 작가 작업의 목표다.
두민 작가는 기업과 협력하는 AI 프로젝트를 많이 했다. 2019년 발표한 국내 첫 AI 작품은 이 분야 전문기업 펄스나인이 제공한 제너레이터를 활용해 제작했다. 지난해 8월에는 방위산업체 한화시스템과 협력해 AI 작품을 만들었고, 카카오의 제너레이터 '칼로'를 활용해 만든 작품을 카카오 판교아지트 1층에서 전시하기도 했다.
적극적인 활동에 덕에 두민 작가의 AI 작품에 대한 인지도가 최근 국내에서 많이 높아졌다. 기업뿐만 아니라 공공기관도 그의 작품을 찾고 있다. 올 초 그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 AI 작품을 전시했고, 오는 10월에는 수원문화재단이 주최하는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에 작품을 낸다. 지금까지 미술가들이 발표한 AI 작품은 대부분 그림이었지만, 그는 수원화성 미디어아트쇼에서 영상 작품을 선보일 계획이다.
두민 작가는 "AI와의 협력은 예술가에게 새로운 영감의 기회를 주고, 예술가가 창의적인 작업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며 "AI에 대한 예술가들의 호기심이 미술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했다.
AI 시대 미술의 역할 찾는 이규원
팟캐스트 매불쇼를 통해 '홍대 이작가'로 잘 알려진 이규원 작가도 올 초부터 AI 활용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연상시키는 네오팝 스타일의 AI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작가가 AI를 활용하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가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른 작가들은 사람이 AI를 활용하는 게 명확하지만, 이 작가의 작품에서는 반대로 AI가 인간을 활용하고 있다고 봐도 될 정도다.이 작가의 작업도 제너레이터가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게 첫 단추다. 독특한 건 이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를 이 작가가 붓과 물감으로 그대로 따라 그린다는 것이다. 그래픽이 이 작가 손을 거쳐 캔버스에서 아날로그로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 작가가 전 과정을 디지털로 작업하고 두민 작가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 작업을 한다면, 이 작가의 작업은 시작이 디지털이었을 뿐 마지막은 가장 아날로그에 가깝다는 것도 특징이다.
이 작가가 이런 작업을 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미술가의 지위를 격하시킨 듯한 이 작업이 역설적으로 "AI 시대에 미술가가 해야하는 역할이 뭔지 깨닫는 단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제너레이터가 만든 이미지는 디지털 세계에서 창조된 만큼 끝까지 디지털 세계에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걸 구태여 사람의 손으로 아날로그로 만듦으로써 손 작업의 의미에 대해 사유하고 그 가치를 탐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작가는 "미래에 제너레이터 활용이 보편화돼 사람들이 '인간 미술가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날이 온다고 해도 AI를 피하고 외면할 생각은 없다"며 "그 시대에 미술이 뭘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하는 건 미술가에게 던져진 사회적 책무"라고 말했다.
양병훈 기자 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