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해외서 '미래' 봤다…亞 대표 자본시장 혁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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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비웃을 때 “미래에셋을 수출기업으로 만들자”
20년 뒤 국내외 41개 법인 … 해외직원 400배로 늘어
운용자산 해외비중 44% … 글로벌IB 도약 ‘8할’ 달성
뮤추얼 펀드·PEF·랩어카운트 韓 ‘1호 상품’ 제조기
승부사 DNA … 다크호스로 나서 대우증권 인수 쾌거
지난해 기준 미래에셋그룹의 해외법인 세전이익은 약 4468억원으로 전체 이익 1조9653억원의 22.7%에 달한다. 작년 말 기준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총운용액 277조원 중 해외 비중은 112조원(40.4%)이다. 아시아 1위 금융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박 회장의 목표도 목전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선진국 금융회사들이 득세하는 자본시장에서 창업을 통해 세계무대 반열에 오른 아시아권 회사는 미래에셋그룹이 유일하다.
박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금융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다. 본인 스스로도 ‘기업가정신’과 ‘창조적 혁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해외 진출을 고민하던 시기에도 내부에선 “국내에서 우선 입지를 다지자”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박 회장은 가방 하나 메고 홍콩과 미국을 들락날락했다. 당시 미래에셋은 이미 국내 1위 자산운용사그룹이었지만 단 한 명의 직원도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만 했다. 그래서 회장임에도 스스로 국제부 팀장을 자처했다.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처음으로 홍콩에 갈 때는 해외 진출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출장을 갔다. 홍콩 금융가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에 가까웠다.”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104페이지) 해외 시장 개척뿐만 아니다. 뮤추얼펀드, 인덱스펀드, 랩어카운트, 사모펀드(PEF) 등 국내 자본시장 대표 상품 ‘1호’는 대개 미래에셋 몫이다. 회사 내부에서 박 회장의 경영철학을 꿰뚫는 핵심 가치가 ‘도전과 성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박 회장은 “어떤 사람이 직장생활을 시작해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한 것을 두고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거기서 실적을 내 고객에게 도움이 됐을 때라야 비로소 건강한 성장”이라고 강조한다.
해외에서 미래에셋이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2003년 12월 홍콩법인에 사무소를 낼 당시 직원 수는 8명 남짓. 20년이 흐른 현재 미래에셋은 국내외 17개 지역에 41개 법인(사무소 포함)을 둔 글로벌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지난 5월말 기준 해외에 고용된 임직원수는 3291명으로 약 20년만에 400배 이상 불어났다. 전체 미래에셋그룹 임직원(1만2587명)의 26%에 달한다.
2015년 12월 대우증권 인수전이 대표적이다. 당시 입찰 조건은 한번 제시한 인수 가격과 조건을 변경할 수 없는 ‘단판 승부’였다. KB금융지주,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3곳이 경쟁을 벌였다. 금융권은 KB금융과 한국투자증권의 2파전 구도를 예상했다. 윤종규 회장이 이끄는 KB금융은 자금 조달 능력이 가장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남구 회장의 한국투자증권은 사업적 측면에서 M&A 시너지 효과가 가장 크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미래에셋그룹은 ‘다크호스’로 분류됐는데, 일각에선 “M&A 흥행을 위해 구색을 갖춘 후보”라는 얘기도 파다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왔다. 2조4000억원대를 쓴 미래에셋그룹의 입찰가격이 2위인 한국투자금융보다 1000억원 이상 높았다.
“경쟁사들은 당시 패키지로 묶인 대우증권과 산은자산운용의 장부가(1조8400억원)에서 매각가격을 조금씩 높였습니다. 우리는 달랐어요. 미래에셋이 최대한 쓸 수 있는 가격을 3조원으로 두고, 점차적으로 입찰가를 내렸습니다. 당시 외부에선 비싸게 산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5000억원 이상을 아낀 셈이죠.”
박 회장은 21일 낮12시에 입찰이 마감되자 KB금융과 한국금융지주 측에 전화를 걸어 입찰가를 확인하고 승리를 확신했다. 점심 무렵 시작된 ‘축하’ 술자리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질 정도로 박 회장의 기쁨은 컸다. 당시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 회장은 “대우증권이라는 회사를 산 게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을 통째로 산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동안 IB(투자은행) 같은 사업을 제대로 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며 “진정한 창조자본, 모범자본의 진수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박 회장이 패기에 찬 부하 직원들을 볼 때 종종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동원증권 차장 시절인 서른다섯 무렵의 일이다. 서른두 살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을 맡아 1위 점포를 만들자 스카우트 제안이 말 그대로 쏟아졌다고 한다. 한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했을 땐 박 회장도 많이 흔들렸다고 한다. 강남의 50평대 아파트가 2억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외국 유학비용을 전액 대주고 이사 자리를 준다는 제안도 받았다. 박 회장은 이런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박 회장은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아직 내공이 쌓이지 않았고 더 정진할 필요를 느꼈다”며 “그때 내가 만약 자리에 얽매여 회사를 옮겼다면 오늘날의 미래에셋은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박 회장의 투자 철학은 세 가지다. 첫째, 모르는 일에 투자하지 않고 둘째,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한다는 원칙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첫째와 둘째 원칙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다. 박 회장은 내부 회의를 할 때도 본인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의견을 내지 않는다. 이런 경우 보통 임직원 얘기를 따른다. 여러 차례 은행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도하지 않은 것도 모르는 업종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투자 원칙 때문이다.
박 회장이 가장 우선하는 경영 원칙은 고객과 신뢰다. 창업 직후인 1998년 출시한 폐쇄형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의 성공이 ‘고객 신뢰’의 중요성을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업계에선 박현주 1호의 성공을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많았다. 만기가 정해져 있는 신생 운용사 상품에 누가 투자하겠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이 나오자 고객들의 반응이 말 그대로 뜨거웠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번지르르한 금융상품에 실망한 고객들이 ‘진짜 전문가’들이 운용하는 펀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투명성에 대한 박 회장의 원칙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완고하다. 창업 이후 권부를 장악한 정권의 실력자들이 직·간접적으로 박 회장과 사업 관계 이상의 친분을 맺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 회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박 회장을 오랫동안 알아온 대통령실의 한 고위 관료는 “돈 냄새가 살짝살짝 나는데, 신기하게 권력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고 미래에셋그룹을 평가했다. 박 회장의 소신은 이렇다. “고객의 돈을 맡아 자산운용업을 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 미래에셋을 성장시켜주는 존재는 고객뿐이고 미래에셋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도 고객이다.”
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할 땐 지점장을 10명 선발한 후 이들 지점장에게 같이 일할 사람을 뽑을 권한을 줬다. 전쟁에 비유하면 장수를 먼저 뽑은 뒤 그 장수에게 부하들을 선발하게 한 것이다. 동원증권 강남본부장 시절 6명의 지점장을 배출한 일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로 꼽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젊고 패기있는 지점장들을 선발한 후 권한을 대폭 위임했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당시 지점장이 된 사람들이 창업 당시 합류한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과 구재상 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이다. 박 회장은 과거 몽골제국이 150년 동안 대제국을 유지한 역사에서 이런 조직 관리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인재를 믿고 일에 대한 권한을 주면 자연스럽게 조직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 철학은 “열린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인재를 중시하자”는 미래에셋의 경영이념에도 잘 녹아 있다.
박 회장 본인은 소탈하다. 그룹 회장으로 일할 당시 “비서실장을 두라”는 조언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대로 흘려들었다. 비서실장을 두게 되면 부하직원과의 소통이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GSO로 물러난 후엔 별도의 비서도 두지 않는다. 최현만 회장의 비서가 박 회장의 일정을 함께 관리한다.
박 회장의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의 맺음말이다.
좌동욱/최만수 기자 leftking@hankyung.com
20년 뒤 국내외 41개 법인 … 해외직원 400배로 늘어
운용자산 해외비중 44% … 글로벌IB 도약 ‘8할’ 달성
뮤추얼 펀드·PEF·랩어카운트 韓 ‘1호 상품’ 제조기
승부사 DNA … 다크호스로 나서 대우증권 인수 쾌거
2001년 3월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미국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랐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AMP) 수학을 위한 유학길이었다. 그의 나이 44세 때였고, 회사 창업은 5년차에 접어들던 시기. 닷컴 버블이 붕괴하던 때이기도 했다. 유학길에 오른 박 회장을 놓고 “도피성 유학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상당했지만, 그는 비행기에서 “한국 금융이 성공하려면 해외로 뻗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가졌다.2년간의 유학 기간동안 그는 “미래에셋을 수출기업으로 만들겠다”는 경영 목표를 확신하게 됐다. 유학을 끝내고 돌아온 이듬해인 2003년 12월 홍콩에 미래에셋의 첫 해외 법인을 설립한 이유다. 당시 박 회장은 “앞으로 미래에셋그룹 수익의 50%를 해외에서 가져오겠다”는 포부를 공개했지만, 임직원 반응은 시큰둥했다. 회사 내부에선 “국내 1위 자산운용사 자리만 지켜도 충분하다”는 의견이, 외부에선 “해외 비즈니스를 하겠다던 시중은행이 무더기로 문을 닫았다”는 비아냥이 나왔다. 박 회장은 “현실에 머무르면 미래는 없다”며 임직원을 다독였다. 첫 해외 진출 이후 20년이 흘렀다. 당시 박 회장이 내걸었던 경영 목표의 8할정도는 달성됐다.
지난해 기준 미래에셋그룹의 해외법인 세전이익은 약 4468억원으로 전체 이익 1조9653억원의 22.7%에 달한다. 작년 말 기준 미래에셋자산운용의 총운용액 277조원 중 해외 비중은 112조원(40.4%)이다. 아시아 1위 금융그룹으로 도약하겠다는 박 회장의 목표도 목전이다.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선진국 금융회사들이 득세하는 자본시장에서 창업을 통해 세계무대 반열에 오른 아시아권 회사는 미래에셋그룹이 유일하다.
44세 유학길…‘우물안’ 한국자본시장 탈출
“한국을 대표하는 자본시장의 혁신가”박 회장을 오랫동안 지켜봐 온 금융인들의 공통적인 평가다. 본인 스스로도 ‘기업가정신’과 ‘창조적 혁신’이라는 단어를 입에 달고 산다. 해외 진출을 고민하던 시기에도 내부에선 “국내에서 우선 입지를 다지자”고 반대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박 회장은 가방 하나 메고 홍콩과 미국을 들락날락했다. 당시 미래에셋은 이미 국내 1위 자산운용사그룹이었지만 단 한 명의 직원도 함께하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가야만 했다. 그래서 회장임에도 스스로 국제부 팀장을 자처했다. 아시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처음으로 홍콩에 갈 때는 해외 진출을 준비한다는 얘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출장을 갔다. 홍콩 금융가의 반응은 거의 무관심에 가까웠다.”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 104페이지) 해외 시장 개척뿐만 아니다. 뮤추얼펀드, 인덱스펀드, 랩어카운트, 사모펀드(PEF) 등 국내 자본시장 대표 상품 ‘1호’는 대개 미래에셋 몫이다. 회사 내부에서 박 회장의 경영철학을 꿰뚫는 핵심 가치가 ‘도전과 성장’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박 회장은 “어떤 사람이 직장생활을 시작해 연공서열에 따라 승진한 것을 두고 그 사람이 성장했다고 볼 수는 없다”며 “새로운 시장을 만들고 거기서 실적을 내 고객에게 도움이 됐을 때라야 비로소 건강한 성장”이라고 강조한다.
펀드 운용 손실이 되레 약…해외로 눈돌려
해외 진출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펀드 투자 실패였다. 1997년 창업과 동시에 출시한 뮤추얼 펀드 ‘박현주 1호’는 말 그대로 ‘대박’이 났지만 1999년 ‘박현주 성장형 2호’는 닷컴 버블이 붕괴되면서 고객들에게 상당한 손실을 안겼다. 박 회장은 “펀드를 청산하는 날 폭음하면서 통곡했다”고 당시를 기억한다. 그러면서도 “자산 분산의 중요성을 다시 점검해보는 계기가 됐다”고 복기한다. 국내 증시의 위험이 곧바로 고객에게 100퍼센트 전가되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선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결론을 얻은 것이다.해외에서 미래에셋이 거둔 성과는 눈부시다. 2003년 12월 홍콩법인에 사무소를 낼 당시 직원 수는 8명 남짓. 20년이 흐른 현재 미래에셋은 국내외 17개 지역에 41개 법인(사무소 포함)을 둔 글로벌 금융그룹으로 성장했다. 지난 5월말 기준 해외에 고용된 임직원수는 3291명으로 약 20년만에 400배 이상 불어났다. 전체 미래에셋그룹 임직원(1만2587명)의 26%에 달한다.
금융그룹을 키워낸 승부사 자질
박 회장과 오랜 기간 일해 온 임원들은 미래에셋을 세계적인 금융그룹으로 키워낸 동력이 박 회장의 ‘결단력과 통찰력’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 회사의 결정적인 고비마다 ‘승부사’로서 박 회장의 자질은 빛났다.2015년 12월 대우증권 인수전이 대표적이다. 당시 입찰 조건은 한번 제시한 인수 가격과 조건을 변경할 수 없는 ‘단판 승부’였다. KB금융지주, 한국투자증권, 미래에셋증권 등 3곳이 경쟁을 벌였다. 금융권은 KB금융과 한국투자증권의 2파전 구도를 예상했다. 윤종규 회장이 이끄는 KB금융은 자금 조달 능력이 가장 탄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남구 회장의 한국투자증권은 사업적 측면에서 M&A 시너지 효과가 가장 크다는 분석이 우세했다. 미래에셋그룹은 ‘다크호스’로 분류됐는데, 일각에선 “M&A 흥행을 위해 구색을 갖춘 후보”라는 얘기도 파다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예상을 뒤엎는 결과가 나왔다. 2조4000억원대를 쓴 미래에셋그룹의 입찰가격이 2위인 한국투자금융보다 1000억원 이상 높았다.
“경쟁사들은 당시 패키지로 묶인 대우증권과 산은자산운용의 장부가(1조8400억원)에서 매각가격을 조금씩 높였습니다. 우리는 달랐어요. 미래에셋이 최대한 쓸 수 있는 가격을 3조원으로 두고, 점차적으로 입찰가를 내렸습니다. 당시 외부에선 비싸게 산 것 아니냐는 지적이 있었지만,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5000억원 이상을 아낀 셈이죠.”
박 회장은 21일 낮12시에 입찰이 마감되자 KB금융과 한국금융지주 측에 전화를 걸어 입찰가를 확인하고 승리를 확신했다. 점심 무렵 시작된 ‘축하’ 술자리가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질 정도로 박 회장의 기쁨은 컸다. 당시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박 회장은 “대우증권이라는 회사를 산 게 아니라 한국 자본시장을 통째로 산 것”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그동안 IB(투자은행) 같은 사업을 제대로 하고 싶어 몸살이 났다”며 “진정한 창조자본, 모범자본의 진수를 보여주겠다”고 다짐했다.
32세 최연소 증권 지점장…단숨에 전국 1위로
박 회장은 1958년 광주에서 자수성가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합격자 발표하는 날 돌아가셨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어머니가 “인생의 스승이자 최고의 조언자”가 됐다. 대학교 2학년 때 ‘자본시장의 발전 없이 자본주의는 발전할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증권시장에 관심을 가졌다. 장이 끝난 후 고스톱을 치던 일이 다반사였던 증권업 현실을 보고선 회사에 입사하기도 전에 증권 자문회사(내외증권연구소)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나이 27세 때 일이다. 박 회장은 젊은이들을 만나면 “인생에서 돈이나 자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꿈”이라고 종종 말한다. 첫 직장을 증권사로 택한 이유도 미래에 자산운용업을 하고 싶다는 꿈과 열정 때문이다. 돈을 좇지 말고 일을 좇으라는 당부도 빠지지 않는다. 성취감을 좇으면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는 것이다.박 회장이 패기에 찬 부하 직원들을 볼 때 종종 들려주는 일화가 있다. 동원증권 차장 시절인 서른다섯 무렵의 일이다. 서른두 살에 전국 최연소 지점장을 맡아 1위 점포를 만들자 스카우트 제안이 말 그대로 쏟아졌다고 한다. 한 외국계 증권사에서 연봉 10억원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안했을 땐 박 회장도 많이 흔들렸다고 한다. 강남의 50평대 아파트가 2억원에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외국 유학비용을 전액 대주고 이사 자리를 준다는 제안도 받았다. 박 회장은 이런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박 회장은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때 아직 내공이 쌓이지 않았고 더 정진할 필요를 느꼈다”며 “그때 내가 만약 자리에 얽매여 회사를 옮겼다면 오늘날의 미래에셋은 없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자본시장의 꽃은 자산운용
박 회장은 ‘자본시장의 꽃’을 자산운용업으로 여긴다. 창업 이전 당시 이미 국내 최고의 펀드매니저로 통했다. 미래에셋그룹의 모태도 자산운용업이다. 박 회장은 “미래에셋을 설립한 것도 자산운용업을 하기 위해서였고, 증권사를 설립하고 생보사를 인수한 것도 자산운용업이라는 맥락에서 이뤄진 일”이라고 설명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증권사 영업은 수수료 수입에 기반한 브로커리지(중개업)였는데, 증권사 간 경쟁이 과열되면 수수료가 낮아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박 회장의 투자 철학은 세 가지다. 첫째, 모르는 일에 투자하지 않고 둘째, 장기적 관점에서 투자한다는 원칙이다. 마지막 세 번째 원칙은 어떤 일이 있어도 첫째와 둘째 원칙을 반드시 지키는 것이다. 박 회장은 내부 회의를 할 때도 본인이 모르는 이야기가 나오면 의견을 내지 않는다. 이런 경우 보통 임직원 얘기를 따른다. 여러 차례 은행을 인수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도하지 않은 것도 모르는 업종엔 투자하지 않는다는 투자 원칙 때문이다.
박 회장이 가장 우선하는 경영 원칙은 고객과 신뢰다. 창업 직후인 1998년 출시한 폐쇄형 뮤추얼펀드 ‘박현주 1호’의 성공이 ‘고객 신뢰’의 중요성을 깨닫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당시 업계에선 박현주 1호의 성공을 반신반의하는 시각이 많았다. 만기가 정해져 있는 신생 운용사 상품에 누가 투자하겠냐는 의구심 때문이다. 하지만 상품이 나오자 고객들의 반응이 말 그대로 뜨거웠다. 19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번지르르한 금융상품에 실망한 고객들이 ‘진짜 전문가’들이 운용하는 펀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투명성에 대한 박 회장의 원칙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완고하다. 창업 이후 권부를 장악한 정권의 실력자들이 직·간접적으로 박 회장과 사업 관계 이상의 친분을 맺으려 했지만 그때마다 박 회장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박 회장을 오랫동안 알아온 대통령실의 한 고위 관료는 “돈 냄새가 살짝살짝 나는데, 신기하게 권력과는 일정하게 거리를 둔다”고 미래에셋그룹을 평가했다. 박 회장의 소신은 이렇다. “고객의 돈을 맡아 자산운용업을 하는 사람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 미래에셋을 성장시켜주는 존재는 고객뿐이고 미래에셋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도 고객이다.”
몽골제국 조직관리서 아이디어…단단해진 용병술
경영자로서 박 회장의 뛰어난 장점 중 하나는 조직 관리 능력이다. 박 회장은 “사람을 쓰면 믿는다”는 경영 원칙이 철저하다. 미래에셋그룹엔 박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 자체가 없다. 2018년 그룹 회장에서 물러나 글로벌전략가(GSO) 직위를 가진 후부턴 자산운용 관련 사업 중에서도 해외 사업 부분에만 관여한다. 박 회장을 만난 사업 파트너들이 “사석에서 미래에셋증권, 미래에셋생명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업 얘기를 하면 회사 사정을 너무 몰라서 놀랐던 적이 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미래에셋증권을 설립할 땐 지점장을 10명 선발한 후 이들 지점장에게 같이 일할 사람을 뽑을 권한을 줬다. 전쟁에 비유하면 장수를 먼저 뽑은 뒤 그 장수에게 부하들을 선발하게 한 것이다. 동원증권 강남본부장 시절 6명의 지점장을 배출한 일을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일로 꼽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젊고 패기있는 지점장들을 선발한 후 권한을 대폭 위임했더니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얻어냈다는 것이다. 당시 지점장이 된 사람들이 창업 당시 합류한 최현만 미래에셋증권 회장과 구재상 전 미래에셋자산운용 부회장이다. 박 회장은 과거 몽골제국이 150년 동안 대제국을 유지한 역사에서 이런 조직 관리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인재를 믿고 일에 대한 권한을 주면 자연스럽게 조직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 철학은 “열린 마음으로 미래를 내다보고 인재를 중시하자”는 미래에셋의 경영이념에도 잘 녹아 있다.
박 회장 본인은 소탈하다. 그룹 회장으로 일할 당시 “비서실장을 두라”는 조언을 여러 차례 들었지만 그대로 흘려들었다. 비서실장을 두게 되면 부하직원과의 소통이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GSO로 물러난 후엔 별도의 비서도 두지 않는다. 최현만 회장의 비서가 박 회장의 일정을 함께 관리한다.
20년 전 박현주 재단 만들어…기부문화의 선구자
대신 사회적 책임엔 투철하다. 창업 4년차인 2000년 3월 75억원을 들여 박현주 재단을 설립했다. 당시 회사 자기자본(300억원)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2013년부터는 배당으로 받는 돈을 전액 박현주 재단에 기부하고 있다. 2023년까지 기부한 배당금이 총 298억원에 달한다. 회삿돈이 아닌 개인돈을 기부할 수 있어야 기업가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게 박 회장의 철학이다. 박현주 재단이 가장 중점을 두는 사업은 대학생의 해외 수학 경험을 지원하는 일이다. “한국의 미래는 젊은 인재에게 달려 있다. 젊은 인재들이 꿈을 꾸며 열정을 갖고 도전할 때 한국 사회의 미래는 밝게 열릴 것이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의 젊은 인재들이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 작은 도움을 준 인생의 선배로 기억되고 싶다. 그것이 나의 바람이자 꿈이다.”박 회장의 저서 <돈은 아름다운 꽃이다>의 맺음말이다.
좌동욱/최만수 기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