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과 감탄 사이 - 그들의 숙제, 우리의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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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임선혜의 아리아
바리톤 김태한, 사진출처=퀸엘리자베스 콩쿠르 홈페이지 캡쳐
2000년, 이 콩쿠르에 참가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카운터 테너 이동규와 함께 동양인이 두 명이나 결선에 올랐다고 현지에서도 주목과 좋은 평을 받았지만 아쉽게 입상은 불발되어 여러모로 아쉬움이 컸다. 돌아보니 이 콩쿠르에서 한국인 입상자가 나오기까지 그로부터도 11년이나 걸렸다.
이번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결선 진출이 안 됐던 테너 김성호는 몇 주 후 영국 ‘BBC 카디프 싱어 오브 더 월드’ 가곡부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아쉬움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김성호는 이미 유럽의 규모있는 콩쿠르들에서 우승해 실력을 입증하고 독일의 오페라극장 전속으로 활동 중인 가수다. ‘이제 콩쿠르는 한국인들끼리의 경쟁’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테너 김성호
이제 세계의 크고 작은 국제 음악 콩쿠르에서 전해지는 한국인의 우승 및 입상 소식은 한 해에도 수십건에 달한다. 역사가 깊고 상금과 특전이 많은 콩쿠르가 아닌 그 외 콩쿠르에서의 우승 소식들은 큰 주목이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허다해졌다. 이쯤되니 해외의 음악계가 대한민국의 음악가들에게 호의적이 된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든다. 세계 무대에서 이름을 얻은 음악가들의 인터뷰에 늘 등장했던 역경 극복 스토리도 이제 옛날 이야기가 된 것인가 싶다. 격세지감이다.
지금까지 그 ‘역경들’이란 애뜻한 향수병과 더불어 서양음악의 본고장에서 한국인, 동양인으로서 겪었던 차별과 편견에 대한 서러움의 에피소드들이었다. ‘추천하시니 노래는 들어보겠지만 한국 성악가들이 일을 찾기 어렵다는 것은 당신도 잘 알지 않습니까?’ 독일 스승이 제법 좋은 에이전시에 나를 추천하는 편지를 썼다가 받은 답장이었다. 그 때도 노래 잘하는 유학생이 많았지만 그들의 편견 또한 컸다. 독일의 오페라극장에서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하는 한국인 성악가가 손에 꼽히던 시절이었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들에게 괜히 기가 죽고 자존심도 상하는데 그것도 모자라 콩쿠르 순위에서 밀렸고, 스폰서가 없다거나 그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계약이 파기되었다는 이야기. 내내 들어온 비슷한 경험들이 내가 데뷔한 후에도 한참 동안 이어졌으니 불과 10여 년 전까지의 일이다.
많은 것이 변한 지금 후배 음악가들의 향후 역경 극복 스토리는 어떻게 달라질지 문득 궁금하다. 물론 우리가 ‘서양음악’을 하는 이상 ‘편견’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힘들 것이다. 또 타지에서도 한국 문물을 충분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해도 물리적 거리와 낯선 정서에서 오는 향수병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더이상 극복하고 강해지기 위해 맞서야할 절대적 외부저항이 아닌 만큼 그 힘과 의지가 이제는 오롯이 ‘음악’과 ‘음악가적인 삶’에 투영되기를 바라본다. 이기기 위한 이 악묾이 아니라 음악적 호기심을 충족하는 즐거움으로 투영되었으면 하고 희망한다. 마침내 이길 차례를 넘어 즐길 차례다.
얼마전 독일의 전국 합창 경연대회에서 한국 출신의 정나래 지휘자는 자신이 맡고 있는 두 합창단을 모두 우승으로 이끌어 화제가 되었다. 더 놀랐던 것은 경연곡 중 한국말로 된 합창곡도 있었다는 것! 독일국영방송(ZDF)과의 인터뷰에서 아이들은 한국어 발음과 그 뜻을 열심히 공부했다고 말했다. 정교한 하모니는 물론 다양한 몸놀림의 극적인 퍼포먼스도 눈에 띄었다. 독일의 여느 합창단과는 차별된 무대였다. 어린시절 정나래 지휘자가 고향의 어린이 합창단에서 노래했던 경험을 적극 활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서양 음악의 본고장이자 중심에서 그 문화와 언어에 적응하는 동안 우리는 차라리 한국 사람임을 잠시 잊어야 그들의 리그에 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처럼 한국인임을 당당히 드러내고 우리의 방식을 적용하고 접목 시켜도 좋은 시대가 왔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에게 거는 기대도, 바라는 바도 달라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꿈 같은 일인가.
거의 매년 나오는 ‘최초’라는 우승 타이틀에 우리는 몹시 감탄하며 기뻐한다. 달라진 시대에 부응하여 새로운 세대가 이렇듯 신명나게 꿈을 펼치고 있는데 우리도 감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음악계에는 아직 보완해야할 시스템적인 숙제들이 남아있다. 이제 우리가 짧은 감탄으로 끝내지 않고 길게 감동 받을 준비로 그들을 맞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