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가 아끼던 86세대 간판…고난 끝에 '거야 정책사령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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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보다 먼저 국회 입성 … 정치 초년 시절 ‘꽃길’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로 18년간 정치적 빙하기
2020년 총선서 이기며 3선 … 野 복지정책 ‘진두지휘’
김 의원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주도한 586세대 가운데서도 빠르게 빛을 본 인물이다.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1985년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학생연합(전학련) 의장을 맡으며 탁월한 연설 능력과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면서도 경찰에 검거되지 않는 용의주도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그는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기획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수감 기간에 둘째 형 김민화가 사망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석방됐고, 상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나게 된다. 2년8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 1990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영입돼 정치에 입문했다.
정계 입성 후 도전한 첫 선거에서 김민석은 파란을 일으킨다. 1992년, 27세의 나이로 치른 14대 총선에서 영등포구을 선거구에서 나웅배 민주자유당 의원과 맞붙어 260표 차이로 낙선한 것이다. 정치 신인과 3선 정책위 의장의 싸움에서 20번이 넘는 역전과 재역전이 거듭됐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명승부를 펼친 김 의원은 여의도 최고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영등포구을 선거구에 재도전한 그는 31세에 당선된다. 86세대라는 신조어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뤄진 원내 입성으로, 임종석·송영길(16대 국회) 이인영·우상호(17대) 등 야권 거물들도 김 의원에 비하면 정치적 후발주자로 분류된다. 1999년에는 남성 연예인들의 전유물인 정장 광고를 정치인 중 최초로 맡기도 했다.
▶정치공학과 상식
김민석은 정치 입문 단계부터 ‘선거 전문가’로 성장했다. 1995년 1회 지방선거에서는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대변인 겸 기획단장을 맡아 ‘인지도 끌어올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초반 2%의 지지율로 출발한 조 후보는 하얀 눈썹과 한국은행 총재 시절 쌓은 강직한 이미지를 ‘판관 포청천’이라는 캐릭터로 엮어내며 대역전을 이룬다. 김 의원은 이해찬 당시 본부장과 함께 이미지 전략과 언론 대응을 총괄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의원은 풍부한 선거 경험을 기반으로 판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유권자 분석에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의원에 대한 평가를 묻는 말에 동료 의원들은 입을 모아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자신감이 넘친다”며 “천부적인 정치공학 전문가”라고 말했다. 이런 면모가 인정받으며 김 의원은 지난 대선 경선에서는 정세균 캠프의 정무조정위원장을 맡았고, 2022년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 총괄선대본부장을 지냈다.
김 의원은 정치 인생 최대 변곡점이던 2002년 대선 이후 정치공학에 대한 집착을 내려놨다고 회고한다. 유권자를 계산할 수 있는 ‘표’로 보고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면 결코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해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에 반대하며 “(민주당은) 명분과 연고를 바탕으로 유권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상식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민석의 정치 인생을 본질적으로 뒤흔들어놓은 사건이다. 2002년 10월, 대선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노무현 후보의 승리는 요원해 보였다. 주요 여론조사에서 17%대 지지율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36%)는 물론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27%)보다도 떨어지는 지지율을 보였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중도성향 후보인 정몽준과의 단일화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노 후보는 거부 의사를 고수했다.
이에 김민석은 10월 17일, "이 길이 단일화를 통해 대선 승리를 이루기 위한 마지막 대안"이라는 일성을 남긴 채 민주당을 탈당한다. 당시 김민석은 민주당 내 다른 의원과는 전혀 탈당을 논의하지 않았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기 위해 의원직을 내려놨던 탓에 언론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민석의 한 수는 결국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노무현 후보는 김민석의 탈당 후 지지율이 급등하자 단일화를 받아들였고, 김민석은 정몽준 후보 측의 협상 대표로 나서 여론조사 방식 단일화에 합의했다. 당시 노 후보 측 협상 대표였던 신계륜 의원은 “김 의원이 아니었다면 단일화 협상은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민석의 도박은 대선 전날 '독박'으로 돌아온다. 정몽준은 선거를 단 하루 남기고 노 후보 지지를 철회했다. 그럼에도 노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했고, 명분과 실익을 모두 잃은 김민석은 '김민새'라는 멸칭만 떠안은 채 기댈 곳이 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원외 18년과 극적 재기
김민석의 재선과 3선 사이에는 18년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이 기간에 그는 3번의 경선 탈락과 3번의 공직선거 낙선을 거듭한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7월에는 민주당 최고위원선거에서 '86 돌풍'을 연출하며 송영길 전 대표,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함께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적 화해에도 성공하며 다시 성공 가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
재기의 꿈은 반년을 가지 못했다. 김 최고위원은 최고위원 당선 3개월 뒤인 10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후원회장과 대학 동창 등으로부터 7억2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다. 김민석은 약 100일 만에 구속에서 풀려났지만, 대법원은 그의 혐의에 대해 2010년 8월 벌금 600만원, 추징금 7억2000만원을 선고했다. 무엇보다 피선거권이 5년 동안 박탈되면서 김 의원 자신도 추가적인 정당 활동을 포기하고, 연구 및 교육활동 쪽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된다. 정계 복귀의 계기는 2014년 찾아온다. 김민석은 원외 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하고, 2년간의 독자노선 끝에 2016년 9월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라는 명분이 작용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의지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추미애 대표는 이후 김민석에게 민주연구원장직을 맡겼다.
2018년까지 민주연구원장을 맡으며 대선과 지방선거 승리에 기여한 김민석은 2020년 총선 경선에서 자신의 초·재선 시절 지역구이던 영등포구을 선거구에 재도전해 현역 의원인 신경민을 상대로 후보직을 따낸다. 본선에서 신경민의 MBC 후배인 박용찬 국민의힘 후보를 상대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둔다.
김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통적 가신 그룹인 ‘동교동계’에 속하진 않지만, 정치권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이다.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인이라는 김민석의 이미지로 현실정치에 천착해 있다는 자신의 부정적 인상을 보완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민석은 1997년 대선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설명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TV광고에 단독 출연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민석의 정무 감각을 높게 사며 총재 비서실장을 맡겼다. 이 시기 새천년민주당 창당과 인재 영입, 공천 실무를 맡은 김민석은 이인영, 송영길 등 86세대가 여의도로 넘어오는 다리를 마련하며 '86세대의 수장'이라는 입지를 다지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민석이 14대 총선에서 300표 차이로 낙선할 당시 자신이 김 의원의 유세 현장에 지각해 찬조 연설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고, 자신의 대통령 선거 기간엔 차량 옆자리를 내줄 만큼 김민석을 아꼈다. 김민석 역시 2005년 "정치를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DJ(김대중)는 나의 지도자"라고 회고한다.
▶재야의 뒷배, 어머니와 큰형
가족도 김민석의 정치 인생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외국어학원을 운영하며 삼 형제를 키웠다. 김민석이 총학생회장 활동 중 구속되자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설립했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재야 활동을 펼쳤다.
큰형 김민웅 목사는 김민석이 고등학생이던 1982년 일찍이 미국 유학을 떠나 재야 정치 논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로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주요 스피커가 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조국백서'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 목사는 선명한 정치적 메시지로 김민석을 향한 친노무현계 야권 지지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때로는 주요 현안에 대한 강경한 발언으로 논란을 사기도 했다.
18년 만에 등원에 성공한 김민석은 21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장을 맡았다. 복지위원장은 '표 날리기 딱 좋은' 자리로 불릴 만큼 여야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다. 의료계 직능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쟁점 법안들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민석은 복지위원장 임기 중 여야 의원들의 합의를 끌어내는 면모를 여러 번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술실 CCTV법(의료법 개정안)이다. 의사단체들의 반대와 압력에도 여론조사를 통해 법안을 향한 국민적인 찬성 여론을 확인했고, 여야 합의를 종용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간호법 국면에서는 '파이터'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일부 의사단체들이 여야 의원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거나, 국회의원 지역구에서 피켓 시위를 전개하자 "정확하지 않은 피켓 내용으로 집단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내용증명을 보냈다"며 "문제 되는 부분은 민형사상 조치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민석이 복지위원장을 맡은 2년 동안 공개석상에서 언성을 높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후반기 국회에서도 복지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생 아침밥 챙기는 정책위 의장
당의 정책총괄인 정책위 의장에 취임하고 나서는 자신의 정무적 역량을 활용해 야당 정책위 의장으로선 이례적인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취임 직후인 지난 3월 대학생의 조식 비용 지원 사업인 '천원의 아침밥' 예산 증액을 정부·여당에 요구했다. 이어 민주당 소속 지자체장이 있는 광주시와 전라북도, 전라남도로부터 지자체 차원의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약속받았다.
김민석은 18년의 공백에도 '86세대의 기수'라는 타이틀과 선거 전략에 대한 전문성, 복지 정책 이해도라는 3박자를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인정받고 있다. 정책위 관계자는 "정책위 의장 취임 전부터 천원의 아침밥 정책에 관심을 갖고 준비해왔다"며 "정치경력이 풍부한 까닭에 당 소속 주요 지자체장들과 대부분 접점이 있어 소통이 수월했다"고 설명했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로 18년간 정치적 빙하기
2020년 총선서 이기며 3선 … 野 복지정책 ‘진두지휘’
15대 총선으로 처음 여의도에 입성한, 초선 당선일 기준 21대 국회 최고참 의원이다. 그의 정치 초년은 '꽃길' 그 자체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 불리며 30대 초반의 나이에 재선에 성공하고, 2002년 지방선거에서 집권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설 만큼 순항했다.차기 대권주자로 꼽힐 만큼 순항하던 김민석의 정치 인생은 2002년, 순간의 선택으로 수직 하강한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대선 후보 단일화를 촉구하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것이다. 이 한 수로 김민석은 18년의 '정치적 빙하기'에 접어든다. 거듭되는 낙선과 정계 은퇴로 잊혀졌던 김민석은 2020년, 21대 총선에서 기적적으로 여의도 복귀에 성공한다. 국회의장보다 선배인 그는 복지 분야 전문성을 기반으로 민주당 정책위 의장으로서 야당의 정책 기조를 총괄하고 있다.
김민석을 말해주는 키워드
▶86세대의 적자김 의원은 민주화 이후 한국 정치를 주도한 586세대 가운데서도 빠르게 빛을 본 인물이다.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한 그는 1985년 총학생회장에 당선돼 전국학생연합(전학련) 의장을 맡으며 탁월한 연설 능력과 대규모 시위를 주도하면서도 경찰에 검거되지 않는 용의주도함으로 이름을 날렸다.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한 그는 1985년 미국문화원 점거 농성 사건을 기획했다는 혐의로 구속됐다. 수감 기간에 둘째 형 김민화가 사망하자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석방됐고, 상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처음 만나게 된다. 2년8개월의 수감생활을 마친 후 1990년,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영입돼 정치에 입문했다.
정계 입성 후 도전한 첫 선거에서 김민석은 파란을 일으킨다. 1992년, 27세의 나이로 치른 14대 총선에서 영등포구을 선거구에서 나웅배 민주자유당 의원과 맞붙어 260표 차이로 낙선한 것이다. 정치 신인과 3선 정책위 의장의 싸움에서 20번이 넘는 역전과 재역전이 거듭됐고,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명승부를 펼친 김 의원은 여의도 최고 블루칩으로 떠올랐다. 1996년, 15대 총선에서 영등포구을 선거구에 재도전한 그는 31세에 당선된다. 86세대라는 신조어가 존재하기도 전에 이뤄진 원내 입성으로, 임종석·송영길(16대 국회) 이인영·우상호(17대) 등 야권 거물들도 김 의원에 비하면 정치적 후발주자로 분류된다. 1999년에는 남성 연예인들의 전유물인 정장 광고를 정치인 중 최초로 맡기도 했다.
▶정치공학과 상식
김민석은 정치 입문 단계부터 ‘선거 전문가’로 성장했다. 1995년 1회 지방선거에서는 조순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 대변인 겸 기획단장을 맡아 ‘인지도 끌어올리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선거 초반 2%의 지지율로 출발한 조 후보는 하얀 눈썹과 한국은행 총재 시절 쌓은 강직한 이미지를 ‘판관 포청천’이라는 캐릭터로 엮어내며 대역전을 이룬다. 김 의원은 이해찬 당시 본부장과 함께 이미지 전략과 언론 대응을 총괄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의원은 풍부한 선거 경험을 기반으로 판세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유권자 분석에 탁월한 감각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김 의원에 대한 평가를 묻는 말에 동료 의원들은 입을 모아 “상황 판단이 빠르고, 자신감이 넘친다”며 “천부적인 정치공학 전문가”라고 말했다. 이런 면모가 인정받으며 김 의원은 지난 대선 경선에서는 정세균 캠프의 정무조정위원장을 맡았고, 2022년 지방선거에서도 민주당 총괄선대본부장을 지냈다.
김 의원은 정치 인생 최대 변곡점이던 2002년 대선 이후 정치공학에 대한 집착을 내려놨다고 회고한다. 유권자를 계산할 수 있는 ‘표’로 보고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면 결코 마음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이다. 그는 지난해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의 서울시장 출마에 반대하며 “(민주당은) 명분과 연고를 바탕으로 유권자들에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상식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민석의 결정적 순간
▶2002년 단일화 요구와 탈당김민석의 정치 인생을 본질적으로 뒤흔들어놓은 사건이다. 2002년 10월, 대선을 두 달 앞둔 시점에 노무현 후보의 승리는 요원해 보였다. 주요 여론조사에서 17%대 지지율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36%)는 물론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27%)보다도 떨어지는 지지율을 보였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중도성향 후보인 정몽준과의 단일화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노 후보는 거부 의사를 고수했다.
이에 김민석은 10월 17일, "이 길이 단일화를 통해 대선 승리를 이루기 위한 마지막 대안"이라는 일성을 남긴 채 민주당을 탈당한다. 당시 김민석은 민주당 내 다른 의원과는 전혀 탈당을 논의하지 않았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서기 위해 의원직을 내려놨던 탓에 언론에서도 이런 움직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김민석의 한 수는 결국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노무현 후보는 김민석의 탈당 후 지지율이 급등하자 단일화를 받아들였고, 김민석은 정몽준 후보 측의 협상 대표로 나서 여론조사 방식 단일화에 합의했다. 당시 노 후보 측 협상 대표였던 신계륜 의원은 “김 의원이 아니었다면 단일화 협상은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김민석의 도박은 대선 전날 '독박'으로 돌아온다. 정몽준은 선거를 단 하루 남기고 노 후보 지지를 철회했다. 그럼에도 노 후보는 대선에서 승리했고, 명분과 실익을 모두 잃은 김민석은 '김민새'라는 멸칭만 떠안은 채 기댈 곳이 없는 처지가 됐다. 그는 이후 몇 년 동안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다고 회고했다. ▶원외 18년과 극적 재기
김민석의 재선과 3선 사이에는 18년의 공백기가 존재한다. 이 기간에 그는 3번의 경선 탈락과 3번의 공직선거 낙선을 거듭한다.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8년 7월에는 민주당 최고위원선거에서 '86 돌풍'을 연출하며 송영길 전 대표,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함께 최고위원에 당선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치적 화해에도 성공하며 다시 성공 가도를 걷는 것처럼 보였다.
재기의 꿈은 반년을 가지 못했다. 김 최고위원은 최고위원 당선 3개월 뒤인 10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다. 후원회장과 대학 동창 등으로부터 7억2000만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다. 김민석은 약 100일 만에 구속에서 풀려났지만, 대법원은 그의 혐의에 대해 2010년 8월 벌금 600만원, 추징금 7억2000만원을 선고했다. 무엇보다 피선거권이 5년 동안 박탈되면서 김 의원 자신도 추가적인 정당 활동을 포기하고, 연구 및 교육활동 쪽으로 활동을 전환하게 된다. 정계 복귀의 계기는 2014년 찾아온다. 김민석은 원외 정당인 민주당을 창당하고, 2년간의 독자노선 끝에 2016년 9월 더불어민주당과 합당한다.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라는 명분이 작용했고, 문재인 전 대통령의 의지도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추미애 대표는 이후 김민석에게 민주연구원장직을 맡겼다.
2018년까지 민주연구원장을 맡으며 대선과 지방선거 승리에 기여한 김민석은 2020년 총선 경선에서 자신의 초·재선 시절 지역구이던 영등포구을 선거구에 재도전해 현역 의원인 신경민을 상대로 후보직을 따낸다. 본선에서 신경민의 MBC 후배인 박용찬 국민의힘 후보를 상대로 접전 끝에 승리를 거둔다.
김민석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김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전통적 가신 그룹인 ‘동교동계’에 속하진 않지만, 정치권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김대중의 정치적 아들’이다. 참신하고 유능한 정치인이라는 김민석의 이미지로 현실정치에 천착해 있다는 자신의 부정적 인상을 보완할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민석은 1997년 대선 당시 최연소 국회의원이라는 설명과 함께 김대중 후보의 TV광고에 단독 출연하기도 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민석의 정무 감각을 높게 사며 총재 비서실장을 맡겼다. 이 시기 새천년민주당 창당과 인재 영입, 공천 실무를 맡은 김민석은 이인영, 송영길 등 86세대가 여의도로 넘어오는 다리를 마련하며 '86세대의 수장'이라는 입지를 다지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김민석이 14대 총선에서 300표 차이로 낙선할 당시 자신이 김 의원의 유세 현장에 지각해 찬조 연설을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아쉬워했고, 자신의 대통령 선거 기간엔 차량 옆자리를 내줄 만큼 김민석을 아꼈다. 김민석 역시 2005년 "정치를 처음 시작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DJ(김대중)는 나의 지도자"라고 회고한다.
▶재야의 뒷배, 어머니와 큰형
가족도 김민석의 정치 인생을 설명할 때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어머니 김춘옥 여사는 외국어학원을 운영하며 삼 형제를 키웠다. 김민석이 총학생회장 활동 중 구속되자 구속자가족협의회를 설립했고,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 의장으로 활동하는 등 활발한 재야 활동을 펼쳤다.
큰형 김민웅 목사는 김민석이 고등학생이던 1982년 일찍이 미국 유학을 떠나 재야 정치 논객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로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주요 스피커가 돼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옹호하는 '조국백서' 추진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 목사는 선명한 정치적 메시지로 김민석을 향한 친노무현계 야권 지지자들의 부정적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 도움을 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때로는 주요 현안에 대한 강경한 발언으로 논란을 사기도 했다.
김민석의 의정활동
▶CCTV법 통과의 주역18년 만에 등원에 성공한 김민석은 21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장을 맡았다. 복지위원장은 '표 날리기 딱 좋은' 자리로 불릴 만큼 여야 모두가 기피하는 자리다. 의료계 직능단체들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는 쟁점 법안들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김민석은 복지위원장 임기 중 여야 의원들의 합의를 끌어내는 면모를 여러 번 보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수술실 CCTV법(의료법 개정안)이다. 의사단체들의 반대와 압력에도 여론조사를 통해 법안을 향한 국민적인 찬성 여론을 확인했고, 여야 합의를 종용해 법안을 통과시켰다.
간호법 국면에서는 '파이터'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일부 의사단체들이 여야 의원에게 문자폭탄을 보내거나, 국회의원 지역구에서 피켓 시위를 전개하자 "정확하지 않은 피켓 내용으로 집단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 내용증명을 보냈다"며 "문제 되는 부분은 민형사상 조치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김민석이 복지위원장을 맡은 2년 동안 공개석상에서 언성을 높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후반기 국회에서도 복지위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대학생 아침밥 챙기는 정책위 의장
당의 정책총괄인 정책위 의장에 취임하고 나서는 자신의 정무적 역량을 활용해 야당 정책위 의장으로선 이례적인 존재감을 내비치고 있다. 그는 취임 직후인 지난 3월 대학생의 조식 비용 지원 사업인 '천원의 아침밥' 예산 증액을 정부·여당에 요구했다. 이어 민주당 소속 지자체장이 있는 광주시와 전라북도, 전라남도로부터 지자체 차원의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약속받았다.
김민석은 18년의 공백에도 '86세대의 기수'라는 타이틀과 선거 전략에 대한 전문성, 복지 정책 이해도라는 3박자를 기반으로 자신의 입지를 인정받고 있다. 정책위 관계자는 "정책위 의장 취임 전부터 천원의 아침밥 정책에 관심을 갖고 준비해왔다"며 "정치경력이 풍부한 까닭에 당 소속 주요 지자체장들과 대부분 접점이 있어 소통이 수월했다"고 설명했다.
전범진 기자 forwar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