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호 칼럼] 기생충, 기택의 무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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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영화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은 말한다.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노 플랜,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하지만 경험해보셨듯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IMF,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에 경험한 코로나19도 계획에 없던 일들 중 하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자원의 양은 제한적이라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적 자원을 소모하면, 다른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은 부족해진다.
코로나19와 같은 큰 스트레스가 아니더라도, 부자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된다. 한 연구에서는 자동차가 고장이 났는데 수리비가 150만 원이 나왔을 때, 이 비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때 참가자들은 자동차 수리비 지출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한 다음 유동성 지능검사를 받았다.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은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력과 판단력, 그리고 논리력과 관련된 지능이다.
결과는 당신이 예측한 대로다.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수리비에 대한 고민을 해도 지능검사 점수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수리비 걱정 후에 지능검사 점수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어떻게 구할지, 아니면 수리하지 않고 당분간 차를 그냥 운행할지 등 돈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뇌가 과부화되니까 인지기능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암울한 이야기이지만 ‘소득수준이 뇌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는 가설은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사실상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난이 뇌 기능을 떨어뜨리는 절대적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가난이 스트레스에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뇌의 특정 부위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가난을 낳고 가난으로 인한 좌절은 일상이 된다. 자기 힘으로 고통스러운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삶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저 낑낑대며 인내하고 참아야 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 비해 불공정한 상황에도 더 잘 수긍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음의 게임을 살펴보자. 한 사람에게 10만 원을 주고 그 돈을 자신과 파트너가 각각 얼마나 가질지 정해서 파트너에게 제안하게 한다. 예컨대 자신이 6만 원을 갖고 파트너에게 4만 원을 주기로 제안했는데 파트너가 수락하면 제안한 몫만큼 나눠 갖고, 만약 파트너가 거절하면 둘 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식이다. 만약 제안하는 사람이 본인이 9만 원을 갖고 파트너에게는 1만 원을 제안한다면 이는 명백히 불공정한 제안이지만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라면 파트너는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 이 게임을 진행해본 결과, 나이, 성별, 교육수준, 인종과 상관없이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불공정한 거래에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뜻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부유한 사람들은 불공정한 거래에 타격이 덜하니 이를 크게 게의치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타격을 덜 받는 사람들은 불공정한 제안을 거부하는 반면, 타격을 더 크게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러한 거래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집 형편이 어려우면 너무 꿈을 크게 가지지 말아라.” 청주의 한 중학교 교장이 1, 2학년 학생 5백 명이 모인 조회 시간에 전한 훈사다. 이 소식을 접하고 일부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보다 저게 낫다”며 다소 불편하지만, 직설적인 조언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우리 사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적합한 대우, 가난한 사람에게 적합한 꿈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놓고는 아이들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니 꿋꿋이 이겨낼 수 있다고 설교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외부 필진의 기고 내용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많은 사람들이 미래를 계획하지만 경험해보셨듯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IMF, 금융위기, 그리고 최근에 경험한 코로나19도 계획에 없던 일들 중 하나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자원의 양은 제한적이라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심리적 자원을 소모하면, 다른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심리적 자원은 부족해진다.
코로나19와 같은 큰 스트레스가 아니더라도, 부자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고민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스트레스가 된다. 한 연구에서는 자동차가 고장이 났는데 수리비가 150만 원이 나왔을 때, 이 비용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물었다. 이때 참가자들은 자동차 수리비 지출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한 다음 유동성 지능검사를 받았다. ‘유동성 지능(fluid intelligence)’은 새로운 환경에서의 적응력과 판단력, 그리고 논리력과 관련된 지능이다.
결과는 당신이 예측한 대로다.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수리비에 대한 고민을 해도 지능검사 점수는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득이 낮은 사람들은 수리비 걱정 후에 지능검사 점수가 낮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돈을 어떻게 구할지, 아니면 수리하지 않고 당분간 차를 그냥 운행할지 등 돈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뇌가 과부화되니까 인지기능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암울한 이야기이지만 ‘소득수준이 뇌 구조를 변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다’는 가설은 뇌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사실상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난이 뇌 기능을 떨어뜨리는 절대적 역할을 하는 건 아니지만, 가난이 스트레스에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뇌의 특정 부위 기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은 가난을 낳고 가난으로 인한 좌절은 일상이 된다. 자기 힘으로 고통스러운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삶의 질곡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저 낑낑대며 인내하고 참아야 할 뿐이다. 그래서일까. 가난한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에 비해 불공정한 상황에도 더 잘 수긍하는 경향을 보인다.
다음의 게임을 살펴보자. 한 사람에게 10만 원을 주고 그 돈을 자신과 파트너가 각각 얼마나 가질지 정해서 파트너에게 제안하게 한다. 예컨대 자신이 6만 원을 갖고 파트너에게 4만 원을 주기로 제안했는데 파트너가 수락하면 제안한 몫만큼 나눠 갖고, 만약 파트너가 거절하면 둘 다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식이다. 만약 제안하는 사람이 본인이 9만 원을 갖고 파트너에게는 1만 원을 제안한다면 이는 명백히 불공정한 제안이지만 한 푼이 아쉬운 상황이라면 파트너는 이를 받아들일 것이다.
실제로 이 게임을 진행해본 결과, 나이, 성별, 교육수준, 인종과 상관없이 소득이 낮은 사람들이 소득이 높은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이 불공정한 거래에 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언뜻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많이 가진 부유한 사람들은 불공정한 거래에 타격이 덜하니 이를 크게 게의치 않을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타격을 덜 받는 사람들은 불공정한 제안을 거부하는 반면, 타격을 더 크게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이러한 거래에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집 형편이 어려우면 너무 꿈을 크게 가지지 말아라.” 청주의 한 중학교 교장이 1, 2학년 학생 5백 명이 모인 조회 시간에 전한 훈사다. 이 소식을 접하고 일부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는 것보다 저게 낫다”며 다소 불편하지만, 직설적인 조언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우리 사회가 가난한 사람에게 적합한 대우, 가난한 사람에게 적합한 꿈이 어디까지인지 명확한 선을 긋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놓고는 아이들에게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니 꿋꿋이 이겨낼 수 있다고 설교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게 된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경영평론가(ijeong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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