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1907)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1907)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오스트리아의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화가다. 벨 에포크 시기 미술의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고, 유럽의 젊은 미술가들은 모두 그곳에서 활동하기를 꿈꿨다. 당대의 이런 분위기와 관계없이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아르 누보 양식을 만들어갔다.

클림트는 빈의 국립 응용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극장이나 박물관의 벽화를 그리는 장식 미술가로 활동했다. 1897년에는 건축가 오토 바그너, 디자이너 콜로먼 모저 등과 함께 보수적인 빈 미술계로부터 분리돼 독립적이고 새로운 미술을 시도하고자 ‘빈 분리파’를 결성했다. 분리파는 미술, 건축,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종합예술을 지향하고 이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원대한 이상을 지닌 젊은 예술가 집단이었다.

1900년 빈대학 대강당 천장 패널화 완성

구스타프 클림프
구스타프 클림프
빈 분리파의 명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1900년 클림트는 7년 전 의뢰받은 빈 대학 대강당의 천장 패널화를 완성하는데, 이것이 예술가로서의 그의 이력에서 커다란 변곡점이 됐다. 대학이 원한 것은 ‘철학’ ‘의학’ ‘법학’과 같이 대학이 가르치는 주요한 학문의 의미를 강조하는 패널화였다.

반면 클림트가 그린 것은 철학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기에는 미약하고,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법학이 제시하는 정의에 배치되는 무질서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 존재들이었다. 빈 대학 교수진이 클림트의 패널화에 불만을 드러내는 성명을 발표했고, 클림트도 그림 수정을 거부하면서 끝내 이 작품은 공개되지 못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클림트는 패널화와 같은 장식 미술품을 의뢰받아 제작하는 일을 그만뒀고, 이후로는 보다 개인적인 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하는 것에 몰두했다.

‘키스’(1907~1908)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1907)과 같은 그의 대표작은 대부분 ‘황금 시기’로 불리는 이 기간에 그려졌다. 1903년 이탈리아 베네치아와 라벤나 지역을 여행하면서 접한 비잔틴 모자이크의 영향으로 클림트는 황금 시기 동안 더욱 장식적이고 화려한 패턴이 부각된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빈의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클림트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를 소장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명성도 나날이 높아만 갔다. 수많은 여성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클림트와 평생 플라토닉한 애정 관계를 유지한 에밀리 플뢰게를 제외하면 그가 두 점 이상의 초상을 그린 것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의 주인공인 아델레가 유일했다. 아델레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 사업가 페르난디드 블로흐-바우어의 아내이자 당대 각 분야 명사가 드나드는 살롱을 운영한 빈 상류층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모델 아델레와의 묘한 인연

 ‘키스’(1907~1908)
‘키스’(1907~1908)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을 3~4년에 걸쳐 완성한 이후 5년 뒤에 클림트가 또다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I’(1912)를 그리면서 두 사람은 긴 시간 화가와 모델로 지속적인 인연을 맺는다. 클림트 작품 중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키스’ 속 여성 모델이 누구인가에 대해선 여러 주장이 있지만, 아델레 역시 그 후보 중 하나로 꼽힌다. 그만큼 아델레는 클림트에게 가장 중요한 모델이자 클림트의 황금 시기와 빈의 벨 에포크를 동시에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클림트와 아델레의 관계 못지않게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이라는 그림의 역사도 흥미롭다. 벨 에포크를 상징하던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기간 나치 정부가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면서 오스트리아 정부의 소유물로 전환됐다. 그림의 모델이 유대인인 것을 숨기기 위해 나치 정부는 작품 제목을 ‘우먼 인 골드’로 개칭하기까지 했다.

비극적인 역사 견딘 또 다른 시대의 초상

1990년대 말 오스트리아 정부가 나치에 몰수된 미술품을 원래의 소유주에게 반환하는 법을 제정했지만,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로 불리며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에 대해서만은 반환을 거부한다. 이에 아델레의 유족과 오스트리아 정부가 8년여에 걸쳐 치열한 소송전을 벌였고, 2006년 비로소 작품이 유족에게 반환됐다.

이 드라마틱한 사연은 2013년 ‘우먼 인 골드’라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소송 직후 유족은 이 작품을 미국 뉴욕 노이에갤러리에 판매했고, 그곳에서 현재까지 영구적으로 전시되고 있다. 노이에갤러리는 화장품 회사인 에스티 로더의 창업주가 수집한 작품을 기반으로 그의 아들 로널드 로더가 주축이 돼 설립한 미술관이다. 노이에갤러리가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분리파 미술을 집중적으로 수집한 곳인 데다 무엇보다 에스티 로더와 로널드 로더 모두 유대인이었던 점이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을 구입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로더 가문에 이 작품은 홀로코스트의 악몽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의 역사를 상징하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노이에갤러리는 이 작품을 무려 1500억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사들였고, 아델레의 유족 역시 작품 판매 수익 대부분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것으로 기나긴 소송전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줬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I’은 이 그림을 그린 클림트와 모델인 아델레가 모두 사망한 뒤에도 홀로 남아 자신만의 생을 살아가며 역사의 여러 풍파를 겪어온 셈이다. 이 그림은 예술 작품이 예술가나 작품 모델과 별개로 독자적인 생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 동시에 예술은 그것이 제작된 시대 혹은 역사와 동떨어진 미적 대상물이 아니라는 점도 이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아름답고 화려한 클림트의 작품은 벨 에포크를 상징하는 동시에 아름다운 시절이 끝나고 이어진 비극적인 역사의 시간을 고스란히 견뎌온 또 다른 시대의 초상이기도 한 셈이다.

전유신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