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결정할 때마다 노란색 공책 꺼내든 美 전 재무장관 [책마을]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의 두 번째 책이자 18년 만의 신작인 <최고의 결정>은 산만하고 장황하지만, 꽤 괜찮은 내용을 담고 있다. 골드만삭스 공동회장,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 빌 클린턴 정부 재무장관, 씨티은행 회장 등을 지낸 그는 자신의 기업 및 공직 경험을 돌아보며 불확실한 상황에서 어떻게 의사결정해야 하는지, 조직은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자신의 철학을 들려준다.

‘나 때는…’이라는 식의 서술은 사람에 따라 거슬릴 수 있다. 하지만 ‘꼰대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 회고록 같기도 하고, 경영서 같기도 한 이 책은 개인의 주관적인 경험에 너무 기댄다는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그의 말에 수긍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루빈은 1957년 하버드대 2학년 때 들은 수업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고 털어놓는다. 라파엘 데모스 교수의 철학 입문 수업이었다. 수업의 요점은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이 아니었다. 바로 이 세상에 100%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이었다. 이후 루빈은 세상 모든 일을 ‘확률적 사고’로 접근하는 버릇을 갖게 됐다고 설명한다.

그는 직장 생활을 하면서 뭔가 결정해야 할 일이 생기면 늘 노란색 줄공책을 꺼내 들었다. 한쪽 열에는 가능한 결과들을, 다른 열에는 각 결과의 추정 확률을 손으로 적어 내려갔다. 모든 가능성과 확률을 정확히 적는 게 목적이 아니다. 이렇게 적으면 예상치 못한 일들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된다.

그가 골드만삭스 리스크 아비트라지(차익거래) 부서에서 일할 때, 아나콘다라는 구리 회사의 인수가 발표됐다. 월가의 투자은행(IB)들은 아나콘다에 대한 매수 포지션을 크게 늘렸다. 루빈도 거래가 성사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봤다. 하지만 무산될 확률이 0%가 아니라는 관점에 근거해 포지션 규모에 어느 정도 제약을 뒀다. 결과는 뜻밖에도 거래 무산이었다. 아나콘다 주식은 예상했던 수준보다 훨씬 더 떨어졌다. 골드만삭스는 돈을 잃었지만, 다른 IB들의 손실은 더 컸다.
의사결정할 때마다 노란색 공책 꺼내든 美 전 재무장관 [책마을]

많은 투자자와 기업가, 정치인들이 이런 오류에 빠진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들도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해 정책이나 전략을 짜지만, 어떤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여겨지면 실제로 그대로 일이 진행될 것으로 믿는다. 예상외의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잊어버린다.

이와 관련한 또 하나의 문제는 ‘결과 중심 분석의 덫’이다. 세상은 복잡하다. 좋은 결정이 나쁜 결과로, 나쁜 결정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일어난 일을 근거로 그 결정을 평가한다. 똑같이 매주 복권을 사는 사람을 놓고 복권 1등에 당첨되면 현명하다고, 매번 꽝이면 어리석다고 보는 것과 비슷하다. 루빈은 여러 기관에서 일하면서 결과가 바람직하지 않았더라도 그 사람이 좋은 결정을 내렸는지를 판단하려고 했다고 말한다.

루빈은 조직 관리에 있어선 평등하고 열린 관계를 지향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 하고 싶은 말은 마음껏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그랬다. 1970년 어떤 사건으로 소송을 당한 골드만삭스는 유명 로펌 설리번&크롬웰을 선임했다. 직급이 낮고 이 사건과 전혀 관련이 없던 루빈은 골드만삭스 CEO였던 거스 레비를 무작정 찾아가 그 로펌이 적합하지 않다고 설득했다. 레비는 “대체 너 누구야? 당장 여기서 나가”라고 하지 않았다. 대신 루빈의 말을 가만히 듣고, 아는 연방 판사에 의견을 물어보더니 로펌을 교체했다.

상급자가 됐을 땐 질문을 많이 던졌다. 루빈은 “리더는 질문을 이용해 직원들이 더 많이 말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서술보다는 질문을 더 선호한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의견을 굳혔을 때도 요점을 말하고 싶으면 이를 질문으로 대체했다. “중국 경제에 참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대신 “대부분의 미국 투자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중국에 더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나요”라고 하는 식이다.

확률적 사고를 더 알고 싶으면 <생각에 관한 생각>이나 <결정, 흔들리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를 읽어보라는 루빈 자신의 말처럼 이 책의 내용은 다른 책에서도 많이 다뤄졌다. 하지만 루빈이라는 기업과 공직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유명인의 말이기에 무게감이 또 다르게 다가온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