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의 추억] 부실공사의 잔혹사 소환…아슬아슬 성수대교 건설 현장도 최초 공개
한국 현대사는 '고속성장'의 역사다. 아파트 한 동, 다리 하나를 지을 때도 빨랐다. 경제성장과 도시화가 급속했던 만큼 필요한 주택이나 사회간접자본을 신속하게 확충해야 했다. 그만큼 부작용도 많았다. 가장 심각한 것이 '부실공사'였다. 1970년대 이후, 건물과 교량이 무너지고 주저앉는 사고가 이어졌다. 21세기에 들어선지 23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붕괴'의 조짐이 곳곳에 드리워져 있다. 최근 GS건설이 건설중이던 인천 검단 아파트를 전면 재시공하기로 발표한 것을 계기로 옛 필름 속에서 소환한 과거 부실공사의 잔혹사를 정리해 본다.

<와우아파트 붕괴>
소방대원 등 관계자들이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소장자료
소방대원 등 관계자들이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와우아파트 붕괴현장에서 구조작업을 벌이고 있다./서울특별시 소방재난본부 소장자료
1970년 4월 8일 오전 8시 서울 마포구 창천동. 굉음과 함께 지축이 흔들렸다. 서울시가 건립한 와우아파트 1개 동이 한순간에 무너진 것이었다. 이 사고로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당시 서울시는 급격이 늘어나는 무허가 주택을 줄이기 위해 서민용 아파트를 공급하고 있었다. 그래서 1969년 6월에 와우아파트를 착공했고 바로 그해 12월에 완공했다. 단 6개월만에 아파트 단지 하나를 완성한 것이다. 게다가 건축 비용도 통상적 건축비의 반을 들였다. 그러니 부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서울시장, 구청장, 설계자, 현장감독, 건설사 사장 등이 줄줄이 물러나거나 구속됐다. 이 사고는 '한국형 부실공사 사고'의 시발점이었다.

<지하철 3호선 무악재 구간 붕괴>
1980년대 대표적인 대형 부실공사 사고는 지하철공사 현장에서 일어났다. 와우아파트 붕괴가 일어나고 딱 12년 지난 1982년 4월9일 공사중이던 서울 지하철 3호선 무악재 구간이 무너져 내렸다. 그 위를 지나가던 시내버스 4대가 추락했다. 이 사고로 11명이 사망하고 4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트럭 한 대가 1982년 4월 8일 서울 무악재 지하철3호선 공사현장에서 갈라진 도로 틈에 박혀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트럭 한 대가 1982년 4월 8일 서울 무악재 지하철3호선 공사현장에서 갈라진 도로 틈에 박혀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그 여파로 의주로~무악재 구간의 교통이 완전 두절됐다. 서울 서북부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주 도로가 막혀, 출퇴근 시민들은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이 사고로 지하철 공사 공법이 좀 더 안전한 방식으로 바뀌었고, '선 안전, 후 시공'의 인식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1982년 4월8일 서울 지하철3호선 무악재 구간이 무너져 내렸다. /한경디지털자산
1982년 4월8일 서울 지하철3호선 무악재 구간이 무너져 내렸다. /한경디지털자산
<신행주대교 붕괴>
1990년대는 대규모 붕괴사고가 줄줄이 발생했다. 그 첫 사고는 한강 다리 공사현장이었다. 1992년 7월31일, 경기 고양시와 서울 강서구 개화동을 연결하기 위해 건설하던 신행주대교가 폭삭 주저앉았다. 당시 벽산건설이 짓던 이 교량은 길이 1460m, 폭 14.5m 왕복 4차로의 한국 최초의 사장교였다.
1992년 7월31일 신행주대교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내려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2년 7월31일 신행주대교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내려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주탑과 상판 사이 인장작업 전 임시로 설치한 가교각 2개가 상판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여 무너지면서 10개의 교각이 차례로 넘어졌고, 강선으로 연결된 상판 41개가 차례로 강물로 끌려들어갔다.이 사고로 상판 위에 쌓였던 수십 억원의 자재와 장비가 수장됐다. 다시 짓는데 4년 여의 기간이 걸려 일산 및 중동 신도시 주변의 교통 계획이 엉망이 됐다. 무너진 신행주대교는 그해 12월 3일 다단식 발포공법으로 폭파 해체됐다. 정부는 이 사고를 계기로 '시설물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했다. 그렇지만, 법 제정이 이어지는 대형 사고를 막지는 못했다.
1992년 7월31일 신행주대교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내려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2년 7월31일 신행주대교 교각과 상판이 무너져 내려 처참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신행주대교 주탑 잔해가 1992년 12월 3일 대우엔지니어링과 미 다이콘사에 의해 다단식 발포공법으로 폭파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신행주대교 주탑 잔해가 1992년 12월 3일 대우엔지니어링과 미 다이콘사에 의해 다단식 발포공법으로 폭파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성수대교 붕괴>
그리고 2년 뒤 1994년 10월21일 오전 7시, 성수대교가 내려 앚았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과 강남구 압구정동을 연결하는 성수대교의 상부 트러스 48m가 잘라낸 듯 아래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아침 출근 시간, 그 위를 지나가던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요차 4대 등 차량 6대와 탑승자 49명이 49명이 추락했고 그 중 32명이 사망했다. 성수대교 시공사인 동아건설은 사고 직후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보여 여론의 뭇매를 맏았다. 결국 현대걸설이 맡아 재시공하게 됐다.
1994년 10월 21일 추락한 성수대교 상부 트러스 구간 위에서 구조대원들이 시민들을 구출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4년 10월 21일 추락한 성수대교 상부 트러스 구간 위에서 구조대원들이 시민들을 구출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이 사건은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부정부패가 얼마나 위험한 것이고 우리 사회를 망가뜨리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케이스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악재 3호선 붕괴사고 이후 또 12년 만이다. 1970년 이후 12년마다 대형 사고가 발생한 것이었다.

<아슬아슬...성수대교 건설 당시 현장의 모습 최초 공개>
1979년 3월 30일, 한경 사진기자가 성수대교 공사 현장을 촬영한 장면이다. 인부들이 헬멧도 안 쓴 채 철 구조물 위에 앉아 일하고 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이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경디지털자산
1979년 3월 30일, 한경 사진기자가 성수대교 공사 현장을 촬영한 장면이다. 인부들이 헬멧도 안 쓴 채 철 구조물 위에 앉아 일하고 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이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경디지털자산
1979년 3월 30일, 한경 사진기자가 성수대교 공사 현장을 촬영한 장면이다. 인부들이 헬멧도 안 쓴 채 철 구조물 위에서 일하고 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이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경디지털자산
1979년 3월 30일, 한경 사진기자가 성수대교 공사 현장을 촬영한 장면이다. 인부들이 헬멧도 안 쓴 채 철 구조물 위에서 일하고 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이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경디지털자산
1979년 3월 30일, 한경 사진기자가 성수대교 공사 현장을 촬영한 장면이다. 인부들이 헬멧도 안 쓴 채 철 구조물 위에 앉아 일하고 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이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경디지털자산
1979년 3월 30일, 한경 사진기자가 성수대교 공사 현장을 촬영한 장면이다. 인부들이 헬멧도 안 쓴 채 철 구조물 위에 앉아 일하고 있다. 추락에 대비한 안전장치도 없이 작업하는 모습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경디지털자산
<삼풍백화점 붕괴>
그리고 1년이 채 안된 1995년 6월29일, 한국 역사상 최악의 사고가 일어났다.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이 한순간에 주저앉은 것이다. 1989년 삼풍건설산업이 지은 지상5층의 새 건물이었지만, 붕괴조짐이 일어난지 20여 초 만에 건물의 양쪽 외벽만 제외하고 전층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사망 502명, 실종 6명, 부상 937명. 역사 상 한반도에서 전쟁이나 전염병 외에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나온 사건은 없었다.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시민들이 부상자를 옮기고 있다./한경디지털자산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시민들이 부상자를 옮기고 있다./한경디지털자산
삼풍백화점은 무량판 구조였다. 대들보 없이 바닥이 직접 기둥으로 하중을 버티는 구조였다. 기둥과 위층 바닥 사이에 하중 전달을 보조하는 지판이 하나 더 설치됐으나, 지판의 두께가 충분치 않거나 일부 기둥은 지판 자체가 없어서 바닥과 기둥의 철근 연결도 제대로 돼지 않았다. 또한 기둥 지름은 당초 계획보다 25% 작았다. 몇몇은 아예 없애기도 했다. 엄청난 공사비가 새 나간 것이다. 게다가 개점 후 용도변경이 이어졌다. 규칙도 규정도 없었다. 감독 기능도 작동하지 않았다. 그래서 삼풍백화점은 무게를 버틸 수 없는 건물이 됐다. 기업과 공무원의 유착, 부실공사, 부실감독에 따른 인재였던 것이다.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소방대원들이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소방대원들이 생존자들을 구조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삼품백화점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들이  희생자합동위령제가 열린 1995년 7월29일 서울 서초동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조남호 서초구청장을 폭행하고 있다. 조 구청장은 이 사건으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한경디지털자산
삼품백화점 희생자 및 실종자 가족들이 희생자합동위령제가 열린 1995년 7월29일 서울 서초동 서초구민회관 앞에서 조남호 서초구청장을 폭행하고 있다. 조 구청장은 이 사건으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5년 6월29일 서울 서초동 삼풍백화점 붕괴 직후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뿌린대로 거둔 것일까. 신행주대교를 지은 벽산건설, 성수대교를 지은 동아건설, 삼풍백화점을 지은 삼풍건설산업은 모두 역사에서 사라진 기업이 됐다. 회사든, 공조직이든, 개인이든 기본이 안 된 채 성공을 거두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21세기에도 살아 있는 붕괴의 그림자>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도 한국에서 '붕괴'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2021년 6월9일엔 광주광역시 동구 학동에서 철거공사 중이던 건물이 통째로 무너지면서 시내버스 1대를 덮쳤다. 승객 9명이 숨지고 8명이 다쳤다. 2022년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아이파크 신축공사현장에서 외벽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해, 인부 6명이 사망했다. 이 사고로 시공사인 HDC현대산업개발은 입주 직전의 아파트에 대한 전면 재건축에 들어갔고 3700억 여원의 비용을 감당해야 했다.

지난 5일 GS건설이 주차장 붕괴로 부실시공의 논란에 휩싸인 인천 서구 검단신도시 아파트 17개 동을 새로 짓겠다고 발표했다. 철거 및 재시공에 4년 가까이 걸리는 데다 지체보상금 등을 따지면 5000억 정도의 비용이 들 것으로 보인다. 입주를 못하게 된 소비자가 가장 큰 피해자다. 회사 이미지 손상과 천문학적 비용 부담을 안게된 기업도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됐다. 자업자득이다.
이런 사건들은 사소한 규정이라도 꼼꼼이 지키며 차근차근 일을 해 나가는 지극히 '평범한 원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해 준다. 건설회사 뿐 아니라, 우리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함께 되새겨야 할 원칙이 아닐까.

신경훈 디지털자산센터장 khsh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