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오른쪽)는 지난 6일 임태희 경기교육감을 만나 “아이들의 그릇을 키워주면 스스로 채워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경기교육청 제공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오른쪽)는 지난 6일 임태희 경기교육감을 만나 “아이들의 그릇을 키워주면 스스로 채워 성장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경기교육청 제공
“교육 예산이 남았다는 건 현상 유지만 겨우 했다는 겁니다. (저출산으로) 예산이 남았다고 줄이자는 것은 행정의 관점입니다.”

<백세일기> 등을 지은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103)는 최근 임태희 경기교육감과 만나 “교육 예산이 남으니 줄일 것이 아니고, 개인의 가치를 최대한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어디에 더 비용을 써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육감은 이달 초 취임 1주년을 맞았다. 이날 대담 자리는 임 교육감이 ‘1주년’을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마련됐다. 임 교육감은 “평생 교육자로 살아온 철학자에게 새로운 교육의 길을 묻고 싶었다”고 했다. 이날 대담에서 김 교수가 주로 강조한 것은 ‘학생의 자율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어른이 만든 틀에 아이를 맞추려 하지 말고 생각의 그릇을 키워줘야 한다”고 했다. 그가 ‘그릇’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릇에 들어갈 내용물은 학생이 스스로 채워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임태희 교육감=103세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십니다.

▷김형석 교수=태어날 때부터 그리 튼튼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죠. 술·담배 안 하고, 자는 시간은 일정하게 규칙적으로 살았습니다. 건강의 비결을 많이 물어보는데, ‘열심히 일하는 삶’인 것 같아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건강이 따라오더라고요.

▷임 교육감=학교 다니실 때 좋아하는 과목은 무엇이셨나요.

▷김 교수=중학교 때 윤동주 시인이 같은 반 친구였고, 황순원 소설가가 선배였어요. 그 둘을 보면서 ‘나도 내 인생 60대 때까지 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철학을 공부해 정신적인 지도자로 성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독서를 많이 했죠. 학과목보다 종교, 철학, 문학 분야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것이 학교 못지않게 내 인생에 도움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임 교육감=부모님께서 ‘공부 열심히 해라’ 이런 말씀은 안 하셨나요.

▷김 교수=부모님이 옛날 분이세요. 학교 교육도 제대로 못 받으셨죠. 저도 학교에 가기 전까진 백지상태였죠. 학교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특히 당시에 도산 안창호 선생이나 선배였던 조만식 선생의 강연을 들으면서 마음의 그릇이 커진 것 같아요. 그리고 스스로 독서를 하기 시작하니까 그 그릇이 채워졌어요. 부모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했다면 이렇게 못 자랐을 것 같아요. 어려운 환경이 인생에 꼭 나쁜 건 아니에요. 부유한 게 좋은 것만도 아니고요. 누구나 인생에 주어진 여건은 비교적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임 교육감=‘마음의 그릇’이라는 말이 인상적입니다. 시험 보는 기술이 아니고 생각의 그릇을 키워줘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 위해 학교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김 교수=한국전쟁 당시 미국 정부가 전국에서 다섯 명의 선생님을 뽑아 한국으로 보냈습니다. 문교부 장관이던 백낙준 선생이 한국 교육 발전을 위해 요청했거든요. 그때 중앙중고 교감으로 이들을 만났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가장 큰 배움은 선생과 제자, 부모와 자식 간 상하관계를 깨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를 위한 스승이 되고, 자녀를 위한 부모가 되지 않는 한 교육을 못 바꾼다는 거예요. 두 번째는 사랑이 있는 교육이 제자 그리고 세상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시설이나 제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했죠. 또 하나 기억나는 건 말 안 듣는 학생을 어떻게 지도하냐고 했을 때 미국 교사들의 반응이었어요. 그런 학생을 기다린다고 하더라고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아이젠하워가 바로 그런 학생이었다고요.

▷임 교육감=교육을 통해 사람이 바뀌고, 사랑이 있는 교육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씀 속에 교육이 나아갈 길이 있는 것 같습니다.

▷김 교수=내가 키우고 싶은 대로 아이를 키우려고 하면 안 됩니다. 한국에서는 ‘하지 말라’고 하는 게 많지만 미국에서는 딱 두 가지만 하지 말라고 해요. 거짓말, 그리고 다른 사람 험담이에요. 대신 뒤처진 아이도 끌어올려주려고 해요. 한번은 미국 사는 손주를 오랜만에 봤는데 달리기 상을 받았다고 자랑하더라고요. 맨날 꼴등을 한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상을 받았나 보니까 ‘제일 열심히 뛴 상’을 받았다는 거예요. 키 작고 체력도 약하던 아이가 예일대에 가서 요트 대표선수가 됐어요. 한국에 가서 키웠으면 가능했을까요. 어릴 때부터 자부심을 키워주고, 남과 비교하지 않고,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임 교육감=학생이 더 잘하는 걸 하게 하고, 기죽게 하지 않는 방식이네요. 시절로 따진다면 교육에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중 언제가 가장 중요할까요.

▷김 교수=다 중요합니다. 특히 선생님이 중요해요. 한국 선생님은 스스로 과소평가하고 있어요. 학생은 선생님만큼 자랍니다. 선생님이 자라지 못하면 학생도 자라지 못해요. ‘제자를 키우고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해서는 내가 나를 키워야겠다’라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임 교육감=학령 인구가 빠르게 줄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다르게 학생이 각자의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맞춤형 교육’을 제공해야 할 때가 된 것이죠. 그런데 도리어 학생이 감소한 만큼 예산을 줄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옵니다.

▷김 교수=교육 예산이 남았다는 건 자기 책임을 다 못하고 현상을 겨우 유지했다는 것이에요. 이것저것 도입하다 보면 오히려 모자랄 때가 많을 텐데, 행정의 그릇에 가둬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학생은 끝없이 자랍니다. 후진국은 제도를 먼저 만들고 교육을 그 틀에 맞추지만 선진국에서는 교육을 행정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아요. 교육은 개인의 인격적 가치를 최대로 끌어올리는 목적 그 자체가 돼야 합니다.

▷임 교육감=새로운 세상을 살아야 할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김 교수=인성 교육에 힘써야 해요. 친구를 만들고 서로를 이해하고 돕는 능력을 반드시 키워줘야 합니다. 이건 남은 일생동안 필요한 거거든요. 몇 마디만 해보면 이 사람이 어떤 교육을 받으며 자랐는지, 어떤 친구들과 어울렸는지 다 느낄 수 있어요. 어른이 돼서도 선한 인간관계에서 행복을 느낍니다.

이혜인/강영연 기자 yyk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