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매력적인 '꼰대' 본 적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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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재현의 탐나는 책
< Y 교수와의 대담 >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이주환 옮김, 읻다, 2016.
< Y 교수와의 대담 >
루이-페르디낭 셀린 지음
이주환 옮김, 읻다, 2016.
나는 꼰대를 좋아한다. 꼰대들은 경험과 이상을 갖고 있기에. 그들은 젊을 적의 치열문학계의 꼰대로는 수많은 이들이 있지만, 꼰대스러운 소설로는 역시 <Y 교수와의 대담>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다. “실상은, 그러니까, 아주 간단히 말해, 출판사가 매우 심각한 판매 부진을 겪고 있다는 겁니다.”
한 육체적·정신적 고투로 지식이 축적되어 있으며,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작금의 현실에 개탄하며 이상에 불과할지언정 분명한 방향성을 품고 살아간다.
꼰대의 조건은 이것만으로 충분하지만, 꼰대 중의 꼰대는 역시 자기 자신이 꼰대임을 아는 꼰대일 것이다. 자신이 꼰대라는 것을 의식하는 꼰대는 자신이 내뱉는 말이 효력을 잃지는 않도록 꼰대-아님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렇다고 내가 나 아닌 다른 존재가 될 수는 없다는 난점 사이에서 고민하다 정처 없어진 스스로를 비꼬는 유머를 구사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메타 꼰대'의 경지에 다다를 때, 꼰대는 매력을 가득 품은 사랑스러운 존재가 된다.
책의 미래에 대해 고민해본 이라면 솔깃해지지 않을 수 없는 문장에 단번에 낚아채여져 따라 읽다보면 여행과 영화, 생활용품과 자동차를 구입하느라 누구도 책을 사지 않는다는 일갈이 이어진다(“그런데 한 권의 책은요? 그건 빌리면 되는 물건이었지요!…” 그렇지, 그렇지. 그런데 맥북 에어 15인치가 곧 출시된다는데…).
작가라는 존재가 인세 수입 덕분에 상당한 자산가가 됐을 거라고 믿는 독자들은 작가에겐 고통이 어울린다는 속삭임으로 그들을 단두대로 이끌지 못해 안달이라고 한다(역시 그렇다. 고통이 창조의 어버이라는 게 언제적 격언입니까). 그러므로 “많은 작가들이 궁핍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반면, 다리 밑에서 노숙하는 편집자는 찾아보기 힘듭니다”(네?).
셀린은 다짜고짜 그 유명한 갈리마르 출판사의 창립자 가스통 갈리마르를 소환한다. “하지만 그는 장사꾼이기도 합니다.” 왜냐면 그는 작가들로 하여금 라디오에 출연시키고 책을 팔기 위해 이런저런 녹음과 촬영에 노출시킴으로써 그들을 완전히 우스갯소리로 전락시킨다는 것이다. 요즘으로 따지면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출연과 같은 마케팅 전략에(하지만, 선생님. 그게 말입니다…). <Y 교수와의 대담> 또한 가스통에게 셀린이 스스로를 홍보하기 위해 Y 교수와 인터뷰하는 과정을 담은 소설이다.
셀린은 왜 스스로를 그처럼 끔찍한 사지로 내몰아야 했는가? 그건 셀린이 문학사에 길이 남을 버러지였기 때문이다… “나는 위반자에, 배신자에, 인종 학살자, 예티도 모자라서… 아예 입에 올려서는 안 될 사람이 되었지요!…” 공산주의에도 자본주의에도 적을 두지 않아 적만 만들었던 셀린은 결정적으로 반유대주의로 인해 완전히 금치산자가 되었다.
하지만 여기서 난 셀린이 얼마나 인간 말종인지, 아니면 실은 셀린이 그럴 의도가 아니었으며, 그가 어떤 아버지였고 동지였는지… 얼마나 따뜻한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 수 있었냐면… 그런 데는 관심이 없다. 실제로 이 소설 속엔 그의 의중과 정체성을 알 수 없는 ‘모두 까기’가 성행하고 있다.
“내 생각에, 관념이란 것보다 더 천박하고, 진부하고, 역겨운 것도 없습니다! 도서관마다, 그리고 카페테라스마다, 관념들로 꽉 차 있어요!… 무력한 사람들이… 그리고 철학자들이!… 관념을 곱씹어대지요… 관념이란 거… 그게 그들의 산업입니다!… 그들은 관념을 갖고 젊은이들에게 허세를 부리지요! (…) 정열 어린 청춘기가 저 “관녀어엄“들 앞에서, 그리고 더 정확하게 짚자면 ‘철학’ 앞에서 흥분하느라, 열광하느라 바쳐지는 것입니다 선생님!…”(20쪽)
셀린은 ‘졸작’만을 뽑아내는 작가들과, ‘졸작’에 몰두하는 독자들, ‘졸작’도 안 읽는 대중들, ‘졸작’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홍보하는 출판업자들, “전쟁과 술, 고혈압과 암 없이는, 권태로 죽어버릴” “무신론자 유럽인들”과 “백인의 것들을 몽땅 다 부숴버릴” “황인과 흑인”들, 그리고 “주제넘은 망상에 빠져 있”는 “우리 시대”에 대한 욕에 여념이 없다. 그런 셀린이 드물게 좋게 바라보는 이가 둘 있는데 바로 셀린의 충실한 지지자였던 출판업자 로베르 드노엘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 자신이다.(“내가 우리 시대 유일한 작가예요!…”)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셀린은 꼰대다. 그러나 내게 셀린의 꼰대스러움이 특별한 것은 그가 정말로 실력을 지닌 매력적인 꼰대이기 때문이다. 셀린은 “톡 쏘는 피망” 같은 은유가 없는, 혹은 은유뿐인 조롱이 아니라 입맛 가득한 은유들이 조화롭게 수놓인 조롱을 선사한다. 셀린은 진부하고, 얕은 통찰에, 통념에 사로잡혀 가상의 적을 상정하고 욕만 하는, 그리하여 결국 욕하는 ‘나’만 남는 비난이 아니라, 그 모든 ‘졸작’을 읽고 소화하며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단두대 위에 올려놓는다.
“하늘로부터 받은 나의 재능”을 운운하는 자화자찬에 설득력이 담길 리가 없고, 그 근거로 들어지는 셀린의 발명품, “문어에서의 감정 구현”은 아무리 반복해서 말해져도 변변찮은 인터뷰어 Y 교수마저도 설득시키지 못한다. 심지어 Y 교수는 공원에서 소변을 지리고, 난동을 부리며 끝내 뻗어버린다. 그런데 Y 교수를 이끌고 힘겹게 갈리마르에게 향하는 셀린의 모습이 일견 하찮고 우습게 보이면서도, 자기 자신을 이렇게까지 희화화해내는 그를 보며 어쩐지 서늘해지게 된다.
꼿꼿하고 고답적인 자세가 아니라 빈틈 많고 푸근한 인물과 대화가 내겐 날카롭게 벼려진 풍자만 같다. 셀린은 유머를 아는, 자기 자신마저 유머에 써먹을 줄 아는 꼰대 작가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카페에서 마음 맞는 친구들과 만난 것처럼 한껏 웃은 다음에, 그럼에도 찻잔 안에 남은 찌꺼기처럼 존재감을 과시하는 질문들을 들여다보게 된다.
어떤 것이 ‘졸작’이고, ‘발명’인가. 작가는, 독자는 무엇을 쓰고 읽어야 하는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셀린이 어디에도 힘을 싣지 않는 것처럼, 각자의 다종다양한 답이 만들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셀린이 우스개를 나누듯 인터뷰했듯이, 우리들은 각자가 지닌 무게감을 내려놓고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한 꼰대의 이야기 덕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