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디 셔먼의 역사 초상화(History Portraits·1989~1990) 시리즈.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소장
신디 셔먼의 역사 초상화(History Portraits·1989~1990) 시리즈. 루이비통재단 미술관 소장
초록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가지런히 손을 모은 채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고전적인 머리 장식과 드레스 레이스만 보면 영락없는 중세 귀족 여성이다. 그 옆에는 머리가 벗겨진 수도승이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그림이 걸렸다. 척 보기엔 둘 다 섬세한 붓터치로 그려낸 ‘중세 명화’ 같지만, 사실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다.

아직 놀라긴 이르다. 사진 속 여자와 수도승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는지. 여자의 오뚝한 코와 수도승의 민머리는 가짜로 붙인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고독한 광대부터 뇌쇄적인 포즈의 패션모델, 순수한 눈빛의 소녀까지. 서울 청담동 루이비통 메종 서울 4층 전시장에 걸려 있는 여러 사진의 모델은 딱 한 명이다.

‘신비의 아이콘’ 신디 셔먼

주인공은 미국을 대표하는 현대 사진작가 신디 셔먼(69)이다. 셔먼 앞에 이런 수식어를 붙게 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다. 50년 가까이 카메라에 담은 유일한 피사체가 본인뿐이어서다. 셔먼은 분장, 카메라 구도, 빛의 힘을 빌려 다양한 인물로 변신했다.

그는 이런 작업을 1970년대부터 해왔다. 자신을 B급 누아르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처럼 꾸민 다음 찍은 ‘무제 필름 스틸’ 연작(1977~1981)이 대표적이다. 지금이야 자신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게 흔한 일이 됐지만, 50년 전엔 신선한 파격이었다.

셔먼의 카메라가 잡는 대상에는 한계가 없다. 할리우드 영화의 여주인공부터 바로크 시대 명화 속 청년,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마네킹까지. 그는 여성과 남성, 현대와 과거, 인간과 사물,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셔먼은 이렇게 철저하게 연출된 자신의 모습을 통해 현실을 비틀고 꼬집는다. 때로는 여성을 위에서 내려보는 듯한 포르노그라피 사진의 구도를 역이용해 가부장적 사회에 일침을 가하고, 때로는 유명 패션 브랜드의 옷을 우스꽝스럽게 찍어 보편적인 미의 기준에 의문을 던진다.

앤디 워홀,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쟁쟁한 거장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프랑스 파리 루이비통재단 미술관이 2020년 대규모 회고전의 주인공으로 셔먼을 택한 이유다. 그의 시기별 대표작 300여 점을 내 건 이 전시는 ‘초대형 블록버스터 전시’란 찬사와 함께 2021년 1월 막을 내렸다. 이후 많은 사람이 전시가 끝난 걸 아쉬워하자, 재단은 세계 곳곳에 있는 전시장 ‘에스파스 루이비통’을 통해 셔먼의 작품을 알리기로 했다.

사진으로 현실을 비틀고, 꼬집다

남성, 2019.
남성, 2019.
루이비통 메종 서울 4층에 있는 ‘에스파스 루이비통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셔먼의 개인전 ‘온 스테이지 - 파트 II’는 그 결과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10점뿐이지만, 하나하나 의미가 있는 사진이라고 재단은 설명한다. 그의 첫 연작인 ‘무제 필름 스틸’부터 ‘역사 초상화’ ‘광대’ ‘남성’까지 굵직한 시리즈를 통해 셔먼의 작품 세계를 압축해서 소개한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사 초상화’ 시리즈다. 거장의 명화를 연상시키는 이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색한 보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일부러 보형물을 넣은 티가 나도록 셔먼이 의도한 것이다. 르네상스 대표 화가인 라파엘로의 ‘라 포르나리나’(1518~1519)를 패러디한 작품에는 가슴 보형물을,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초상화를 따라한 작품에선 오뚝한 코를 붙였다. 보형물을 착용하고 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통해 명작의 권위를 흔든 것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 사진인 ‘남성’(2019)도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힌다. 2020년 회고전에서 처음 공개한 이 작품 속에서남자로 분장한 셔먼은쓸쓸한눈빛과함께자신의 옛모습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뒷배경은 셔먼이 유럽, 아시아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찍은 풍경을 디지털로 합성한 것이다. 예전 촬영 방식만 고집하지 않고, 사진 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신의 작품도 진화시킨 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전시는 9월 17일까지. 무료 관람이지만, 사전 예약해야 한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