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 시간에는 과학 문제를 풀고, 미술 시간에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배웠다. 과학 시간에 만화를 그리고, 미술 시간에 수학 공식을 쓰는 것은 수업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과학자는 과학책을 읽고 과학자들과 모여 연구를 한다. 아티스트는 인문학을 읽고 아티스트끼리 인생을 논한다.
세상이 심드렁해질 때,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
그런데 『사이언스 이즈 컬처』의 기반이 된 시드(Seed) 프로젝트에서는 과학 작가와 안무가와 만나 시간을 탐구하고, 영화감독과 심리학자가 만나 잠과 꿈에 관해 대화를 나눈다. 그것도 최신 과학을 안다는 전제로 말이다. 십년 전 이 책을 처음 만났을 때, 높낮은 벽이 무너지는 해방감을 느꼈다.

‘Science is Culture’라는 문장은 “과학 역시 사람들의 생각과 감정을 주고받는 과정, 곧 문화”라고 말하는 듯하다. 과학이 자연 속에 숨어 있는 답을 찾거나 실용적인 기술에 적용되는데 국한되지 않는다는 의도 같다.

여기 가상의 독자가 있다. 어제는 경영서를 읽고 오늘은 과학책을 읽는다. 내일은 현대미술관에 가서 테크놀로지와 기후위기를 표현한 미디어아트를 관람할 것이다. 개인들은 자기 나름의 견해를 갖기 위해 조각들을 모아서 통찰력을 만들고 있다. 또 과학기술은 세상에 대한 인식을 바꾼다. 우리는 뇌를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언제까지 프로이트의 꿈 해석에만 빠져 있을 수는 없다. 그리고 과학적 사실은 창작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의 참여자이기도 한 영화감독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은 ‘기억 제거’를 소재로 삼았다.
세상이 심드렁해질 때,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
헤어진 연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장면. 출처: 영화 <이터널 선샤인>
『사이언스 이즈 컬처』에는 세계적인 학자가 여럿 등장한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의식에 관하여 동 주제로 픽션을 쓴 소설가와 대화한다. 언어학자 놈 촘스키는 전쟁과 기만에 관하여 진화생물학자와 의견을 교환한다. 나는 십년 만에 이 책의 목차를 다시 펼쳐보았을 때, ‘시간’ 이란 주제에 가장 관심이 머물렀다.

인생의 어느 시기에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어느 시기엔 또 너무 넘치도록 많아서 감당이 안 된다. 고독감 말이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말은 너무 어렵고(카를로 로벨리의 동명의 베스트셀러), 아인슈타인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는 말도 영 못 알아듣겠다. 시간은 늘 인식하는 것이지만 굉장히 미지의 것이다. 다만 대처를 잘해볼 뿐이다. 시간을 덩어리로 잘라내고(습관과 각종 계절 이벤트), 가급적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시간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른 체하며(몰입), 이따금 새로운 것들에 경탄하느라 지루한 흐름을 끊고 싶어진다.(경이로움)

어쨌거나 이론물리학 박사이며 소설을 쓴 앨런 라이트먼과 시간의 예술인 음악을 몸으로 느끼는 안무가 리처드 콜턴은 이 복잡다단한 시간에 관하여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 다음은 일부 요약이다.

20세기 들어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현대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그 결과, 예술은 ‘시각예술’에서 ‘시간예술’로 급변했다. 아인슈타인 이전까지는 세잔이나 피카소 같은 급진적인 예술가조차 시각예술이 강점이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시간’은 항상 절대적인 것으로 논외였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아인슈타인의 ‘터무니없는 주장(아무리 빨리 달려도 빛은 같은 속도로 다가온다)’에 가장 먼저 호응한 부류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뒤집어보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과학과 예술은 항상 연결되어 있다.
세상이 심드렁해질 때, 미술관에 가는 사람들
싱가포르 Art Science Museum

예술가는 매일 벌어지고 있는 일상에서 보통 사람들은 놓치는 진실을 발견한다. 과학자는 예술가에게서 연구 대상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이 심드렁해지고 온통 아는 것투성이라 지루해졌을 때는 미술관에 가야 한다. 최고 수준의 예술가는 철학자이자 미래를 감지하는 사람들이다. 또 모호함을 견딜 줄 안다.

이 책의 특이한 점은 표지에 기획자 이름을 표시했다는 것이다. 여러 과학자와 예술가를 매칭한 시드 프로젝트와 그 기록물인 이 책의 기획자 애덤 블라이(Adam Bly)란 인물이 궁금했다. 그의 다음 책이 궁금해서 아마존에서 검색을 해봤다. 과학과 문화의 융합을 꿈꾸었던 이 캐나다인은 아쉽게도 4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