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브르 2호점'의 주인공은 모네도, 피카소도 아닌 건물 그 자체
아부다비, 아랍에미레이트공화국(UAE)의 수도. 이 도시의 끝자락에 있는 사디얏 섬엔 UAE 정부가 2005년부터 21조원을 쏟아부은 문화예술특구가 들어서 있다.

두바이에서 지름길로 달려도 2시간이 걸리는 이 섬은 사막만큼이나 한적하다. 고층 빌딩도 없고, 길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이 섬을 찾는 관광객이 한해 100만명이 넘는단다. 무더위를 피해 다들 건물 안에 있지 않고선 이 숫자를 설명할 길이 없다.

덥고, 접근성도 떨어지고, 별다른 유물·유적도 없는 이 섬을 순식간에 세계인이 찾는 관광명소로 만든 건 바로 '루브르 박물관' 2호점이다.
'루브르 2호점'의 주인공은 모네도, 피카소도 아닌 건물 그 자체
사디얏 섬의 상징이 될 랜드마크를 찾아헤매던 UAE 정부는 세계 최고 박물관인 루브르를 끌어들이기로 하고, 2007년 프랑스 정부와 계약을 맺었다. 2037년까지 30년동안 '아부다비 루브르'란 문패를 달고, 루브르가 갖고있는 보물들을 대여하고, 전문가들도 파견받기로 한 것. 그 대가로 프랑스에 1조2584억원을 건네기로 했다.

10년 동안의 설계와 공사 끝에 '아부다비 루브르'는 2017년 11월 문을 열었다. 설계와 공사는 프랑스 대표 건축가이자 ‘빛의 장인’으로 불리는 장 누벨이 맡았다. 그는 중동의 뜨거운 햇빛을 덜어내기 위해 '바다 위에 떠 있는 돔' 형식으로 미술관을 설계했다.
'루브르 2호점'의 주인공은 모네도, 피카소도 아닌 건물 그 자체
원형 모양의 조각을 8겹 겹쳐 천장을 제작했다. 그래서 천장에 7850개의 구멍이 생겼다. 덕분에 건물 안에 들어오는 빛의 양과 방향이 매시간 달라진다. 통풍을 위해 위쪽 4겹과 아래쪽 4겹 사이에 5m의 공간을 뒀다.

미술관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큼지막한 빌딩 55개를 이어붙인 형태다. 사람들은 이 빌딩들을 건너다니며 작품을 관람한다. 이 모든 전시실의 벽면과 통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작품들이 많았다. 이중 절반은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빌린 것이고, 나머지 절반은 아부다비 루브르의 자체 소장품이다.

작품 수는 국가 간 계약 사항으로 정확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상설전시관에 놓여진 작품의 수만 600점 이상으로, 시즌마다 매번 바뀌는 작품들까지 더하면 전시할 수준의 작품만 2000여점이 될 걸로 전문가들은 추산하고 있다.

'루브르 2호점'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작품 수준은 높다. 중동에 있는 미술관이란 정체성에 맞게 중동과 세계의 역사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시대에 따라 11개 전시관에 들여놓았다. 마지막 12번째 전시관은 중동 작가들의 작품들로 채웠다.

크게 4개동 중 첫번째 동(1~3 전시실)은 기원전 아시아와 이집트, 그리스, 페르시아 유물로 구성했다. 압도적 크기의 석상들이 눈 앞에 그대로 누워 있다. 그 옆에 칼과 투구, 세월의 때가 묻은 황금, 청동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기원전 450년 레바논 무덤에서 발견된 초대형 진흙관 덮개.
기원전 450년 레바논 무덤에서 발견된 초대형 진흙관 덮개.
두번째 동(4~6 전시실)은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 세 종교를 아우르는 유물로 가득차 있다. 압권은 큼지막한 불상. 송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그 높이만 175cm다. 성인 한 사람이 서 있는 듯한 크기다. 종교 관련 유물은 실크로드 무역에 관한 유물들과 중세시대 지중해 유물들과 바통 터치한다.
'루브르 2호점'의 주인공은 모네도, 피카소도 아닌 건물 그 자체
3동으로 가는데, '인터섹션' 전시관이 먼저 반긴다. 이곳의 주인공은 15세기 대항해 시대 때 꽃 피운 천문학 유물과 그림들이다. 배를 이용해 활발하게 교역했던 당시 상황을 지구본과 책자형 우주지도 등 50점이 넘는 유물들로 살펴볼 수 있다. 이 통로를 지나면 마주하는 3동(7~9 전시실)은 16~18세기 유물들이 차지했다.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아 만들어진 나무 지구본.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아 만들어진 나무 지구본.
아부다비 루브르의 하이라이트는 4동에 있는 10~11전시장이다. "4동 전시장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보다 10~11번 전시장에서 머무는 시간이 더 길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기자가 찾은 날에도 4동 전시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이 전시장은 산업혁명으로 새로운 영감을 얻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주류를 이룬다. 전시물이 '유물'에서 '작품'으로 바뀌는 지점이다. 모네, 몬드리안부터 피카소와 칼더까지 유명 작가들의 손때가 묻은 작품들로 빼곡하다.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무제'.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무제'.
이러니 관람객들의 발걸음이 느려질 수 밖에. 가장 인기 작품은 '채링 크로스 다리'(1899년) 등 모네의 그림 세 점이었다. 이 작품은 아부다비 루브르가 프랑스 루브르가 아닌 오르세 미술관에서 대여했다.
모네의 1899년작 '채링 크로스 다리'
모네의 1899년작 '채링 크로스 다리'
알렉산더 칼더의 모빌 작품 옆에는 피에트 몬드리안의 유명한 격자 무늬 초상화가 놓여 있다. 이런 작품 배열은 아부다비 루브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 작가를 집중 조명하는 '코스 요리'가 아닌 여러 작가를 맛볼 수 있는 '뷔페' 처럼 유명 작가들을 한데 모은 '미술 편집숍' 스타일이다.

그래서인지 3시간 동안 발품을 팔았는데, 딱히 기억나는 작품이 없다. 관람객뿐 아니라 큐레이터 등 전문가 중 상당수도 이런 평가를 내린다. 유명 작가는 많지만 유명 작품이나 특정 작가를 집중 탐구하는 섹션이 없는 탓이다.
'루브르 2호점'의 주인공은 모네도, 피카소도 아닌 건물 그 자체
그래서 사람들은 아부다비 루브르의 주인공으로 건축물 그 자체를 꼽는다. 달라진 태양의 각도 때문에 지금 눈 앞에 있는 건물은 3시간 전에 봤던 그 건물이 아니었다.
'루브르 2호점'의 주인공은 모네도, 피카소도 아닌 건물 그 자체
그중 하이라이트는 부서지는 햇살과 8겹의 돔 천장 사이로 들어오는 빛 속에 놓인 로댕의 작품 '기둥 위 걷는 사람'이다.
로댕의 1900년작 '기둥 위 걷는 사람'.
로댕의 1900년작 '기둥 위 걷는 사람'.
누벨의 교묘한 설계 덕분에 중동의 뙤약볕에도 살랑이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지붕을 뚫고 나온 햇빛은 끊임없이 그 모습을 바꾸며 사람들을 홀렸다.

두바이나 아부다비에 갔다면 들를 만한 미술관이다. 건축물을 가까이서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입장료는 뽑는다. 입장료는 1인당 42디르함, 한화로 약 2만2000원.

아부다비=최지희 기자 myma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