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카모토의 마지막 이야기 "젊은 날의 나, 망나니였다" [책마을]
JIRO KONAMI


<나는 몇 번이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는 일본 잡지 '신초'에 지난해 7월부터 올 2월까지 류이치 사카모토가 연재한 글을 중심으로 출간됐다. 마지막 원고가 잡지에 게재된 다음달인 2023년 3월, 그는 직장암으로 별세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현대 음악계를 풍미했던 천재의 예술에 대한 천착을 담은 철학서인 동시에, 10년 가까이 암과 싸우며 각종 작품을 탄생시킨 습작 노트이기도 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노(老)대가의 투병기다.
사카모토의 마지막 이야기 "젊은 날의 나, 망나니였다" [책마을]
책 표지의 낡은 피아노는 제작된지 100년이 넘은 제품을 구입해 사카모토가 자신의 뉴욕 자택 뜰에 놓아둔 것이다. 여기서 그는 "이대로 어떻게 썩어갈 것인가. 인간이 어떻게 나이 먹어가야 하는가"를 느꼈다. 이처럼 책에선 다가오는 죽음을 응시하는 스산함이 시종 느껴진다. 책 제목은 자신이 영화 음악을 맡았던 '마지막 사랑'의 대사에서 따왔다. "인간은 자신의 죽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인생을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보름달을 바라볼 수 있을까? 기껏해야 스무번 정도 아닐까. 그러나 사람들은 기회가 무한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사카모토는 삶의 지평 끝까지 충실하게 채워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별세 두 달 전에 마지막 앨범 '12'를 내고, 중국 청두에서 열릴 설치 음악 전시회를 기획하고 있었다. 코로나19로 직접 문병할 수 없는 배우자와 병실 창문 밖으로 잠깐 인사를 나누는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긍정적인 삶의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국과의 작지 않은 인연도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는 백남준과 이우환 화백을 존경했고, 방탄소년단 슈가와의 인상적인 만남도 책에 남겼다. 말년에 '미스터 선샤인' 등 한국 드라마에 빠졌던 사카모토는, 장시간 수술의 후유증으로 섬망에 빠져 자신이 한국 지방도시의 작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고 착각하기도 한다.

사카모토의 팬이라면, 현대 예술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한 책이다. 한국인에게 친숙하지 않은 일본 예술인과 일본 내 공연에 대한 서술은 건너뛰면서라도 가능한 끝까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사카모토는 22세에 이미 일본 내에서 인정 받는 음악가가 됐고, 35세가 되던 1987년엔 영화 '마지막 황제'의 OST로 오스카상과 그래미 상을 수상했다.
사카모토의 마지막 이야기 "젊은 날의 나, 망나니였다" [책마을]
그는 패션 모델로 런웨이에 설 정도로 수려한 외모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1983년 배우로 출연한 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에선 절정의 미모를 과시하던 데이빗 보위에 뒤지지 않는다. 여기서 영화 음악을 내놓은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는 가장 유명한 곡이 됐다.

사실상 한평생을 천재로, 유명인으로 산 것이다. 하지만 책에서 사카모토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며 "망나니 같았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슈베르트를 비롯해 과거에는 싫어했던 작곡가와 음악에 다시 애정을 쏟으며 나이가 들며 바뀌는 스스로를 받아들인다.

"환갑을 넘기고, 큰 병을 앓고, 속세의 욕망에 휘둘리지 않는 청빈한 상태가 되었기 때문에 비로소 자신이 올라야할 산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겠죠. 큰 나선을 그리듯 빙 돌아 원점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한때는 영화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아 기회만 주어진다면 전부 자신의 것으로 바꾸고 싶었다는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점 변화로 흥미롭다. 감독이 '영화에 등장하는 소품처럼 음악을 바라봤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비슷한 영화의 음악을 일부러 평범하게 작곡하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자신만의 식견도 보여준다. 실험적인 음악을 추구해 전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스스로는 이를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것을 전복하는 것이 전위지만, 지금은 모두가 공유하는 '기존'이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인만큼 전위도 성립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영화의 개봉과 관련된 생각도 흥미롭다. "어차피 관객의 입장에서는 개봉이 언제가 되든 처음 보는 작품인데, 완성 후 얼른 세상에 내놓지 않으면 작품의 기세가 약해진다고 할까. 뭔가 시들해지고 맙니다. 마치 가지처럼요."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2001년 국내에 출간된 사카모토의 피아노 악보집을 펼쳐 오랜만에 몇 곡을 연주해봤다. 'BTTB(back to the basic)' 앨범이 나온 직후 출간된 악보집인만큼 대부분은 BTTB 수록곡으로 채워져 있다.

'오퍼스(opus)', '소나티네(sonatine)', '에너지 플로우(energy flow)', '아쿠아(aqua)'… 한국에는 '레인(rain)' 등 비장하게 마음을 때리는 음악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곡 상당수는 소박하고 절제된 감정을 담고 있다.

그중에는 책을 읽던 내내 머릿 속에 흘렀던 곡도 있었다. '풋 유어 핸즈 업(put your hands up). 죽음을 앞두고도 끝까지 삶과 주변 사람을 애정이 담긴 눈으로 바라봤던, 예술가의 소박한 기쁨이 독서를 통해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노경목 기자 autonom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