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장 칼럼] 한전을 위한 변명
한여름 헤어드라이어를 작동하면 집안 전체의 전등이 깜빡인다. 가끔 집안 전체의 전기가 나가기도 한다. 미국 가정집에서 살아본 사람은 종종 겪는 일이다. 일본 도시를 방문하는 서양인들은 거리 모습을 연신 사진에 담는다. 물어보면 나무로 만든 전신주가 줄지어 있는 거리의 풍경이 이국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골이라도 전력 공급이 원활하고, 웬만해선 전신주 대신 송전선을 땅에 묻는(지중화) 한국에서는 미·일의 이런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1년 정전시간 韓 9분, 美 44분

요금 얘기는 잠시 뒤로하고 한국의 전기 품질만 얘기해보자. 한국의 전력 서비스 품질은 매우 우수하다. 독점임에도 그렇다. 일단 정전이 거의 없다. 정전이 나면 주요 뉴스로 취급된다. 지난해 한국의 가구당 정전시간은 평균 9분이다. 사고가 아니라 작업 시 정전도 포함한 수치다. 선진국은 이보다 훨씬 길다. 프랑스 49분, 미국 44분, 영국 38분이다. 매년 한 시간 가까이 정전된다는 얘기다. 기술 강국인 독일(13분)과 대만(16분), 일본(7분)이 한국과 비슷하다.

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는 전선을 타고 가정과 상가, 회사, 공장으로 간다. 이 과정에서 전력이 손실된다. 독일은 송배전 손실률이 13.3%에 달하지만, 한국은 3.5%로 주요 국가 중에서 가장 낮다. 인도는 이 수치가 주별로 30~50%를 왔다 갔다 한다. 미국과 영국, 일본은 4~9%다.

올 들어 한국전력이 연일 두들겨 맞고 있다. 그 이유는 서비스나 품질 문제가 아니다. 비판의 중심엔 누적 적자만 44조원에 이르는 재무 상태가 있다. 그래서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한다면 한전이 스스로 책임지라는 논리다.

한전 적자가 심한 이유는 간단하다. 원가보다 싸게 팔아서다. 한전은 전기를 지난 1~2월 ㎾h당 165.6원에 사서 149.7원에 팔았다. 팔 때마다 손해다. 비싸게 산 건 코로나 기간 국제 유가가 폭등해서다. 이 시기 인건비 등 부대비용도 뛰었다. 비슷한 시기인 2021~2022년 영국과 스페인의 전기요금은 각각 149%, 340% 올랐다.

그런데도 한전은 가격을 올리지 못했다. 한국에서 전기요금은 정부가 결정한다. 대규모 적자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승일 전 한전 사장은 “그동안 정부에 전기요금 인상을 10번이나 건의했다”고 했다. 원가는 오르는데 가격을 통제하면 어느 기업이든 망한다. ‘맨날 농땡이 부리면서 고액 연봉을 받아 가는 공기업 직원’이란 허상 탓이 아니란 얘기다. 한국에선 민원이 무서워 작업자들이 전기 공사할 때도 전력을 차단하지 않고 생명을 걸곤 한다.

비싸게 사서 싸게 팔라는 요구

이런 한전이 3분기엔 1조원 이상 흑자로 전환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그사이 바뀐 건 하나밖에 없다. 국제 유가가 소폭 떨어지긴 했지만 지난 5월 전기요금을 ㎾h당 8원 올린 게 가장 크다. 직원 월급을 깎지도 않았고,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하지도 않았다. 자산 매각 계획을 발표했지만 당장의 실적과는 무관하다. 앞으로 다가올 ‘모든 걸 충전해야 하는 시대’에 유일한 전력 공급자인 한전의 역할은 더 커질 것이다. 한전에 대한 잘못된 비난은 국민에게 부메랑이 될 수 있다. 전기료 결정은 시장에 맡기고 한전을 그냥 내버려두는 게 차라리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