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 포기한 아들, 아버지가 남긴 생명보험금 받을 수 있을까
“생명보험은 아버지와 계약한 보험사가 지급하는 것”
대법원, 증여나 상속의 대상 아닌 ‘고유재산’으로 판단
제삼자가 받으면 상속재산이지만 보험금 타갈 수는 있어
외아들인 A씨는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었다. A씨의 아버지는 사업을 하다 무리하게 대출을 받는 바람에 수억 원의 빚을 남겼다. 빚을 감당할 수 없었던 A씨는 상속을 포기했다. 얼마 후 A씨는 아버지가 10억원 상당의 생명보험에 가입했고 자신을 수익자로 정해놨음을 알게 됐다.

A씨와 같은 상속인(상속을 받는 사람)은 피상속인(상속을 주는 사람)의 부채가 자산보다 많다면 고민에 빠지게 된다. 상속을 아예 포기하거나 일부 빚만 물려받는 한정승인을 선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법원에선 이런 경우에도 생명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해왔다.

생명보험은 고유재산”…상속 포기해도 수령 가능

A씨가 생명 보험금을 수령할 수 있는지는 생명 보험금을 고유재산으로 볼 것인지 상속재산으로 볼 것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고유재산이란 상속인이 원래부터 가진 재산을 말한다. 반면 상속재산은 피상속인의 재산을 의미한다. 생명 보험금이 상속재산으로 분류되면 A씨는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없음.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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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대법원은 생명 보험금이 고유재산에 속한다고 판단해왔다. 생명보험은 피상속인과 보험계약을 맺은 보험사가 상속인에게 지급하는 것이므로 증여나 상속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A씨 역시 아버지가 보험 계약을 맺은 시점부터 보험금을 청구할 수 있는 별개의 권리를 갖게 됐다고 봐야 한다. 상속을 포기한 것은 보험금을 받는 데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대법원은 2004년 7월 "상속인이 보험금을 청구할 권리는 보험 계약의 효력으로 생기는 것으로 상속재산이 아니라 상속인의 고유재산"이라고 판시했다(2003다29463).

보험 수익자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적혀있지 않았더라도 A씨는 보험금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대법원은 2001년 12월 "생명보험 계약자가 자신이 사망한 경우 '상속인'이라고만 지정한 상태에서 보험사고가 발생한 경우 보험금 청구권은 상속인들의 고유재산으로 본다"는 취지의 판결(2000다31502)을 내렸다.

억대 빚 상속 고민할 때, 내연녀는 보험금 12억 타가

사망한 남편이 내연녀에게 12억원대 생명 보험금을 받아 갈 권리를 주고 아내에게는 예금보다 많은 빚을 물려줬음에도, 아내가 내연녀가 수령한 생명 보험금을 유류분으로 받아 가지 못한 사례도 있다. 보험금이 상속재산임은 인정됐지만, 유류분은 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와서다.

의사 B씨는 아내 C씨와 1997년 결혼했다. B씨는 결혼생활 중 내연녀인 D씨를 만나면서 C씨에게 이혼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부부의 관계가 파탄 나는 데 원인을 제공한 쪽이 요구한 이혼이었기 때문에 법원에선 B씨의 이혼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C씨와 혼인 상태를 유지한 채로 내연녀를 만나던 B씨는 2017년 1월 사망했다. B씨와 C씨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기에 C씨가 상속인이 되었다. 그런데 B씨가 12억8000만원의 생명 보험금을 받아 갈 사람을 내연녀 D씨로 변경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보험계약에 따라 D씨가 보험금 전액을 받아 간 반면, B씨가 남긴 빚(5억7000만원)이 예금(2억3000만원)보다 많았던 C씨는 한정승인을 신청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자 C씨는 2017년 12월 "D씨가 받은 보험금은 유류분을 산정하는 기초재산에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제기했다. 현행 민법상 배우자와 직계비속(자녀 등)은 법정상속분의 2분의 1을, 직계존속(부모 등)과 형제자매는 법정상속분의 3분의 1을 유류분으로 보장받고 있다. 피상속인이 “가족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재산을 모두 물려주겠다”고 유언을 남겨도 상속인은 법으로 보장된 유류분만큼은 받을 수 있다.
사진은 기사와 관계없음. 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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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씨는 대법원까지 간 법정 다툼 끝에 D씨가 받은 보험금이 상속재산임을 인정받았다. 대법원은 지난해 8월 "피상속인이 보험수익자로 지정한 제삼자가 생명 보험금을 받아 간 경우, 피상속인은 제삼자에게 유류분 산정의 기초재산에 포함되는 증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보험금을 유류분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제삼자를 상대로 한 증여를 유류분으로 인정할 수 있는 법적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서다. 민법 제1114조에 따르면 상속이 이뤄진 시점보다 최장 1년 전에 증여했거나 유류분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 손해를 입힐 것을 알고도 증여했을 때 제삼자를 대상으로 한 증여를 유류분으로 인정할 수 있다.

B씨는 생명보험 수익자를 D씨로 변경한 뒤 1년이 넘어서 사망했다. 상속이 증여가 이뤄진 지 1년이 넘어 이뤄진 것이다. 대법원은 "의사인 B씨의 직업과 예상 소득을 고려하면 B씨가 C씨의 유류분을 침해할 것을 알고서 D씨에게 생명 보험금을 받게 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박시온 기자 ushire908@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