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고기 맘껏 먹고 싶다'던 중학생, 삼성전자 사장이 되다
<일은 무엇인가>를 출간한 고동진 삼성전자 고문이 19일 서울 신사동 민음사 본사에서 책 집필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책상 위 휴대폰을 치워야겠다'는 기자의 말에 고 고문은 "(제 직장 생활의 결실인 갤럭시니까) 오히려 함께 찍어야 한다"며 웃었다. 사진=강은구 기자

인터뷰 약속은 오전 10시였다. 20분 전인 9시 40분, 고동진 삼성전자 고문(전 무선사업부 사장)이 문을 열고 인터뷰 장소에 들어섰다. 2주간의 미국 일정을 마치고 전날 한국에 돌아온 그는 이날 아침도 "50분간 땀을 뻘뻘 흘리며 실내 자전거를 타고 왔다"며 웃었다. "시간 관리를 철저히 하기를 바란다" "건강에 투자하라" 등 그가 최근 출간한 책 <일이란 무엇인가>에서 후배 직장인들에게 건넨 조언을 여전히 실천하고 있었다.

책 출간을 계기로 고 고문을 19일 서울 신사동 민음사 본사에서 만났다. 그는 "이 책을 읽은 젊은이들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연락해오기를 기대한다"며 "많이 읽히기보다는 오래 읽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출간 1주일 만에 1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 책이 '꾸준히 읽히는 직장 생활 지침서'가 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고 고문은 1984년 삼성전자 평사원으로 입사해 대표 자리까지 오른 '직장인의 롤모델'이다. 38년간 유럽 연구소장, 상품기획팀장, 기술전략팀장, 개발실장, 무선사업부장(사장), IM부문장과 대표를 역임한 후 현재 고문으로 재직 중이다.

그런 그가 직장인 후배들을 위해 멘토로 나섰다. <일이란 무엇인가>의 부제는 '오직 일로 성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질문'. 책은 33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돼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 후배 직원들이 그에게 물었던 질문들이다. 그는 삼성전자 사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사내 소통을 위해 2019년 초부터 매년 1~2회 사내 메일을 보내고 2021년부터는 신입사원과 점심을 함께 하며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고 고문은 "직장인은 '회사 노예' '월급 노예' 같은 단어로 폄하될 대상이 아니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들"이라며 "일확천금이 아니라 '일터에서의 성공'을 꿈꾸는 성실한 후배 직장인들을 위해 내가 쌓은 노하우를 나누고 싶었다"고 말했다.
'불고기 맘껏 먹고 싶다'던 중학생, 삼성전자 사장이 되다
<일이란 무엇인가> 마지막 장 친필 원고. 고동진 삼성전자 고문(전 무선사업부 사장)은 컴퓨터 작업에 익숙하지만 일부러 수기로 원고를 쓴 뒤 이를 정리해 책으로 엮었다. 모든 내용을 직접 썼다는 증거 자료인 셈이다. 민음사 제공

그는 "입사 초부터 '사장'이 목표였다"고 했다. 소위 'SKY' 대학을 나오지 못했고,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학교 졸업과 동시에 직장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는 "일터에서의 성공이 곧 가족을 위한 길"이었기 때문이다. 중학생때 그의 꿈은 '내 나이 마흔이 되면 점심때 언제든 불고기 백반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결혼 후 아내에게는 "50대 이후에는 적어도 돈 걱정 없이 살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절박했기 때문에 하루하루 허투로 보낼 수가 없었다. 주말, 밤낮 없이 일했다. 사무실 칠판 정리 같은 '잡일'조차 불평하지 않았다. '회사 일은 내 일'이라고 생각했다. 명절 선물을 챙기는 업무를 할 때면 '언젠가 사장이 되려면 회사에서 나가는 선물 규모도 알아야지' 생각했다.

물론 시행착오를 겪지 않은 건 아니다. 처음엔 그저 '열심히'만 했다. 입사 초반 연구소 이삿날, 그는 온몸에 먼지를 뒤집어쓰며 최선을 다해 짐 싸는 일을 도왔다. 그런데 내내 보이지 않던 입사 동기 한 명이 점심시간에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하고 뽀얀 얼굴로 식당에 나타났다. "위에서 일본 자료 번역을 시켜서, 그거 하고 내려왔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회식 자리 소장은 고 고문에게 술을 따라주며 굳은 얼굴로 "입사할 때 기대가 많았는데… 아직 뭐가 잘 안되나?" 물었다. 회사에서 중요한 건 성실함이 아니었다. 성과였다. 목표를 다잡고 어학 공부를 시작했다.

"입사 초반 그 당시 버스 막차가 밤 10시 15분이었어요. 야근을 한 뒤 막차 타고 집에 돌아가면 손만 씻고 책상 앞에 앉아 외국어 공부를 했어요.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면 쉬고 싶고, 누우면 TV나 켤 테니까요. 글로벌 업무를 위해 어학 실력은 필수라고 생각했죠."

그는 이후 그냥 열심히만 하지 않았다. 매년 말 사업 보고서를 쓰듯 구체적 목표를 적어보고 스스로 성적을 매겼다. 매일 저녁 퇴근 전에 '내일 할 일 목록(to do list)'를 적고 하루 뒤 달성률을 확인했다.

고 고문은 "삼성전자는 그 당시에 6개월마다 인사평가를 했는데, 입사 첫 해에 'C'를 받았는데 1년차 말부터는 'A'를 받기 시작했다"며 "목표는 'O달 안에 일본어 자격증 O급을 딴다'처럼 구체적이고 정량적(countable)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나태해지면 남대문 시장에 가서 직업인들의 치열함을 되새겼고, 주식 투자 대신에 월급을 늘리는 데 투자했다. 물론 당시의 재테크 환경과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그가 저축을 강조하는 건 "목돈이라는 스스로의 경제적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는 과정을 경험해보기를 권하기 때문"이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외치는 시대. 일터에서 성공하라는 그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할까. 고 고문은 "모든 사람에게 저처럼 살라는 게 아니다"며 "다만 제게 워라밸은 목표 달성을 위해 일과 삶을 모두 투여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결국 워라밸의 균형점도 남이 아니라 내 기준에 맞춰 결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고 고문은 한눈팔 시간조차 아꼈다. 이직을 권유하는 다른 회사의 스카우트 메일이 들어오면 망설임 없이 인사팀에 포워딩했다. '다른 회사가 내 사내 메일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메일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도 지난 38년 직장 생활을 돌이킬 때는 아쉬운 부분이 있다. 바로 일에 몰두하느라 건강 관리를 소홀히 했다는 점. 고 고문은 "2006년 쓰러진 뒤 왼쪽 귀의 청력을 잃었고, 무리한 끝에 해외 출장에서 난생 처음 늦잠을 자서 모두를 놀래킨 적도 있다"며 "그 뒤로는 출장 중에도 산책이나 휴식 시간을 확보한다"고 했다. 그는 후배들을 향해 "매달 월급의 10%는 몸과 마음의 건강에 투자하라"고 조언한다.

'독서' 역시 그가 강조하는 습관이다. 그는 과거 민음사에서 나온 <정조 평전>을 읽고 오타를 출판사에 제보했을 정도로 성실한 독자다. 책도 대충 읽지 않는다. 한 인물에 대해 쓴 여러 나라 저자의 책을 비교하면서 읽거나, 같은 시기를 다룬 세계사, 한국사, 동아시아사 등을 함께 살펴보며 각 지역 역사의 인과관계를 나름대로 추론해본다.

고 고문은 "직장인이 어느 정도의 연차가 되면 상상력이란 덕목이 요구된다"며 "늘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해보고 그를 대비하는 훈련이 필요한데, 그때 독서, 특히 역사서가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가 일생일대의 위기로 꼽았던 '갤럭시 노트7' 단종 사태 당시에도 그는 '최악 중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상상했다. 갤럭시 노트7 출시 후 배터리 폭발이 줄을 잇자 회사와 그의 입지가 위협받았다. 그는 배터리 결함을 인정하고 전제품 리콜과 보상, 단종을 결단했다. 고 고문은 "당시 배터리 교체 이후 또 다시 폭발 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끝없이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그려봤다"고 말했다.

평소에 현장을 자주 찾아 '위기 극복의 단서'를 모아두는 건 기본이다. 그는 "제 아무리 천재라도 책상만 지켜서는 아무 것도 못한다"고 잘라 말했다. 책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위기를 극복하는 묘안이나 해법은 없다. 위기를 극복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것, 어떻게든 돌파해내는 것 뿐이다.”

이번 책에 담긴 문장들은 각각 1992년생, 1998년생인 두 자녀를 위한 조언이기도 하다.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책을 썼다. 고 고문은 "큰 아들이 어렸을 때는 '아빠 말 들으면 (답답해서) 온몸에 석고를 바른 기분이 든다'고 하더니 직장 생활 시작한 이후 '이제 아빠의 말들이 이해가 된다'고 한다"며 웃었다.

그는 구성원과 회사가 공생하는 조직 문화를 중시한다. 삼성전자 최초로 부하 직원이 상사를 평가하고 동료끼리도 평가하는 '다면평가'를 도입했던 그는 후속편으로 '관리자, 임원들을 위한 조언서'도 집필할 계획이다.

구은서 기자 k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