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벤처캐피털(VC)과 스타트업 창업가들은 대법원 판결에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대법원은 이날 투자자의 사전동의권이 주주들을 차등 대우해 '주주 평등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단한 원심 판결을 파기환송했습니다. 판결이 나오자 VC등 투자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사전동의권이 무효라는 판단이 나왔다면 그동안의 투자계약서를 다시 작성해야 함은 물론이고 투자자 보호 장치가 사라져 자칫 벤처투자 시장이 더욱 침체될 것이란 우려가 나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창업가 입장에서는 사전동의권이 회사 성장의 발목을 잡는 족쇄라는 지적도 종종 나옵니다. 투자자의 사전동의권의 개념과 이번 이슈의 쟁점은 무엇일까요? 한경 긱스(Geeks)가 19일 열린 '투자계약상 경영동의권과 벤처 스타트업의 거버넌스' 포럼에 다녀왔습니다.

"스타트업-VC간 분쟁 일으키는 투자자 사전동의권 손봐야" [긱스플러스]
대법원 "투자자 사전동의권 예외적 인정"
투자자 보호 장치 vs 의사결정 방해하는 걸림돌
"범위 조정 등 손질 필요... 상호 존중해야"
"스타트업-VC간 분쟁 일으키는 투자자 사전동의권 손봐야" [긱스플러스]
"원심이 인용됐다면 벤처투자 시장은 혹한기를 넘어 기나긴 빙하기로 접어들었을 겁니다." (이진석 한국벤처투자 벤처금융연구소장)
"하지만 회사가 성장해갈수록 사전동의권의 범위 역시 조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광열 코드박스 대표)

지난 19일 서울 코엑스 스타트업브랜치에서 열린 '벤처투자 혹한기, 현명하게 헤쳐나가는 법(투자계약상 경영동의권과 벤처 스타트업의 거버넌스)' 포럼에는 온·오프라인으로 230여 명의 창업 생태계 관계자들이 모였다. 지난 13일 나온 대법원의 사전동의권 판결 내용이 향후 스타트업 전반에 미칠 영향과 대비책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였다.

법무법인 미션과 함께 한국벤처투자, 코리아스타트업포럼, 더프론티어가 공동 주최하고 한국무역협회가 후원한 이날 행사엔 김성훈 미션 대표변호사를 비롯해 김초연 빅베이슨캐피탈 심사역, 홍남호 오프라이트 대표, 옥다혜 미션 변호사, 이진석 한국벤처투자 벤처금융연구소장, 서광열 코드박스 대표, 전석철 S&S인베스트먼트 전무 등이 무대에 올랐다.
"스타트업-VC간 분쟁 일으키는 투자자 사전동의권 손봐야" [긱스플러스]

투자자 "사전동의권은 방어 조항"


사전동의권은 정관변경부터 자본금 변경, 스톡옵션 부여, 자회사 설립이나 영업양수도, 임직원 급여 인상 등 회사의 주요 경영 사항을 시행하기 전에 주주들의 동의를 받도록 하는 제도다. 피투자사가 이를 어기면 위약벌을 내거나, 투자자가 풋옵션(주식매수청구권)을 행사할 경우 기껏 받은 벤처투자금을 그대로 돌려줘야 한다.

그동안 사전동의권은 스타트업 투자계약의 단골조항으로 여겨져 왔다. 재무제표가 투명하게 공개되고 주요 경영활동이 공시되는 데다가 외감을 받는 상장사와는 달리 비상장 스타트업의 경우 이를 알 수 있는 경로가 한정돼 있다. 이 탓에 사전동의권이 VC 등 투자자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로 인식됐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닷컴 버블'이 일었을 때 벤처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한 뒤 이를 횡령하거나 남용하는 등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자 이후 투자계약서에 사전동의권 조항을 넣는 것이 관행이 됐다.

하지만 이런 인식은 몇 년 전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2019년 디스플레이 제조사 뉴옵틱스는 클라우드 회사 틸론을 상대로 상환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투자금 20억원을 반환하고 위약벌 20억원을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전말은 이렇다. 2016년 뉴옵틱스는 틸론이 발행한 상환전환우선주(RCPS) 20만주를 주당 1만원에 인수해 지분 5.27%를 보유한 주주가 됐다. 이 때 투자계약서에는 향후 틸론이 신주를 발행할 경우 뉴옵틱스의 사전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이후 2018년 틸론은 뉴옵틱스의 사전동의를 받지 않은 채 농심캐피탈로부터 20억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이후 한 차례 더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도 동의절차를 진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불거진 소송에서는 원고 측인 뉴옵틱스에 1심 승소 판결이 내려졌다. 틸론이 계약상 의무를 위반했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하지만 법원은 2심에서 피고 측인 틸론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사전동의권이 주주 평등의 원칙을 위반했기에 무효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사전동의권 조항이 원고 측에 다른 주주와는 다른 우월한 권리를 부여하고 원고의 투하자본 회수를 절대적으로 보장하는 등 주주평등 원칙을 위반해 무효이고, 원고에 대한 사전 통지 의무 위반 부분만으로는 위반의 정도가 경미하다"고 판단했다.

2심에서 판결이 뒤집히자 벤처투자업계에는 긴장감이 맴돌았다. 판결이 이대로 확정될 경우 그동안 작성했던 투자계약서를 모두 고쳐야 하고, 향후 투자 실무에도 후폭풍이 올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대법원은 원심을 다시 뒤집고 원고 측의 승소로 판결했다.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사전동의권을 갖는 약정이 일부 주주에게 우월한 권리나 이익을 부여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피고 회사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차등적 취급을 정당화할 수 있는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스타트업-VC간 분쟁 일으키는 투자자 사전동의권 손봐야" [긱스플러스]

스타트업 "의사 결정 지연시키는 주범"


대법원 판결로 투자자들은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사전동의권의 범위와 효력에 대한 논란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비슷한 소송이 발생하거나 스타트업 창업자와 투자자간 분쟁이 더욱 심하게 불거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19일 열린 포럼에서 김성훈 미션 대표변호사는 스타트업 투자 유치 과정을 '배'에 비유했다. 흔히 투자자와 창업자가 '한 배에 올라탄다'는 것에 빗댄 말이다. 김 변호사는 "선장이 손님을 일등석에 모시려고 했는데, 손님이 선장실로 들어와 키를 '이쪽 저쪽으로 돌리라'고 조언하는 셈
"이라며 "서로 좋은 마음을 가지더라도 갈등이 생길 여지가 있는 구조"라고 설명했다.

스타트업 대표는 투자자와는 또 다른 고민을 갖고 있다. 투자자들에게 사전동의권이 방어 조항으로 존재하지만,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의사결정을 지연시키는 걸림돌일 수도 있다. 김 변호사는 "시리즈B 이상 단계가 되면 기관 투자자가 10곳을 넘어가는 경우도 많이 생기는데,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주를 일일이 찾아 설득하는 과정을 거치는 건 속도가 생명인 스타트업에는 치명적"이라며 "투자사 9곳이 동의해도 10번째 투자사가 거부하면 스타트업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이어 "거버넌스 관점에서 보면 사전동의권은 '동의권'이 아닌 '거부권'에 가깝다"고 덧붙였다.

서광열 코드박스 대표도 "초기 스타트업 대표라면 경영에 미숙한 경우가 많아 사전동의권이 적절한 통제수단으로 작용할 수도 있지만, 이는 투자 라운드가 후기로 넘어갈수록 족쇄로 작용한다"며 "예를 들어 중후기 스타트업에서 직원들에게 부여하는 스톡옵션 행사 가격 하나를 결정할 때도 일일이 투자자를 설득해야하는 건 과도한 처사"라고 지적했다.
"스타트업-VC간 분쟁 일으키는 투자자 사전동의권 손봐야" [긱스플러스]

"범위 조정 등 동의권 조항 손봐야"


전문가들은 사전동의권 제도를 적절히 손질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우선 사전동의권의 범위를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통상 투자계약서상 사전동의권 조항은 10개가 넘는데, 과도하게 넓은 범위에 간섭하는 조항들을 삭제해 스타트업의 경영 어려움을 덜어줘야 한다는 의미다. 서광열 대표는 "실제로 시리즈B 투자 라운드에서는 VC와 협의를 통해 시리즈A 때 삽입한 사전동의권 조항을 대부분 삭제한 바 있다"며 "국내에서도 투자자와 대표끼리 합의가 가능한 사항인 만큼 이런 사례들이 더 늘어나면 좋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투자자 간 개별 계약서가 아닌, 투자 라운드별 계약서를 작성하자는 의견도 제시됐다. 미국에서는 이미 시행되고 있는 관행이다. 클럽딜 형태로 한 라운드에 다수 투자자들이 들어오더라도 계약서를 하나만 작성하는 식이다. 이 경우 사전동의권 조항은 투자자들 지분의 과반 이상이 동의하면 모두 동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모든 주주들을 일일이 설득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무엇보다 중요한 건 투자자와 대표가 서로 존중하고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데 있다는 점에도 동의했다. 전석철 S&S인베스트먼트 전무는 "창업자가 자본시장에서 갖춰야 할 전문성을 길러주면서 기업공개(IPO)라는 긴 여정까지 함께하며 '합'을 맞춰가는 게 VC의 역할"이라며 "창업자의 경영을 존중하면서도 주주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선을 찾아가야 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김성훈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사전동의권을 무조건 허용한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통상 투자계약서에는 투자자가 일정 지분 이상을 제3자에게 양도할 경우 권리도 승계되는 조항이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가 지분을 경쟁사에게 매도하거나, 작은 단위로 쪼개 여러 명에게 매도한다면 동의권 조항이 남용될 여지가 있다. 하지만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제3자가 지분을 양수받더라도 같은 지위가 승계되지 않는다고 봤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은 이런 조항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영동의권의 효력에 새로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사안인 만큼 앞으로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우 기자 jong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