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돌 하나에 웃음, 벽돌 하나에 추억…제주도 간 물개커피, 백록회관 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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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의 감각
프릳츠 제주성산점
붉은 벽돌과 바다 닮은 푸르른 기와
오래 된 다방에 대한 동경 담은 가구
조금은 투박한 찻잔 하나하나까지
30년 전 흔적 고스란히 담아내
프릳츠 제주성산점
붉은 벽돌과 바다 닮은 푸르른 기와
오래 된 다방에 대한 동경 담은 가구
조금은 투박한 찻잔 하나하나까지
30년 전 흔적 고스란히 담아내
‘백록회관’은 성산일출봉을 마주 본 대로변에 지평선을 따라 낮고 넓게 지어졌다. 붉은 벽돌과 바다를 닮은 푸르른 기와를 얹은 지붕은 이 건물이 지어진 1992년도에는 흔하게 볼 수 있던 주택을 닮았다. 1970년대부터 서울을 비롯한 여느 도시의 골목에는 이처럼 붉은 벽돌을 쌓은 집이 빠르게 보급됐는데, 양옥을 어설프게 흉내 내서인지 ‘불란서 주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누가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프랑스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 새로운 양식의 주택은 1992년 1기 신도시 계획에 따른 아파트 보급이 이뤄지기까지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보금자리 형태로 자리 잡았다.
백록회관은 일반적인 불란서 주택과 다르게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기반으로 했지만, 외형은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 붉은색 벽돌로 둘렀다. 그 외에 팔(八)자형 지붕과 파란 기와, 2층 구조 등은 어김없이 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이후 증축까지 이뤄 280석 규모로 크기를 키운 이 백록회관은 전복회, 갈치, 옥돔 등 각종 제주산 해산물을 파는 식당이자 동네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는 회관의 역할을 해왔다. 지금이야 연간 1400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이지만, 백록회관이 문을 연 당시는 이제 막 제주공항이 여객터미널을 확장한 때로 관광객 수가 지금의 4분의 1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곳이 식당이면서도 마을 회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주민들의 회상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불란서 주택과 벽돌을 쌓아 만든 빌라들은 콘크리트 내력벽에 화강석 타일을 붙인 필로티 구조의 신식 주택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벽돌집을 이상적인 보금자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어느 골목 비탈길에 겨우 살아남은 몇 개의 벽돌집은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촌스러운 건축 양식으로 여겨졌다. 백록회관도 마땅히 어떤 시대의 양식을 특정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본래의 주인이 새로운 건물로 이주하자 공실이 돼 짜디짠 바닷바람에 잊혀지고 있었다.
그 흔적에 귀를 기울인 것은 프릳츠였다.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건물을 지을 때는 누군가의 고민이 벽돌처럼 쌓였을 것이다. 그 고민에는 당대의 어떤 유행과 분위기와 풍토가 유전자처럼 녹아 있었다. 문헌학자 김시덕은 지층(地層)이라는 단어에 착안해 시층(時層)이라는 말을 썼다. 프릳츠는 줄곧 그 시간의 지층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 도화동 첫 번째 매장과 양재동 세 번째 매장은 시층에 귀를 기울인 결과물이었다. 당대의 건축물을 최대한 존중해 매장을 꾸렸다. 시층을 탐구하는 일은 수십 년 전의 짧은 과거부터 수백 년 전의 오래된 과거까지 이어졌다. 프릳츠의 브랜딩을 담당하는 김병기 대표는 “일종의 신토불이처럼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책가도와 청자 무늬부터 엽차잔까지 그는 지나간 모든 한국의 시층에서 프릳츠를 채워갈 요소를 찾아냈다. 잊혀 가는 백록회관을 찾아낸 프릳츠의 구성원들은 그 오래된 건물에 둥지를 틀 준비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이 시층을 발굴하는 고매한 학자의 마음으로 최대한 그것의 원형이 빛을 내도록 외관을 꾸렸다. 건물 내부는 상당 부분이 철거됐으니 살릴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되, 바에서 일하는 바리스타와 제빵사 그리고 매장을 찾은 손님들을 고려해 꼼꼼히 손을 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제주 매장의 바 설계를 담당한 박근하 프릳츠 대표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손님을 마주할 바리스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과 동시에 프릳츠의 지향점이 드러나도록 동선을 짰다. 여느 프릳츠의 바와 같이 바와 손님 동선이 섞일 수 있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으니, 프릳츠가 주목한 또 다른 시층이 보인다. 오래된 다방에 대한 동경이 담긴 가구는 어디서 본 듯한 조금은 투박한 형태를 지녔다. 가구마다 달린 프릳츠 로고가 담긴 작은 태그에는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 낸 공간과 콘텐츠에 모두가 공감하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이 담겨 있다.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유행에서 벗어난 가구와 소품을 통해 프릳츠는 조금 과장해서라도 과거의 흔적을 공유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자 한다. 다시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 창가에 가져가면 호젓한 성산일출봉의 모습이 보인다. 가장 오래된 지층이자 시층이 보이는 순간 공간은 비로소 완성된다.
왜 제주를 선택했냐는 물음에 김 대표는 제주가 아닌 어떤 곳도 괜찮다는 답변을 해줬다. 프릳츠는 함께하는 구성원의 것이며, 그들 모두가 기술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때로는 그들이 커피를 구입하는 농장과의 관계가, 다양한 브랜드 협업을 통한 외부와의 관계가, 매장을 찾은 손님들과의 관계가 확장한다.
이번에는 제주로의 확장이 차례였을 뿐이다. 이 확장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 프릳츠의 구성원들은 또 다른 미래를 그릴 것이다. 그들의 성실하고 꾸준한 성장이 부디 무탈하기를 바란다. 시간의 흔적에 귀를 기울이는 프릳츠의 고매한 행위가, 외식 기술자들이 걱정 없이 일터를 누비도록 하는 그들의 이상이 부디 좋은 성과를 얻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 사진=임수지 포토그래퍼·프릳츠커피컴퍼니 제공
백록회관은 일반적인 불란서 주택과 다르게 철근 콘크리트 구조를 기반으로 했지만, 외형은 시대의 분위기를 따라 붉은색 벽돌로 둘렀다. 그 외에 팔(八)자형 지붕과 파란 기와, 2층 구조 등은 어김없이 시대의 양식을 따랐다. 이후 증축까지 이뤄 280석 규모로 크기를 키운 이 백록회관은 전복회, 갈치, 옥돔 등 각종 제주산 해산물을 파는 식당이자 동네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르는 회관의 역할을 해왔다. 지금이야 연간 1400만 명이 다녀가는 관광지이지만, 백록회관이 문을 연 당시는 이제 막 제주공항이 여객터미널을 확장한 때로 관광객 수가 지금의 4분의 1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그곳이 식당이면서도 마을 회관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는 주민들의 회상이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 됐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불란서 주택과 벽돌을 쌓아 만든 빌라들은 콘크리트 내력벽에 화강석 타일을 붙인 필로티 구조의 신식 주택에 밀려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벽돌집을 이상적인 보금자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구불구불한 어느 골목 비탈길에 겨우 살아남은 몇 개의 벽돌집은 시대의 흐름에서 벗어난 촌스러운 건축 양식으로 여겨졌다. 백록회관도 마땅히 어떤 시대의 양식을 특정하지 못한 채 어정쩡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리고 본래의 주인이 새로운 건물로 이주하자 공실이 돼 짜디짠 바닷바람에 잊혀지고 있었다.
그 흔적에 귀를 기울인 것은 프릳츠였다. 어느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과는 사뭇 다르지만, 그 건물을 지을 때는 누군가의 고민이 벽돌처럼 쌓였을 것이다. 그 고민에는 당대의 어떤 유행과 분위기와 풍토가 유전자처럼 녹아 있었다. 문헌학자 김시덕은 지층(地層)이라는 단어에 착안해 시층(時層)이라는 말을 썼다. 프릳츠는 줄곧 그 시간의 지층에 귀를 기울였다. 서울 도화동 첫 번째 매장과 양재동 세 번째 매장은 시층에 귀를 기울인 결과물이었다. 당대의 건축물을 최대한 존중해 매장을 꾸렸다. 시층을 탐구하는 일은 수십 년 전의 짧은 과거부터 수백 년 전의 오래된 과거까지 이어졌다. 프릳츠의 브랜딩을 담당하는 김병기 대표는 “일종의 신토불이처럼 한국의 모든 것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책가도와 청자 무늬부터 엽차잔까지 그는 지나간 모든 한국의 시층에서 프릳츠를 채워갈 요소를 찾아냈다. 잊혀 가는 백록회관을 찾아낸 프릳츠의 구성원들은 그 오래된 건물에 둥지를 틀 준비를 시작했다. 여느 때와 같이 시층을 발굴하는 고매한 학자의 마음으로 최대한 그것의 원형이 빛을 내도록 외관을 꾸렸다. 건물 내부는 상당 부분이 철거됐으니 살릴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되, 바에서 일하는 바리스타와 제빵사 그리고 매장을 찾은 손님들을 고려해 꼼꼼히 손을 봤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를 구성하는 일이었다. 제주 매장의 바 설계를 담당한 박근하 프릳츠 대표는 그곳에서 하루 종일 손님을 마주할 바리스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과 동시에 프릳츠의 지향점이 드러나도록 동선을 짰다. 여느 프릳츠의 바와 같이 바와 손님 동선이 섞일 수 있도록 몇 가지 장치를 마련한 것이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자리에 앉으니, 프릳츠가 주목한 또 다른 시층이 보인다. 오래된 다방에 대한 동경이 담긴 가구는 어디서 본 듯한 조금은 투박한 형태를 지녔다. 가구마다 달린 프릳츠 로고가 담긴 작은 태그에는 그들이 공들여 만들어 낸 공간과 콘텐츠에 모두가 공감하기를 바라는 작은 희망이 담겨 있다. 미니멀하고 현대적인 유행에서 벗어난 가구와 소품을 통해 프릳츠는 조금 과장해서라도 과거의 흔적을 공유하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기억하고자 한다. 다시 그 모든 것에서 눈을 돌려 창가에 가져가면 호젓한 성산일출봉의 모습이 보인다. 가장 오래된 지층이자 시층이 보이는 순간 공간은 비로소 완성된다.
왜 제주를 선택했냐는 물음에 김 대표는 제주가 아닌 어떤 곳도 괜찮다는 답변을 해줬다. 프릳츠는 함께하는 구성원의 것이며, 그들 모두가 기술자로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때로는 그들이 커피를 구입하는 농장과의 관계가, 다양한 브랜드 협업을 통한 외부와의 관계가, 매장을 찾은 손님들과의 관계가 확장한다.
이번에는 제주로의 확장이 차례였을 뿐이다. 이 확장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 프릳츠의 구성원들은 또 다른 미래를 그릴 것이다. 그들의 성실하고 꾸준한 성장이 부디 무탈하기를 바란다. 시간의 흔적에 귀를 기울이는 프릳츠의 고매한 행위가, 외식 기술자들이 걱정 없이 일터를 누비도록 하는 그들의 이상이 부디 좋은 성과를 얻기를 바란다.
칼럼니스트 사진=임수지 포토그래퍼·프릳츠커피컴퍼니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