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뒤의 세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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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연수의 듣는 소설
나는 앞에 서 있는 엄마와 아기를 쳐다봤다.
“아까는 이 객차에 우는 아기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건가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가끔 그렇게 조금 뒤의 세계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 대화를 계속해야만 할까 고민했다.
“이상한 말이네요.”
“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시겠죠?”
“네, 조금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마 그쪽 탓은 아닐 거예요. 제 탓이지. 제가 요새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하거든요. 지금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자 그녀는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웃는 건가요?”
“선생님도 뭘 아시는 분인가 싶어서요. 왜, 예술가들은 일반인과는 조금 다르게 현실을 지각하기도 하잖아요. 인상주의나 입체파 화가들의 그림들처럼 말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어떻게요?”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꿈이라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전에 제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신 분이 계셨거든요. 제게는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이셨지요. 그분은 사진을 찍는 분이셨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계속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꿈 같은 현실 속에 있는지. 꿈이라면 곧 깨겠지. 그런 생각으로 깰 때까지는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에게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그 모든 문제는 단 하나의 문제 즉 술로 귀결됐다. 보통 때의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과묵한 사람이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무골호인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건 억지로 써야만 했던 가면에 불과했고, 그런 가면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매일 밤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사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라면 거기 가족과 함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 시절, 집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취해 있을까, 깨어 있을까. 매번 그녀는 집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깨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에게든 부처님에게든,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게든. 하지만 그 나무 아래에서의 상상은, 그러니까 조금 뒤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잡아당기면 힘없이 떨어지던 그 나무의 이파리처럼. 그리고 그 예상은 언제나 적중했다. 조금 뒤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취해 있었고 저녁은 끔찍했다. 그러다 하루는 나뭇잎을 잡아당겼는데, 나뭇잎이 완강히 버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날 저녁만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지 않으리라는, 너무나 분명한 확신이었다. 대문까지 걸어가며 그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취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달리 기도를 하는 대신,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는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의 세계가 펼쳐졌다. 아버지는 TV를 보고 있다가 들어오는 그녀에게 “지연이 왔니?”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작은 승리였다. 눈앞의 그 세계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진실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 뒤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그녀가 그 나무, 그러니까 가시나무의 잎을 잡아당기며 조금 뒤의 세계를 점춰본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뭇잎은 쉽게 떨어지기도 했고, 잘 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술에 취해 있을 때도있었고, 깨어 있을 때도 있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겹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뒤의 세계를 맹렬히 상상했다. 상상한 대로의 세계가 펼쳐지면 그게 아버지가 술에 취한 세계든, 깨어 있는 세계든 모두 받아들였다. 깨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는 자신의 상상하는 힘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 뒤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연습을 하며 중학교 2학년 늦여름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습관처럼 나뭇잎을 잡아 당기는데 누군가 그녀의 왼팔을 낚아챘다. 고개를 돌렸더니 어떤 남자가 씩씩거리고 서 있었다. “드디어 잡았네, 이 녀석”이라고 말하며 그 남자는 그녀를 가시나무에서 떼어냈다. 그는 가시나무 근처 가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남자였다. 가게 앞의 나무에서 자꾸만 잎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남자가 며칠을 두고 지켜보다가 그녀가 매일 나뭇잎을 떼어낸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남자는 그녀가 골목 끝집에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런 짓을 하고 다닌다는 걸 부모님도 아느냐고 말하며 그녀를 집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술 취한 아버지가 그 남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뺨을 치는, 조금 뒤의 세계가 떠올랐다. 빛과 그림자만을 분간하던 어린시절부터 늘 겪어왔기에 너무나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또렷한 미래였다. 그녀는 벌써부터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화가 났다.
“그 순간, ‘그렇지만’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나뭇잎은 떨어지지 않았어.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겠어. 더 좋은 생각을 하겠어. 그렇게 저는 조금 뒤의 세계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과거로부터 떠오르는 것만큼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또렷하게. 그 아저씨가 나를 잡은 손을 놓고 내 이야기를 듣는, 조금 뒤의 세계를. 그리고 그 아저씨는 나를 잡은 손을 놓고 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지요.”
(계속)
“아까는 이 객차에 우는 아기가 없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는 건가요?”
“이상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가끔 그렇게 조금 뒤의 세계가 느껴질 때가 있어요.”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이 대화를 계속해야만 할까 고민했다.
“이상한 말이네요.”
“제가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시겠죠?”
“네, 조금은.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마 그쪽 탓은 아닐 거예요. 제 탓이지. 제가 요새 잠을 못 자서 너무 피곤하거든요. 지금도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요.”
그러자 그녀는 살짝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왜 웃는 건가요?”
“선생님도 뭘 아시는 분인가 싶어서요. 왜, 예술가들은 일반인과는 조금 다르게 현실을 지각하기도 하잖아요. 인상주의나 입체파 화가들의 그림들처럼 말이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어떻게요?”
내가 물었다.
“그러니까 이게 꿈이라고,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오래 전에 제게 그 사실을 가르쳐주신 분이 계셨거든요. 제게는 생명의 은인 같은 분이셨지요. 그분은 사진을 찍는 분이셨어요.”
내가 머뭇거리자 그녀가 계속 말했다. 나는 모든 것을 다 아는 사람처럼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아니면 꿈 같은 현실 속에 있는지. 꿈이라면 곧 깨겠지. 그런 생각으로 깰 때까지는 그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생각했다.
사춘기 시절,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에게는 수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그 모든 문제는 단 하나의 문제 즉 술로 귀결됐다. 보통 때의 아버지는 내성적이고 과묵한 사람이라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무골호인으로 통했다. 하지만 그건 억지로 써야만 했던 가면에 불과했고, 그런 가면을 견딜 수 없다는 듯 매일 밤마다 그는 술에 취해 있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사는 사람처럼 낯설었다. 그런 사람이 아버지라면 거기 가족과 함께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 시절, 집으로 들어가는 길의 초입에는 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그 나무를 지나칠 때마다 그녀는 생각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취해 있을까, 깨어 있을까. 매번 그녀는 집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깨어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하느님에게든 부처님에게든, 그 어떤 초월적인 존재에게든. 하지만 그 나무 아래에서의 상상은, 그러니까 조금 뒤 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 늘 술에 취해 있었다.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잡아당기면 힘없이 떨어지던 그 나무의 이파리처럼. 그리고 그 예상은 언제나 적중했다. 조금 뒤의 세계에서, 아버지는 취해 있었고 저녁은 끔찍했다. 그러다 하루는 나뭇잎을 잡아당겼는데, 나뭇잎이 완강히 버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날 저녁만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지 않으리라는, 너무나 분명한 확신이었다. 대문까지 걸어가며 그녀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오늘은 아버지가 취하지 않았다, 취하지 않은 게 분명하다, 나는 알고 있다, 아버지는 취하지 않았다. 평상시와 달리 기도를 하는 대신, 그렇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몇 분 뒤 문을 열었을 때, 거실에는 자신이 상상했던 그대로의 세계가 펼쳐졌다. 아버지는 TV를 보고 있다가 들어오는 그녀에게 “지연이 왔니?”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작은 승리였다. 눈앞의 그 세계는 자신이 공들여 만든 예술품처럼 느껴졌다. 너무나 진실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
그 뒤로 집에 들어갈 때마다 그녀가 그 나무, 그러니까 가시나무의 잎을 잡아당기며 조금 뒤의 세계를 점춰본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나뭇잎은 쉽게 떨어지기도 했고, 잘 떨어지지 않기도 했다. 아버지 역시 술에 취해 있을 때도있었고, 깨어 있을 때도 있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겹치지 않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조금 뒤의 세계를 맹렬히 상상했다. 상상한 대로의 세계가 펼쳐지면 그게 아버지가 술에 취한 세계든, 깨어 있는 세계든 모두 받아들였다. 깨어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을 때는 자신의 상상하는 힘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 뒤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내려는 연습을 하며 중학교 2학년 늦여름을 보냈다.
그러다가 하루는 습관처럼 나뭇잎을 잡아 당기는데 누군가 그녀의 왼팔을 낚아챘다. 고개를 돌렸더니 어떤 남자가 씩씩거리고 서 있었다. “드디어 잡았네, 이 녀석”이라고 말하며 그 남자는 그녀를 가시나무에서 떼어냈다. 그는 가시나무 근처 가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남자였다. 가게 앞의 나무에서 자꾸만 잎이 떨어져나가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남자가 며칠을 두고 지켜보다가 그녀가 매일 나뭇잎을 떼어낸다는 걸 알아낸 것이다. 남자는 그녀가 골목 끝집에 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이런 짓을 하고 다닌다는 걸 부모님도 아느냐고 말하며 그녀를 집 쪽으로 끌고 갔다. 그녀의 머릿속으로는 술 취한 아버지가 그 남자의 말을 듣고 자신의 뺨을 치는, 조금 뒤의 세계가 떠올랐다. 빛과 그림자만을 분간하던 어린시절부터 늘 겪어왔기에 너무나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또렷한 미래였다. 그녀는 벌써부터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화가 났다.
“그 순간, ‘그렇지만’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나뭇잎은 떨어지지 않았어. 나는 다른 생각을 하겠어. 더 좋은 생각을 하겠어. 그렇게 저는 조금 뒤의 세계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과거로부터 떠오르는 것만큼 구체적이고 분명하고 또렷하게. 그 아저씨가 나를 잡은 손을 놓고 내 이야기를 듣는, 조금 뒤의 세계를. 그리고 그 아저씨는 나를 잡은 손을 놓고 내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