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에게 총을 쏜 '여자 가우디'…'뚱뚱한 나나'로 세상을 치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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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 이겨낸 20세기 현대미술가 니키 드 생팔
“나는 미친 사람들과 함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광기와 치유의 어두운 우주를 발견했고, 내 감정, 두려움, 폭력, 희망, 기쁨을 그림으로 옮기는 법을 배웠다."
트라우마를 예술로 승화한 프랑스계 여성 작가 니키 드 생 팔. 그는 1930년 파리 외곽 뇌이쉬르센에서 태어났다. 미국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 사이에서 5명의 자녀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뉴욕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18세 때 어린 시절 친구였던 시인 해리 매튜와 결혼한 뒤 23세에 심각한 신경쇠약 증세로 정신병원 치료를 받은 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0 차례에 걸친 전기 충격 요법을 받으며 그녀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을 모아 콜라주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보그, 엘르 등의 잡지 패션 모델이었던 그는 1952년부터 본격적으로 예술 활동을 시작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니키는 세계대공황으로 집안이 몰락하며 태어나자마자 미국의 조부모에게 보내졌다. 니키 드 생 팔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건 1960년대 '슈팅 페인팅' 이다. 어린 아이의 동화 속 세계를 현실에 구현해온 그녀는 페인트 주머니에 소총을 쏜 뒤 물감을 피처럼 흘리게 뒀다. 당시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놓고 물감을 뿌리는 것도 논란이 됐던 시기. 그는 “사람들이 그것을 예술이라고 생각하든 말든 나에게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왜 갑자기 총을 쏘게 됐을까. 그것은 평생에 걸친 트라우마에 뿌리가 있다. 그는 10세가 넘어 조부모 손에서 떠나 프랑스로 돌아와 아버지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엄격한 교칙에 적응하지 못해 카톨릭 학교에서 두 번 퇴학을 당했고, 18세 때 결혼했지만 초반부터 남편은 불륜을 일삼았다. 64세가 된 니키는 "나는 아빠를 향해 쏘았다. 모든 남자들, 중요한 인물들, 나의 오빠, 사회, 학교, 수도원, 나의 가족, 나의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나 자신까지도 겨누어 쏘았다"고 회고록 <나의 비밀>을 통해 밝혔다.
그의 예술적 영감을 준 결정적 사건은 1955년 스페인 여행 때다. 당시 가우디의 정원, 파리 현대미술관 등에서 영감을 얻은 그는 1961년 이브 클랭, 세사르, 제라드 데샹 등과 네오 리얼리즘 그룹을 결성했다. 슈팅 페인팅 이후 니키는 둥글고 밝고 경쾌한 작품들을 내놓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곳이 타로 공원(사진 위) 이다. 22장의 타로 카드를 모티브로 한 토스카나의 이 공원은 공사 기간만 20년. 1998년 문을 연 이 공원은 '상처 입은 사람들을 치유해 줄 정신적 쉼터를 만들고 싶다'고 한 염원을 담았다. 구엘 공원에서 가우디에 영감을 받은 그가 44년 만에 꿈을 이룬 곳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이후에도 그는 수 많은 건축 조각들을 남겼다. 토스카나 타로 가든, 캘리포니아 에스코니도에 있는 키트 카슨 공원 등에 자신의 작품을 남겼다. 예루살렘 정부 의뢰로 라비노비치 공원에 어린이를 위한 괴물 '르 골렘'을 의뢰 받아 '괴물 공원'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상처를 보듬은 건 결국 사랑이었다. 그는 키네틱 아트로 유명한 스위스 출신의 장 팅겔리(위의 사진 왼쪽) 와 1971년 두 번째 결혼을 한다. 그의 나이 41세 때였다. 20~30대를 옥죄었던 남편과 아이들을 떠나 오래 품어왔던 유년 시절의 분노, 20대 때의 혼란을 장과의 사랑으로 잠재운다. 니키는 "장을 만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됐고, 더 큰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니키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캐릭터 '나나'는 임신한 친구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 시켰다. 사회가 여성에게 원하는 모습을 깨부순 작품이자 풍만한 몸매로 강렬한 생명력이 느껴지는 여성상을 나나에 투영했다. 니키의 작품 속엔 새와 뱀이 자주 등장한다.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했던 그에게 사랑을 노래하고, 영원을 상징하는 모티브들이다. 파리의 스트라빈스키 광장 앞, 퐁피두센터 맞은 편 분수에는 니키와 남편 장이 함께 만든 합작품 분수대가 서있다. '나나'시리즈는 그에게 성공을 가져다 줬지만, 고통을 안겨주기도 했다. 각종 화학물질로 이뤄진 나나 조각들을 만들며 호흡기 질환을 달고 살았다. 타로 공원을 개장한 지 4년 만인 2002년 폐가 부풀어 오르는 만성 폐기종으로 사망했다. 그는 자서전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안에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창조적 힘이 있다고 믿는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