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인이 다가온다. 장벽 너머의 두 거인은 고압선을 손에 쥔 채 인간이 사는 마을을 바라보고 있다. 이 작품은 신(新)라이프치히 화파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작가 네오 라우흐(Neo Rauch)가 그린 ‘밀어닥침(Zustrom), 2016’이다.
진격의 거인은 송전탑을 따라 마을까지 들이닥쳤다
밀어닥침 Zustrom, oil on canvas, 200×250cm, 2016, Collection Perlmut ©Neo Rauch

네오 라우흐(b.1960)는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 첫돌을 맞기도 전에 기차 사고로 부모를 잃었다. 당시 부모의 나이는 21세와 19세였고 라이프치히 미술대학 학생이었다. 동독의 시골 마을에서 조부모의 손에 자란 네오 라우흐는 미술학도였던 부모의 영향인지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인다. 부모를 떠나보낸 다음 해(1961)에는 베를린에 장벽이 생겼고, 약 30년간 예술마저 정치적 도구로 사용된 동독의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성장했다. 라이프치히 미술대학에서 그는 두 살 연상인 로사 로이(Rosa Loy)를 만났고, 장벽이 무너진 후 이들의 아이가 태어났다.

네오 라우흐가 태어난 라이프치히는 바흐와 바그너, 말러가 활동했던 곳이며 마틴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일어난 곳이다. 그리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실마리를 마련한 첫 번째 시위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오랜 역사를 품은 예술의 도시에서 격동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은 작센인 네오 라우흐. 그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주축인 동독에서 전통적인 사실주의와 초현실주의를 넘나드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바그너 음악축제가 열리는 바이로이트에서는 네오 라우흐에게 축제 기간에 상연할 오페라 무대 디자인을 요청한다. 이미 화가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던 그에게도 바그너란 존재는 영광스럽고도 무거운 주제였다. 그는 오랜 기간 숙고한 뒤 2018년 오페라 로엔그린(Lohengrin)을 새롭게 해석한 대형 걸개그림을 제작했으며, 아내와 협업하여 연극에 쓰이는 의상과 소품들을 디자인했다. ‘밀어닥침, 2016’을 그릴 당시는 그가 로엔그린에 관해 연구하고 있을 시점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그림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의 의상과 소품들에 연극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된 이유를 쉽게 가늠할 수 있다. 바그너가 로엔그린을 처음 발표한 1850년에는 전구가 발명되기 전이기에 이들이 제작한 무대 가운데를 차지한 송전탑은 전통을 중요시하는 클래식 애호가와 비평가 모두를 당황스럽게 한 파격적인 시도라 할 수 있다.

진격의 거인은 송전탑을 따라 마을까지 들이닥쳤다
네오 라우흐와 로사 로이가 디자인한 ‘로엔그린’ 무대, 2018
Das von dem Künstlerpaar Neo Rauch und Rosa Loy gestaltete "Lohengrin"-Bühnenbild in Bayreuth Foto: DPA/Enrico Nawrath/Festspiele Bayreuth
출처: https://www.spiegel.de/kultur/gesellschaft/lohengrin-in-bayreuth-ins-blaue-gezielt-ins-schwarze-getroffen-a-1220259.html


‘밀어닥침(Zustrom)’은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림 속 거인들은 모두 송전탑으로 이어진 전선을 따라 인간의 마을까지 온 것으로 보인다. 그 전선은 그림 왼편에 보이는 x자 모양의 철탑을 지나 마을로 이어진다. 철탑 아랫부분은 노랑, 녹색, 빨강의 색상으로 이루어진 동물의 촉수처럼도 보이고 튜브에서 짠 물감처럼도 보인다. 그렇게 마을로 들어온 색깔들은 추상 조각가의 작품처럼 보이는 조형으로 이어지고 마을회관 혹은 교회처럼도 보이는 녹색과 갈색으로 칠해진 건물의 출입구를 물들인다.
그리고 한 청년은 기둥 두 개를 십자가 형태로 엇갈려 든 채 전통 복장을 한 인물의 안내를 받으며 그림의 오른쪽으로 걸어가고 그 앞에는 사람인지 새인지 모를 존재가 바닥에 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양동이를 든 인물이 바라보고 있으며 그 위로는 오래전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전선이 공중에 날리고 있다. 이제부터 즐거운 오독이 시작된다.

그림 속 거인은 장벽이 무너지기 전, 미디어 등을 통해 장벽을 넘어 들이닥치던 자본을 비롯한 세계 문화의 큰 조류를 의미하는 것 같다. 1980년대 중반 이후는 공산주의의 몰락과 더불어 세계인의 화합이 강조될 때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술사의 큰 흐름을 장악하던 추상미술과 미니멀리즘 작품들은 장식적이고 지루하게 여겨지던 재현미술을 미술사의 변방으로 더욱 내몰고 있었다. 따라서 x자 모양의 철탑 아래로 촉수처럼 흘러나오는 것은 모더니즘 이후 미술사의 유행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학교에 다닌 1970~80년대 서독 지역에는 비디오아트를 비롯한 미디어아트와 추상표현주의가 유행하고 있었다. 십자가 형태의 기둥을 들고 가는 청년은 네오 라우흐 본인의 얼굴과도 상당히 닮았는데, 그는 17세기 네덜란드 집단초상화(Gruppenbild)에 나올법한 인물의 안내에 따라 그림의 오른편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가 든 기둥의 양 끝에는 불꽃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마치 화가의 붓처럼도 보이며 그 교차한 형태에서 십자가가 떠오르기도 한다.

한편 십자가를 들어야 할 것처럼 보이는 인물은 그 뒤편에서 양동이 두 개를 균형감 있게 들고 있다. 이는 마치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십자가를 지고 뚜벅뚜벅 걸어가야 할 것은 양동이를 든 자신이 아닌 붓을 든 청년이란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말이다. 청년의 앞쪽에 누워있는 반인반조(半人半鳥)의 캐릭터는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주술에 걸려 백조로 변했던 고트프리트 왕자의 모습으로 보인다. 이는 자연스레 30년간 저주처럼 동서를 가로질러 있던 장벽을 떠올리게 한다.

추상과 설치미술 미디어 아트 등이 세계 미술계를 장악할 때, 라이프치히 미술대학은 학기가 마무리될 때 학생들이 집단초상화를 제작해 제출해야 다음 학기로 승급할 정도로 전통 재현화에 대한 교육을 중요시했다. 이런 분위기가 있었기에 장벽이 무너진 후 네오 라우흐를 비롯한 라이프치히 출신 작가들의 작품은 1990년대 후반 뉴욕을 비롯한 세계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으며, 오늘날의 미술사는 이들을 신라이프치히 화파라 명명하게 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외부에서 밀려드는 자본과 유행하는 미술사조를 뒤로하고 라이프치히에서 본인만의 싸움을 한 네오 라우흐 자신을 비롯한 신라이프치히 화파를 상징하고 있는 것 같다.

세상엔 보기 좋은 것이 너무 많다. 유행도 아주 빠르게 변하고, 직업의 종류도 아주 다양해졌다. 선택지가 많다 보니 우리는 종종 길을 잃는다. 화려하게 가공된 정보 속에 때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너무 당연히 여기거나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오늘도 수많은 피드로 올라오는 유혹을 뿌리치고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이며 그걸 지킬 용기가 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볼 시간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구독한 콘텐츠들은 쉴 틈 없이 알림을 보내고, 끊임없이 올라오는 타인의 성공 신화에 우리는 더욱 조급해진다. 이처럼 유혹이 많은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은 또 다른 가능성을 더하는 게 아니라 나의 선택지 중 무엇을 덜어낼지를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덜어내고 덜어내어 마침내 남겨진 그것을 지속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해내는 것이 보이지 않는 전선을 타고 쉴 틈 없이 나에게 밀어닥치는 거인들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방법일 것이다.

작센인으로 태어나 예술과 문화 종교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라이프치히 주변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는 지난 30여 년간 그래왔던 것처럼 오늘도 집에서 10㎞ 떨어진 스튜디오를 향해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