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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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민정의 내 서랍 속 드라마
직업마다 직업병이라는 게 있다. 작가도 마찬가지다. 나처럼 문학과 문화, 창작과 비평을 넘나들며 오지랖을 잔뜩 부리는 작가는 특히나 직업병이 더욱 심각하다. 글자가 적힌 것이라면 모조리 씹어먹을 듯 열심히 읽는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독서의 계절이랄까. 한번은 음식점 메뉴판을 너무 오랫동안 본 탓에 밥값내기 싫어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은 적도 있다. 길거리에서 받은 전단지도 꼭 읽고 버리는, 지극히 사적인 나의 개인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탓이다.
안구건조증과 노안공포증을 동반한 나의 달콤쌉싸름한 작가 직업병도 가끔 '득'이 될 때가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마주해야 할 때다. 너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인간사에서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철학적 난제인데, 블랙홀처럼 중독성 강한 나의 ‘읽는’ 직업병 앞에서는 살짝 몸을 움츠린다.
드라마와 영화, 소설과 웹툰을 통해 내가 만난 사람만 수천수만 명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있고 그 어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이 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름하여, 캐릭터 유형과 서사 패턴. 가끔 내 직업이 작가가 아니라 프로파일러 아닐까 헷갈릴 때가 있다. 학생들의 과제를 봐주는 일도 결국엔 다양한 층위의 캐릭터를 읽어내는 일이다.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만든 ‘너’란 사람은 어떤 캐릭터일까. 혼자 책상에 앉아 집요하게 나만의 프로파일링 작업을 하고 또 한다.
그러나! 사랑은 늘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 나의 '전문성'에 도전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의 ‘인물 대백과 사전’에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나는 속절없이 매혹당하고 만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한 캐릭터는 니가 처음이야.”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의 상수가 그랬다. 천만 관객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진 작품답게 대사가 장맛비처럼 쉴새 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혼자 ‘말줄임표’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상수다. 대사도 적고 분량도 적어서 배우 손석구가 연기하지 않았다면 드라마 안에서 작은 발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네이버 기준) 등장인물 31번째에 언급되는 사람. 극중 상수(손석구 분)는 ‘은정’(전여빈 분)과 각각의 외국행을 앞두고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이때 은정은 마음 깊숙이 넣어두었던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한 슬픔에 드리워진 환시와 환청. 살아 있는 사람처럼 죽은 연인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지독한 고독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때 우리의 ‘상수’는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마디 툭 던진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은정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물을 담은 술잔이라도 된다는 듯 상수는 은정의 눈에 술잔을 갖다댄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성의 없는’ 건배사를 건넨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타인의 슬픔을 애도하는 알코올 도수 16.9의 순정한 위로. 어설픈 동정도 없고 과도한 연민도 없고 그 어떤 감정의 과잉도 없다.
상수는 늘 그랬다. 드라마에 몇 번 나오지 않지만 그때마다 인생을 달관한 수도자처럼 ‘상수 어록’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시간이 흐르면 다 지나가 버린다는 듯이. 아, 배우 손석구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앞서 여기서 먼저 해방일지를 쓰고 있었구나, 라는 큰 깨달음. 아,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록 육체의 눈은 오랜 드라마 시청으로 시큼털털할지언정 마음의 눈만큼은 시원해진 기분이다. 다양한 삶의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작은 세계가 한뼘 넓어진 느낌이랄까. 인생 공부가 따로 있나. 이렇게 드라마를 공부하듯 열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견문이 넓어지는데. ‘드라마’라고 쓰고 ‘인강(인터넷강의)’라고 읽고 싶다.
지금 이 순간 <내 서랍속 드라마>를 읽고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너무나 궁금하다. 당신은 어떤 사람, 어떤 캐릭터일까. 당신을 향한 나의 애틋한 마음을 담아 세상에서 가장 ‘성의 있는’ 첫인사를 건네본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안구건조증과 노안공포증을 동반한 나의 달콤쌉싸름한 작가 직업병도 가끔 '득'이 될 때가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과 마주해야 할 때다. 너는 누구인가. 이 문제는 인간사에서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철학적 난제인데, 블랙홀처럼 중독성 강한 나의 ‘읽는’ 직업병 앞에서는 살짝 몸을 움츠린다.
드라마와 영화, 소설과 웹툰을 통해 내가 만난 사람만 수천수만 명이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있고 그 어떤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이 나의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름하여, 캐릭터 유형과 서사 패턴. 가끔 내 직업이 작가가 아니라 프로파일러 아닐까 헷갈릴 때가 있다. 학생들의 과제를 봐주는 일도 결국엔 다양한 층위의 캐릭터를 읽어내는 일이다. 캐릭터와 그 캐릭터를 만든 ‘너’란 사람은 어떤 캐릭터일까. 혼자 책상에 앉아 집요하게 나만의 프로파일링 작업을 하고 또 한다.
그러나! 사랑은 늘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 나의 '전문성'에 도전하는 사람, 그러니까 나의 ‘인물 대백과 사전’에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면 나는 속절없이 매혹당하고 만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한 캐릭터는 니가 처음이야.”
드라마 <멜로가 체질>(2019)의 상수가 그랬다. 천만 관객 영화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이 야심차게 출사표를 던진 작품답게 대사가 장맛비처럼 쉴새 없이 쏟아지는 가운데 혼자 ‘말줄임표’를 가슴에 품고 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바로 상수다. 대사도 적고 분량도 적어서 배우 손석구가 연기하지 않았다면 드라마 안에서 작은 발자취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네이버 기준) 등장인물 31번째에 언급되는 사람. 극중 상수(손석구 분)는 ‘은정’(전여빈 분)과 각각의 외국행을 앞두고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이때 은정은 마음 깊숙이 넣어두었던 자기 이야기를 꺼낸다.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한 슬픔에 드리워진 환시와 환청. 살아 있는 사람처럼 죽은 연인과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지독한 고독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때 우리의 ‘상수’는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한 마디 툭 던진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
은정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물을 담은 술잔이라도 된다는 듯 상수는 은정의 눈에 술잔을 갖다댄다. 그리고는 세상에서 가장 ‘성의 없는’ 건배사를 건넨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타인의 슬픔을 애도하는 알코올 도수 16.9의 순정한 위로. 어설픈 동정도 없고 과도한 연민도 없고 그 어떤 감정의 과잉도 없다.
상수는 늘 그랬다. 드라마에 몇 번 나오지 않지만 그때마다 인생을 달관한 수도자처럼 ‘상수 어록’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시간이 흐르면 다 지나가 버린다는 듯이. 아, 배우 손석구가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에 앞서 여기서 먼저 해방일지를 쓰고 있었구나, 라는 큰 깨달음. 아, 이 또한 지나가리라. 비록 육체의 눈은 오랜 드라마 시청으로 시큼털털할지언정 마음의 눈만큼은 시원해진 기분이다. 다양한 삶의 철학과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양한 얼굴의 사람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내 안의 작은 세계가 한뼘 넓어진 느낌이랄까. 인생 공부가 따로 있나. 이렇게 드라마를 공부하듯 열심히 보는 것만으로도 견문이 넓어지는데. ‘드라마’라고 쓰고 ‘인강(인터넷강의)’라고 읽고 싶다.
지금 이 순간 <내 서랍속 드라마>를 읽고 있는 당신이 누구인지 나는 너무나 궁금하다. 당신은 어떤 사람, 어떤 캐릭터일까. 당신을 향한 나의 애틋한 마음을 담아 세상에서 가장 ‘성의 있는’ 첫인사를 건네본다. “당신의 눈에 뭐가 보이든, 나는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