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부터 대전의 한 야산에 벌통 세 개를 두고 양봉을 시작하였던 나는 이제 산속에 오래도록 누워 있으면 어떤 소리가 들려오는지 아는 사람이 되었다. 얼굴과 손끝은 햇볕에 점점 달구어져 뜨거워지고 왼편으로는 벌들이 붕붕거린다.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운 곳으로부터 이름 모를 산새가 울고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끼리 사사삭 부딪는 소리를 내며 머리 바로 위에서 울렁거린다. 이렇게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장면을 ‘작가의 약력’과 같은 식으로 표현한다면 ‘정기현은 2023년 봄, 양봉을 시작하였다.’가 된다.

처음 보는 작가의 책을 읽을 때에는 약력을 읽는 것부터가 독서의 시작이다. 평소 같으면 몇 살쯤 이 책을 썼구나 하고 가볍게 넘기는 약력도 왠지 자세히 뜯어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두더지 잡기』를 모두 읽었으므로 “어머니의 죽음 후 아버지의 반강제적 권유로 열여섯에 집을 나왔다.”라는, 저자 마크 헤이머의 약력에 어떤 복합적이고 총체적인 장면이 깃들어 있는지 안다. 그렇게 그의 세세한 삶의 장면들을 안고 약력을 다시 읽어 보면 약력 속 문장들이 서로 어떻게 부딪치고 상충하는지, 한 번 내렸던 정답이 그 다음 문장에서 어떻게 전복되는지, 문장들끼리의 알력 다툼이랄까 그런 것들이 새롭게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두더지 잡기』 저자 마크 헤이머의 약력에서 몇 개의 문장을 길어내 그것들끼리 어떻게 엎치락뒤치락 다투는지 지켜보도록 하자.
두더지 잡는 것이 직업이었던 채식주의자
마크 헤이머는 열여섯에 집을 나와 2년 동안 부랑자 생활을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숲길을 걸으며 보냈다. 50년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았고, 20년 동안 정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위해 정원을 헤집는 두더지 잡는 일을 병행하였다. 지금은 은퇴 후 아내 케이트와 함께 노년을 보내고 있다.

마크 헤이머는 짝짓기 철을 제외하면 홀로 일생을 보내는 두더지처럼 혼자서 고요히 지내며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인간 향을 지우고자 했다. 몸에서 지나치게 인간적인 냄새가 풍기면 인간 아닌 모든 생물이 경계하는 대상이 되고, 그러면 무탈하고 조용한 자연 생활이 불가능해지는 탓이다. 유년시절의 떠돌이 생활이 그러했고, 정원사로 일해 온 20년 동안의 세월 역시 그러했다.
그러나 마크 헤이머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노년기에 접어들수록 사랑하는 아내 페기와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초조해한다. 50년 동안 채식주의자로 살아왔지만 생계를 잇기 위해 두더지잡이를 병행하지 않을 수 없다.

이기적인 인간 대신 섭리를 따르는 자연적인 존재가 되어 자연에 스미는 삶을 살고자 하는 욕구와, 페기와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고 돈벌이로써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인 두더지잡이를 해 나가며 매해 숱한 두더지의 생명을 앗아 가는 일은 한쪽이 한쪽을 무화시킬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욕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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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더지 잡기』는 결국 마크 헤이머가 두더지 잡기를 그만두며 끝을 맺는다. 20년 동안 두더지잡이를 해 왔어도 덫에 걸려 이미 죽어 있는 두더지 사체를 처리하였을 뿐 직접 두더지에게 위해를 가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그가, 덫에 걸렸으나 아직 살아 있는 두더지를 마주하는 순간이 잡기를 끝내는 계기가 되었다. 두더지에게 지나치게 긴 고통을 안겨 주지 않으려면, 그리고 의뢰를 완벽히 마무리하기 위해서라면 두더지에게 직접 일격을 가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외면해 왔던 모순이 폭발하며 더 이상 직면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을까. “나는 나 자신이 위선자에 겁쟁이로 느껴졌다. 화가 났고 슬펐다.”

마크 헤이머는 그럼 어떻게 해야 했을까? 애초에 생계 수단으로 영 다른 것을 골라야 했을까. 페기와의 영원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너무나 인간적인 욕심일까. 이 부분을 읽을 때 마크 헤이머가 느꼈을 어떤 아득함이 온전히 전해지는 것 같아 나도 덩달아 무력해졌다. 어떤 다른 문장에도 전복되지 않고, 그 자체로도 완전한 문장은 “화가 났고 슬펐다.”뿐인 것 같아서.

마크 헤이머의 약력에 모순되지 않는 문장만을 남긴다면 그의 약력은 이렇게 될 것이다.
마크 헤이머는 화가 났고 슬펐다. 마크 헤이머는 화가 났고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