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닐 한 장에 기댄 위태로움, 그 지리멸렬한 삶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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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이동윤의 아트하우스 칼럼
▲영화 <비닐하우스> 메인 포스터(출처: 네이버 영화)
스크린 속에서 펼쳐진 가상의 세계가 현실로 전유될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 우린 모두 고통을 지독하게 응시해야 하는 이유를 깨닫는다. <비닐하우스>의 이솔희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려는 깨달음이기도 하다.
비극의 중심에 우뚝 선 문정
▲비닐하우스를 가로막고 있는 차를 피해 입구로 향하는 문정(출처: 네이버 영화)
스스로를 자해하는 문정의 유일한 희망은 소년원에 들어간 아들과 함께 사는 것이다. 비닐하우스에 살며 낮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그녀에겐 지극히 평범한 소망이 지독히도 이루기 힘든 꿈일 뿐이다. 문정의 돌봄을 받는 태강은 나이 들어 시력을 잃었다. 그에겐 치매에 걸린 아내, 화옥이 있지만 문정의 도움 없이는 그녀를 돌볼 수 없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늪 속에서 이젠 그조차 치매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다.문정과 함께 그룹 치료를 받고 있는 순남은 자신을 돌봐주는 소설가로부터 지속적인 성폭행을 당한다. 정신 장애가 있는 그녀에게 문정은 폭력이 자행되는 현실을 직면하고 벗어나기 위한 의지를 다지라고 조언한다. 순남에게 문정의 조언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비친 한 줄기 빛이며 동시에 절대 마셔서는 안 되는 독약이다.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문정이 태강, 화옥 부부를 돌보며 식사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반면 순남은 친절함을 베풀어 주는 문정에게 집착한다. 심지어 자신이 겪는 폭력을 알아봐 주고 벗어날 수 있는 솔루션까지 제공해 주는 문정이 순남에겐 절대적이다. 문정은 그런 순남이 귀찮다. 순남은 자신의 꿈을 이루는 도구가 아닌 걸림돌일 뿐이다. 문정에게 버림받은 순남은 결국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폭력적 현실을 벗어나려 한다.
문정에게 내려진 신탁, 잔인한 운명을 뚫고 나아가며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들킬까 봐 초조해하는 문정(출처: 네이버 영화)
모든 이들이 겪어내야 하는 절망의 중심에 선 문정은 위태롭고 가녀린 존재다.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버거운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는 존재임에도 끝까지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꿈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 자가 그 꿈에 도전하는 순간 비극은 발생한다.그리스 비극에서 모든 비극의 시작은 신탁으로부터 비롯한다. 인간은 절대 신이 선언한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제아무리 인간의 자유의지가 숭고하다 할지라도 신의 뜻을 넘어서기란 불가능하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이 신이 디자인한 현실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자들이었다면, 문정은 현대사회가 디자인한 현실로부터 한치도 벗어날 수 없는 자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조차 소유할 수 없는 절대적 타인에게 꿈은 그 자체로 잔인한 희망 고문일 뿐이다. ▲단호하게 마음을 다잡는 문정의 표정(출처: 네이버 영화)
김서형이 그려낸 문정은 비현실적이다. 절대 감당할 수 없는 비극의 연쇄를 온몸으로 수용하고 그대로 토해내는 문정의 몸부림은 한없이 괴이하고 기이하다.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비현실성은 더욱 강화된다. 살짝만 건드려도 우르르 무너질 듯한 불안감을 온몸으로 휘감아 내면서도 현실을 차갑고 냉정하게 판단하고 끊어내는 단호함은 김서형의 가녀린 몸과 단호한 시선을 통해 하나로 연결된다. 이질적인 두 극단적 상황을 하나의 신체로 연결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김서형 배우의 힘이다. ▲비닐하우스를 불태우는 문정(출처: 네이버 영화)
문정은 비닐하우스를 떠나 아들과 함께 살 새 아파트로의 이사를 준비한다. 과연 그 아파트는 그녀를 지키고 보호할 안식처가 될 수 있을까? 어쩌면 문정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문정은 비닐 하나에 의지하여 외부와 내부를 가르고 그 속에서 벌벌 떨면서도 자신을 지켜내려는 모든 불안한 존재들을 대변한다. 만약 당신이 문정에게 조금이라도 동정심을 느낀다면 당신의 내면에 존재한 그 불안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문정처럼 불가능한 삶의 조건 속에서 가능성을 꿈꾸며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편한 자각이 우리의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첫걸음은 아닐지, 한 번쯤 떠올려 본다.
*이 원고는 CGV뉴스룸에서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