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셸 바스키아,  두 개의 머리Dos cabesas , 1982나무 프레임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스틱. 개인소장
장-미셸 바스키아, 두 개의 머리Dos cabesas , 1982나무 프레임 캔버스에 아크릴과 오일스틱. 개인소장
바스키아 Ⅹ 워홀 : 네 개의 손으로Basquiat Ⅹ Warhol à quatre mains가 루이뷔통 미술관에서 8월 28까지 전시된다. 루이뷔통 재단은 2018년 장-미셸 바스키아 작품을 전시한 이후 이번에는 1984년부터 1985년까지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이 협업한 작품들을 공개했다. 그들은 약 160점의 작품을 공동 제작했으며, 그중 일부는 각자의 경력 중 가장 위대한 작품에 속한다.

앤디 워홀은 1928년 펜실베이니아의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1949년 그래픽 아트를 공부한 후 미국의 가장 인정받는 그래픽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가 되었다. 그는 1960년대 미국의 대중문화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거울처럼 자신 앞에 보이는 것들을 흡입하여 자기 작품에 반영했다.

1962년 워홀은 실크스크린 기법을 이용한, 팝 아트 작품으로 미국을 비롯해 유럽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브로드웨이 47번가에 그의 작업실 Factory를 마련해 유명 스타의 이미지를 대량 생산했다. 특정 모티프를 사용하여 자신의 주제를 선택적으로 추출한 다음, 복잡한 회화적 공간에 투사했다. 대량 소비되는 제품들, 알려진 인물들을 실크스크린으로 대량 생산하였다. 이것은 미국의 경제 부흥에 힘입은 대중문화에 대한 도발이자 비판이었다. 그의 이미지의 나열, 대량 제작 방식이 바로 그 당시 문화 현상에 대한 이해이자 해석이었다.
앤디 워홀 과 장 미셸 바스키아 비디오 캡처한 사진
앤디 워홀 과 장 미셸 바스키아 비디오 캡처한 사진
앤디 워홀, 장-미셸 바스키아와 자화상,  1982년 10월 4일 폴라로이드,  비쇼프베르거 소장
앤디 워홀, 장-미셸 바스키아와 자화상, 1982년 10월 4일 폴라로이드, 비쇼프베르거 소장
장-미셸 바스키아는 1960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그는 푸에토리코 출신의 어머니와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회계사였던 아버지 덕에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고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그의 어머니 마틸드 덕에 그는 문화 예술적 혜택도 누릴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바스키아를 예술에 관한 관심을 북돋기 위해 브루클린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데려갔다.

그의 재능은 역사를 예술에 결합하는 능력이었다. 아프리카 디아스포라로서, 그의 뿌리인 카리브해의 문화유산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투쟁을 형상화했다. 음악 분야, 특히 당시 막 등장한 재즈와 힙합, 복싱과 야구 등 스포츠를 그가 창안한 아이콘으로 그의 그림에 투사하였다.

1968년 바스키아는 자동차 사고를 당했는데 병원에 한 달 정도 입원을 했다. 퇴원 후 어머니는 그에게 해부학 책,그레이 아나토미를 선물했는데 도상들이 그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었다. 해골이나 뼈, 등의 모티프들이 그의 그림 속에 자주 등장한다. 흑인 디아스포라로서 겪는 인종 차별, 불공정, 물질주의 비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또한 르네상스 미술을 새롭게 조명한다. 여러 예술 장르를 종합적으로 분석 이해하는 능력 또한 탁월하다. 1977년 알 디아즈와 함께 SAMOⒸ 라는 이름으로 뉴욕 그라피티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그의 예술 세계는 데생, 콜라주, 그래픽, 텍스트등 다양한 방식을 통해 한 단계 발전하는 계기를 맞는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콜라보레이션 19, Collaboration 19. 1984-1985, 오일 스틱, 콜라주, 실크 스크린 잉크, 합성 페인트, 개인 소장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콜라보레이션 19, Collaboration 19. 1984-1985, 오일 스틱, 콜라주, 실크 스크린 잉크, 합성 페인트, 개인 소장
장-미쉘 바스키아, 크리켓Grillo, 1984 나무 위에 아크릴, 오일, 종이 붙임, 파스텔, 못질. 파리 루이뷔통 재단
장-미쉘 바스키아, 크리켓Grillo, 1984 나무 위에 아크릴, 오일, 종이 붙임, 파스텔, 못질. 파리 루이뷔통 재단
또한 그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만남이 찾아온다. 바스키아는 어린 시절부터 앤디 워홀의 예술과 대중문화의 관계를 뒤엎는 방식에 매료되었다. 바스키아와 워홀은 1982년 공동 갤러리 소유자인 브루노 비스쵸프베르거Bruno Bischofberger의 권유로 만나게 된다. 그 해 바스키아는 뉴욕,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유럽에서의 전시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워홀은 과거에 비해 디소 침체기에 빠져있었다. 바스키아의 열린 시각, 호기심, 왕성한 활동은 조금의 흠결도 없이 완벽했다. 워홀은 바스키아에게 영감을 받아 자기 작품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

그해 가을 워홀은 자신의 일기장에 “ 장-미셸이 그림을 새롭게 그리게 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라고 적고 있다. 바스키아는 또한 스승을 얻게 되었다. 둘은 서로의 방식을 존중하면서 작업을 했고, 서로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공동 작업은 각각의 작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두 예술가의 친구인 키이스 헤링은 네 손으로 그려진 그림들에 대해서 “그것들은 정말로 발명품이다. 윌리엄 버로스William Burroughs의 발명품이고, 제 3의 정신이다. 즉 두 영혼의 결합은 새로운 제 3의 새로운 것, 즉 정말 독특하고 완전히 탁월한 것을 만들어냈다.“ 라고 평했다.
바스키아와 워홀, 중국 파라마운트, China Paramount, 1985, 아크릴, 오일스틱,  실크스크린 잉크
바스키아와 워홀, 중국 파라마운트, China Paramount, 1985, 아크릴, 오일스틱, 실크스크린 잉크
현대 예술 작품을 접하면서 우리는 작품의 이해, 해석의 문제에 봉착한다. 수잔 손택은 ”예술과 문학을 징후들의 보고̈̈”로 보았으며 예술을 해석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런데 해석 없이 그것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 없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을까? 그녀의 말에서 다양한 시각의 부재와 이에 따른 해석의 부재, 이해의 부재를 지양하고자 하는 그녀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획일화된 해석이 낳은 폐해, 그것은 예술가들의 낯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며, 예술의 잠재력을 제한하는 일이다. 현대문명을 각자의 방식으로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여 자기의 예술 세계를 구축한 두 예술가, 두 세대를 뛰어넘는 뜻밖의 결합이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갈구하고 있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  6.99,  1985, 아크릴과  오일 스틱, 니콜라 에르니  소장 Nicola Erni
이 작품은 앤디 워홀이 좋아하는 작품 중에 하나이다.  그의 팩토리Factory의 개인 공간에 걸려 있었다.  숫자와 두 미국 축구 선수, 알몸으로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은 앤디워홀이 그렸다.
장- 미셸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 6.99, 1985, 아크릴과 오일 스틱, 니콜라 에르니 소장 Nicola Erni 이 작품은 앤디 워홀이 좋아하는 작품 중에 하나이다. 그의 팩토리Factory의 개인 공간에 걸려 있었다. 숫자와 두 미국 축구 선수, 알몸으로 서 있는 여성의 모습은 앤디워홀이 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