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많은 감독이 따라 한 영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
지금 정동의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2023 시네바캉스 서울’(7.21~8.27)이 한창이다. 휴가철에 즐길 만한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를 한 달 내내 시원한 극장에서 감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제임스 딘이 출연한 <이유없는 반항>(1955)과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가 참여한 <사형대의 엘리베이터>(1958)와 같은 전설적인 작품부터 쿠엔틴 타란티노가 미친 연기를 선보이는 <황혼에서 새벽까지>(1996)와 잔혹하기가 터진 배 밖으로 내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적나라한 <이치 더 킬러>(2001)와 같은 유명 B급 영화까지, 30편이 넘는 작품을 상영한다.
너무 많은 감독이 따라 한 영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
모든 작품이 다 주옥같아 한두 편을 꼽기 힘들어도 이번 시네바캉스 서울에서 <블랙 사바스>(1963)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1963) <8월의 달을 위한 다섯 인형들>(1970) 세 편의 상영작을 연출한 마리오 바바(사진)의 영화를 주목했으면 싶다. 마리오 바바, 그는 누구인가? ‘이탈리아의 히치콕’으로 불리는 그는 알프레드 히치콕이 <현기증>(195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싸이코>(1960) 등을 통해 현대 스릴러 영화의 문법을 확립한 것처럼 현대 공포영화의 거의 모든 걸 창조했다.
너무 많은 감독이 따라 한 영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
일례로, (2023 시네바캉스의 상영작은 아니지만) 한적한 호수 별장지의 대학살을 다룬 <블러드베이>(1971)는 의문의 살인자가 많은 살인을 저지르는 슬래셔 영화의 원전이다. 많은 후배 감독이 인용하거나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하여 오마주를 바친 거로 유명하다. 존 카펜터 감독은 하키 마스크를 쓴 살인마 마이크가 등장하는 <할로윈>(1978)을 만들면서 <블러드 베이>의 살인자 시점을 인용했다. 여름 캠핑장을 배경으로 하는 <13일의 금요일 2>(1981)에는 쇠꼬챙이로 두 명이 한꺼번에 살해당한 장면이 나오는데 <블러드베이>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마리오 바바 영화에 처음 입문하는 이라면 이번 시네바캉스의 상영작 중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사진)를 추천한다.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는 할리우드의 로맨틱코미디 <로마의 휴일>(1953)의 호러 버전이라 할만하다.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햅번이 스쿠터를 타고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노닥거리던 스페인 광장은 살인의 현장으로 변모했다. 로맨틱한 휴가를 기대하며 로마행 비행기에 오른 노라(레티샤 로만)는 도착하자마자 살인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격하면서 정체불명의 살인자에게 차기 희생자로 지목받는다. 휴가가 악몽으로 변모한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가 영화사적으로 중요한 건 ‘지알로 Giallo’의 출발점인 까닭이다. 지알로, 그것은 또 무엇인가? ‘노랑’을 뜻하는 지알로는 192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한 출판사가 노란색을 표지로 한 저가의 장르 소설을 발표하고 이게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싸구려 가판 소설을 일컫는 말이 되었다. 미술을 전공한 마리오 바바는 사실 영화감독을 할 생각이 없었는데 촬영감독 일을 맡던 중 해고된 감독을 대신해 메가폰을 잡으면서 46세의 늦은 나이에 연출자로 데뷔했다.
너무 많은 감독이 따라 한 영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는 <사탄의 가면>(1960) <블랙 사바스>에 이은 세 번째 장편 연출작으로 마리오 바바는 이 영화에서 잔혹한 살해 장면, 괴기스러운 노파의 등장, 좁은 공간을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운영하는 연출과 편집 등이 노랑의 소설 표지와 같은 워낙 강렬한 이미지의 체험을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이 작품 이후 팬들은 마리오 바바의 영화를 일러 지알로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듬해 나온 <피와 검은 레이스>(1964)에서 마리오 바바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에서 보여준 그의 장기를 더욱 심화시켜 지알로 장르의 컨벤션을 완성했다.
너무 많은 감독이 따라 한 영화 <너무 많은 것을 안 여자>
쿠엔틴 타란티노는 마리오 바바의 열광적인 팬으로 자신의 영화적 뿌리를 일러 지알로라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타란티노를 세계적인 감독으로 만들어 준 <펄프 픽션>(1994)의 제목은 미국에서 ‘가판 소설 Pulp Fiction’을 의미한다. 쿠엔틴 타란티노는 미국의 지알로 영화를 만든 셈인데 <킬 빌>(2003, 사진) <데쓰 프루프>(2007) 등 그가 연출한 대부분 작품의 포스터는 실제로 노란색 바탕을 하고 있다. 세계적인 감독들이 추앙하는 마리오 바바는 한국에서는 소수의 팬을 제외하면 생소한 연출자로 남아 있다. 이번 기회에 너무 많은 감독이 따라한 연출자와 영화를 만나 호러의 매력에 빠져보시기를!

허남웅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