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일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당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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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은아의 탐나는 책
레이먼드 게이타, 『작별―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변진경 옮김, 돌베개, 2019 (편집 김진구)
레이먼드 게이타, 『작별―로물루스, 나의 아버지』, 변진경 옮김, 돌베개, 2019 (편집 김진구)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기자는 탐나는 책을 꼽고 탐나는 이유를 적어달라고 했다. 저는 탐나는 책이 없는데요, 그렇게 말은 안 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말은 탐나는 책이라고 하면서 리뷰에 가까운 글들을 써서 보낼 때마다 드는 생각은 편집이라는 행위와 탐내기가 약간 어긋난 궤도상에 있는 것 같다는 것이다. 내 책에선 내 최선이, 남의 책에선 남의 최선이 책의 품질이 될 따름이고, 남의 책 품질이 좋으면 나는 동료 편집자가 되기보다는 곧장 독자가 되어 그저 감사히 읽고 싶어진다. 그래서 좋지 않은 책이어도 좋은 책이어도 탐낼 이유가 딱히 없다. 이렇게 언제까지 쓸 수 있을까 생각하며 이번에 고른 책은, 그러나 탐내라고 하면 탐낼 수 있을 것 같다.
레이먼드 게이타의 『작별』을 만드는 시간을 생각한다. 좋은 텍스트는 편집자의 시간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자기암시의 재료가 되어준다.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불안한 선택들을 해나가며 신경증에 걸렸거나 걸리려고 하는 편집자들에게 텍스트만큼 믿을 구석이 되어주는 것은 없다. 오탈자부터 실물 책과 책의 영향력까지, 내가 부단히 애썼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과 내가 감히 어떻게 해보려 들 수 없는 것 그 전부를 텍스트가 감당해준다. 독자의 외면을 받아도 영향력이 미미해도 그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한 책의 최종 책임자는 편집자도 저자도 아닌 텍스트 자체인 듯하다. 만드는 과정에서 텍스트라는 행위자가 태어나버린다.
『작별』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도덕철학자 레이먼드 게이타의 회고록으로,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삶을 산 부친 로물루스 게이타의 삶을 그린다. 옮긴이의 말에 그 삶이 잘 표현돼 있다. “사람에 대한 환멸에 빠질 법한 가혹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로물루스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항상 솔직하게 말하고, 말한 바를 지키려 했으며,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나 위선을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단죄하지 않았다. 지위와 명성, 타산적인 태도를 경멸했고, 삶의 존엄성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그에 충실하게 살았다. (…) 단순하고 선한 삶, 좌절하지 않는 의지와 용기.”(219) 로물루스가 삶을 살아낸 방식은 회고록 독자들이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고, 레이먼드는 그의 유산을 ‘공통된 인간성’과 ‘동정적 숙명론(고통받을 운명에 있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깊이 연민하는 로물루스의 마음을 레이먼드는 이렇게 일컬었다)’을 통해 그려낸다. “그 목소리는 (…) 인간의 조건이 ‘불행에 대한 우리의 취약함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215) 문학비평가 피터 크레이븐은 이를 “인간적 황폐함에 맞선 도덕적 진지함”(4)이라고 불렀다. 가을날 산동네 건물 옥상의 눈부신 태양빛 아래서 이 책을 읽었다. 『작별』은 유년 시절 자연과 인식의 연결성과 구성성을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낯섦 광활함 황량함으로 이민자 가족을 압도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을 유럽인 로물루스는 수십 년 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적대감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뻔했던 어린 레이먼드는 어느 날 홀로 대면한 낯선 자연 속에서 그 풍경을 다르게 인식하고 이해할 자기만의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
“난생처음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의식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서 유럽의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도 자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시골 지역, 특히 바싹 말라빠진 나무들에 대한 그의 태도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의 윤곽을 뚜렷이 그려내는 빛이야말로 이 지역 자생 수목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빛에 사로잡히고 보니,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서 숨은 이미지를 발견할 때처럼 풍경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바싹 마른 나무의 형체와 드문드문 나 있는 잎들은 그 아름다움을 의식하기 위한 초점이 되었고, 그 밖의 모든 것들―원초적인 산, 높이 자란 여름 색의 풀잎과 조화를 이루며 흰색, 노란색, 갈색으로 다양한 색을 띤 흙길들―도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풍경은 내가 볼 준비가 될 때까지 그 특별한 아름다움을, 다소 너그럽게 봐주어야 하는 보잘것없고 투박한 형태가 아닌 섬세하고 정교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숨겨온 듯했다. (…) 그날의 경험은 생명 일반과 그 지역에 어떤 초월적 의미를 더해주었고, 그에 대한 나의 의식을 완전히 바꾸었다.”(72)
축적이 있고, 해석과 승화가 있고, 회고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다 있은 후에도 대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게 슬픔도 되고 사랑도 되는 것 같다. 『작별』은 잘 쓰인 비극이다. 아무리 서글플 때에도 그보다 더한 서글픔이, 아무리 다정할 때에도 그보다 더한 다정함이 거기에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하고, 웃음과 마비, 이성과 광기 아래에 언제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있었음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언어의 선택과 그 구현의 탁월함이라는 문학의 성취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문학의 한계를 상기시킨다. 이 대단한 아름다움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세계에 실존함을 증언할 수 있음. 진실한 글이 지닌 힘은 이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힘을 느낄 수 있는 어떤 독자들이 저자의 모친이자 로물루스의 아내였던 크리스틴을 그렇게 보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자기 운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불안하고 강렬한 눈빛"(21),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신중한 열정으로 세상을 경험한 사람다운 강렬한 존재감"(43)을 지녔던 크리스틴은 “광활한 풍경 속에서 마치 그곳에 버려진 사람처럼 보였다”(44). 그러나 어떤 독자에게 저자의 거리감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1) 저자가 로물루스의 장례식에서 낭독한 추도사 중에서(212).
레이먼드 게이타의 『작별』을 만드는 시간을 생각한다. 좋은 텍스트는 편집자의 시간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 자기암시의 재료가 되어준다. 알 수 없는 세상에서 불안한 선택들을 해나가며 신경증에 걸렸거나 걸리려고 하는 편집자들에게 텍스트만큼 믿을 구석이 되어주는 것은 없다. 오탈자부터 실물 책과 책의 영향력까지, 내가 부단히 애썼지만 어쩔 수 없었던 것과 내가 감히 어떻게 해보려 들 수 없는 것 그 전부를 텍스트가 감당해준다. 독자의 외면을 받아도 영향력이 미미해도 그것이 가치 있다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게 보면 한 책의 최종 책임자는 편집자도 저자도 아닌 텍스트 자체인 듯하다. 만드는 과정에서 텍스트라는 행위자가 태어나버린다.
『작별』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도덕철학자 레이먼드 게이타의 회고록으로, ‘고통과 슬픔으로 점철’된 삶을 산 부친 로물루스 게이타의 삶을 그린다. 옮긴이의 말에 그 삶이 잘 표현돼 있다. “사람에 대한 환멸에 빠질 법한 가혹한 일들을 겪으면서도 로물루스는 타인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항상 솔직하게 말하고, 말한 바를 지키려 했으며, 그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진심으로 대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나 위선을 가차 없이 비판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단죄하지 않았다. 지위와 명성, 타산적인 태도를 경멸했고, 삶의 존엄성과 타인에 대한 연민과 배려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그에 충실하게 살았다. (…) 단순하고 선한 삶, 좌절하지 않는 의지와 용기.”(219) 로물루스가 삶을 살아낸 방식은 회고록 독자들이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고, 레이먼드는 그의 유산을 ‘공통된 인간성’과 ‘동정적 숙명론(고통받을 운명에 있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깊이 연민하는 로물루스의 마음을 레이먼드는 이렇게 일컬었다)’을 통해 그려낸다. “그 목소리는 (…) 인간의 조건이 ‘불행에 대한 우리의 취약함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보인다.”(215) 문학비평가 피터 크레이븐은 이를 “인간적 황폐함에 맞선 도덕적 진지함”(4)이라고 불렀다. 가을날 산동네 건물 옥상의 눈부신 태양빛 아래서 이 책을 읽었다. 『작별』은 유년 시절 자연과 인식의 연결성과 구성성을 인상적으로 서술한다. 낯섦 광활함 황량함으로 이민자 가족을 압도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자연을 유럽인 로물루스는 수십 년 동안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적대감을 고스란히 물려받을 뻔했던 어린 레이먼드는 어느 날 홀로 대면한 낯선 자연 속에서 그 풍경을 다르게 인식하고 이해할 자기만의 관점을 획득하게 된다.
“난생처음 아름다움을 진정으로 의식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에게서 유럽의 나무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너무도 자주 들었기 때문에 나는 이 시골 지역, 특히 바싹 말라빠진 나무들에 대한 그의 태도까지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나무의 윤곽을 뚜렷이 그려내는 빛이야말로 이 지역 자생 수목들이 지닌 아름다움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빛에 사로잡히고 보니, 수수께끼 같은 그림 속에서 숨은 이미지를 발견할 때처럼 풍경이 완전히 다르게 보였다. 바싹 마른 나무의 형체와 드문드문 나 있는 잎들은 그 아름다움을 의식하기 위한 초점이 되었고, 그 밖의 모든 것들―원초적인 산, 높이 자란 여름 색의 풀잎과 조화를 이루며 흰색, 노란색, 갈색으로 다양한 색을 띤 흙길들―도 완벽하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그 풍경은 내가 볼 준비가 될 때까지 그 특별한 아름다움을, 다소 너그럽게 봐주어야 하는 보잘것없고 투박한 형태가 아닌 섬세하고 정교한 형태의 아름다움을 숨겨온 듯했다. (…) 그날의 경험은 생명 일반과 그 지역에 어떤 초월적 의미를 더해주었고, 그에 대한 나의 의식을 완전히 바꾸었다.”(72)
축적이 있고, 해석과 승화가 있고, 회고가 있다. 그리고 이것들이 다 있은 후에도 대상은 항상 그 자리에 있다. 그게 슬픔도 되고 사랑도 되는 것 같다. 『작별』은 잘 쓰인 비극이다. 아무리 서글플 때에도 그보다 더한 서글픔이, 아무리 다정할 때에도 그보다 더한 다정함이 거기에 있었다는 걸 느낄 수 있게 하고, 웃음과 마비, 이성과 광기 아래에 언제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는 진심이 있었음을 끊임없이 의식하게 한다. 언어의 선택과 그 구현의 탁월함이라는 문학의 성취 속에서 드러나는 진실은 역설적으로 문학의 한계를 상기시킨다. 이 대단한 아름다움보다 더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그것이 이 세계에 실존함을 증언할 수 있음. 진실한 글이 지닌 힘은 이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그런 힘을 느낄 수 있는 어떤 독자들이 저자의 모친이자 로물루스의 아내였던 크리스틴을 그렇게 보아주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자기 운명을 두려워하는 사람의 불안하고 강렬한 눈빛"(21), "경솔한 사람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신중한 열정으로 세상을 경험한 사람다운 강렬한 존재감"(43)을 지녔던 크리스틴은 “광활한 풍경 속에서 마치 그곳에 버려진 사람처럼 보였다”(44). 그러나 어떤 독자에게 저자의 거리감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 1) 저자가 로물루스의 장례식에서 낭독한 추도사 중에서(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