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러지던 교보 살린 '닥터 신'…"금융지주사 전환으로 제2 창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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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간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다 교보생명 사령탑 맡아
2540억원 적자 나던 회사, 순이익 5000억대 기업으로
‘인본주의 지속가능 경영’ 통해 ‘보험의 노벨상’ 받기도
“털어도 먼지 안 나와” … 매번 사비로 임원에 명절선물
4년 뒤인 2000년 5월 교보생명 대표에 오르며 최고 사령탑을 맡았다. 그해 교보생명은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수년간 떠안은 자산 손실이 2조3869억원에 달했고 그해 당기 순손실만 2540억원을 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이 시급했다. 신 의장은 결국 수술대에 오른 교보생명을 향해 메스를 꺼내들었다. 당시 보험업계는 허울 뿐인 외형 경쟁 탓에 부실 계약 사례가 만연했다. 설계사와 영업소장이 짜고 가공 계약을 체결해 수당만 받고 바로 해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불법적인 영업 관행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매출 경쟁이 아닌 교보생명의 창업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정도’를 벗어나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경영 철학과 결이 맞지 않았다.
패러다임을 바꾸기로 했다. 수입보험료 확대가 아닌 고객을 앞세운 퀄리티 경영, 내실 경영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2011년엔 보장 유지에 초점을 맞춘 ‘평생든든 서비스’를 선보이며 고객 중심 경영을 한층 강화했다. 재무설계사들이 고객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현재 가입 중인 보험상품의 내역을 직접 설명해주고 혹시라도 놓친 보험금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고객서비스 방식으로 평가받았다.
신 의장의 혁신은 교보생명의 괄목할 만한 재무성과로 이어졌다. 2000년 25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냈던 교보생명은 연간 5000억원대 순이익을 올리는 회사로 탈바꿈했다. 해외 신용평가사들도 좋은 점수를 주고 있다. 무디스 9년 연속 ‘A1’, 피치 11년 연속 ‘A+’ 등 세계 주요 신용평가사로부터 금융권 최고 수준의 신용등급을 부여받고 있다. 업계의 부당한 관행을 거스르며 내실 경영에 집중해 올린 성과라 더욱 돋보인다는 평가다.
신 의장의 인본주의적 지속가능 경영은 국내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호평을 얻고 있다. 교보생명은 2010년부터 ‘대한민국 지속가능성지수’ 생명보험부문 13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신 의장은 2019년 ‘대한민국 지속가능 경영 최고경영자’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다. 같은 해 세계중소기업학회(ICSB)가 주관하는 ‘사람 중심 기업가정신 실천 경영자 대상’도 수상했다. 지난 3월에는 세계보험협회(IIS)로부터 ‘보험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2023 보험 명예의 전당 월계관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1996년 명예의 전당에 오른 신 창립자에 이어 세계 보험산업 역사상 최초로 부자(父子)가 함께 헌액된 것. 이 상은 혁신적인 활동을 통해 보험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1957년 제정됐으며 매년 IIS 임원 회의에서 수상자를 결정한다. 조시 란다우 IIS 대표는 “신 의장은 변화 혁신과 통찰적 리더십, 사람 중심 경영을 통해 ‘보험 명예의 전당’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신 창립자가 2003년 별세할 때 신 의장 일가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1830억원의 상속세를 냈다. 당시 세금을 납부할 현금이 없었던 신 의장과 형제들은 교보생명 주식을 물납하며 납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 의장은 회사 경비 또한 결코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매년 명절 때마다 임원에게 보내는 선물세트 역시 모두 사비에서 충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 의장의 독특한 소통 방식은 중요 포인트마다 임직원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0년 회사가 어려울 때 교보생명이 금융감독원에 파산 신청을 냈다는 가상 뉴스를 제작한 게 대표적이다. 마치 지상파 방송 뉴스처럼 만들어진 덕에 당시 연수원에 모여 시청한 임직원들이 실제 상황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이는 회사 안팎에 ‘변화와 혁신이 아니면 모두 죽는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신 의장의 개혁 추진에도 큰 도움이 됐다. 2001년 회사 비전과 기업이미지(CI)를 선포하는 자리에서 개그맨 이경규씨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간판만 바꾼다고 회사가 변하는 게 아니라 임직원들의 행동이 바뀌어야 비로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였다. 고객만족 FP대상 시상식에선 컨설턴트의 수고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으로 감동을 선사했고 임직원들 앞에 통기타를 든 가수로 변신하거나 가짜 수염을 붙인 채 난타공연을 선보이는 등 재벌 회장답지 않은 친근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20년 넘게 교보생명 대표직을 수행하면서도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 한번 받은 적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숱한 금융사고가 끊이지 않는 국내 금융권에서 유례가 없는 사례로 꼽힌다. 모든 책임과 비판을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책임감 아래 임직원들과 힘을 합쳐 강도 높은 내부통제 노력을 펼친 결과라는 평가다. 2021년부터 급변하는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사적인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보험 가입 부문에서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심사 보완 및 청약 확대, 청약 전 답변 조회 서비스(K-PASS) 등을 도입했으며 보험금 지급에서도 인공지능(AI) 자동심사 모델 등을 구축했다.
내년엔 지난 18년간 숙원 사업이었던 금융지주사 전환을 앞두고 있다. 이를 위해 여러 주주들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공감대 형성에 주력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로 국내 생명보험업계의 전망이 밝지 못한 현실에서 지주사 전환은 생존 전략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신 의장은 “지주사 전환을 통해 신성장동력 발굴,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 관계사 간 시너지 창출, 주주가치 제고 등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교보생명의 IPO는 기한 내 이뤄지지 못했다. 저금리, 저성장, 자본규제 등으로 시장 환경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이사회 일원이던 어피너티 측도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마침내 2018년 12월 이사회 의결을 통해 IPO를 추진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어피너티 측은 2018년 10월 주당 40만9000원이란 가격에 풋옵션을 전격 행사했고 이어 이듬해 국제상업회의소(ICC)에 국제 중재를 신청하며 신 의장을 몰아부쳤다. 당시 주당 20만원 안팎이던 시장가의 두배가 넘는 가격을 부른 셈이다. 하지만 중재판정부는 신 의장의 손을 들어줬다. 중재판정부는 신 의장과 어피너티 간 풋옵션 계약의 유효성은 인정하지만 신 의장이 주당 40만9000원은 물론 그 어떤 가격에도 주식을 되사줄 의무는 없다고 판정했다. 어피너티는 이 같은 중재 결과에 반발해 지난해 2월 2차 국제 중재를 신청한 상태다. 하지만 어피너티가 2차 중재에서 승소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중재 재판은 기본적으로 단심제로 진행되는 만큼 볼복 소송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어피너티 측은 2차 중재에서도 1차 때처럼 신 의장에게 40만9000원의 풋옵션 행사가격을 요구하고 있어 쟁점이 사실상 동일한 상황이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선 결국 교보생명의 지주사 전환이 어피너티와 신 의장 간 분쟁을 해소할 실마리가 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교보생명이 지주사 전환을 통해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면 어피너티 입장에서도 보유지분 가치가 상승해 투자금 회수에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어피너티 경영진이 교체된 것도 주주 간 분쟁에 새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어피너티 창업주 박영택 회장과 한국 투자를 주도했던 이상훈 한국총괄대표가 지난 상반기 회사를 떠난 데 이어 창업 멤버인 이철주 회장도 최근 사의를 표명했다. IB업계 관계자는 “어피너티가 투자 손실을 만회하려고 풋옵션 조항을 활용해 과욕을 부리다 발목을 잡힌 형국”이라고 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
2540억원 적자 나던 회사, 순이익 5000억대 기업으로
‘인본주의 지속가능 경영’ 통해 ‘보험의 노벨상’ 받기도
“털어도 먼지 안 나와” … 매번 사비로 임원에 명절선물
신창재 교보생명 대표 겸 이사회 의장은 의사로 일하다 기업인의 길을 걷게 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라는 두 번의 험난한 파고를 넘어 교보생명의 내실 성장을 주도해왔다.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그룹의 중장기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금융지주사 전환에도 나섰다. 올해 창립 65주년을 맞은 교보생명이 보험 명가(名家)를 뛰어넘어 종합금융그룹으로 도약할 수 있도록 ‘제2의 창업’을 선언한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서 내실경영 ‘산파’로
신 의장은 1996년 11월 서울대병원 산부인과 교수 생활을 접고 교보생명 부회장에 취임했다. 당시 암투병 중이던 선친 신용호 창립자의 간곡한 권유를 이기지 못했다. 당시 그의 나이 마흔셋. 18년 동안 입었던 흰 가운을 벗고 ‘인생 2막’을 연 시작점이었다.4년 뒤인 2000년 5월 교보생명 대표에 오르며 최고 사령탑을 맡았다. 그해 교보생명은 총체적 위기를 겪고 있었다. 외환위기 여파로 수년간 떠안은 자산 손실이 2조3869억원에 달했고 그해 당기 순손실만 2540억원을 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과 체질 개선이 시급했다. 신 의장은 결국 수술대에 오른 교보생명을 향해 메스를 꺼내들었다. 당시 보험업계는 허울 뿐인 외형 경쟁 탓에 부실 계약 사례가 만연했다. 설계사와 영업소장이 짜고 가공 계약을 체결해 수당만 받고 바로 해약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불법적인 영업 관행에 마침표를 찍어야 했다. 매출 경쟁이 아닌 교보생명의 창업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정도’를 벗어나는 것은 그가 추구하는 경영 철학과 결이 맞지 않았다.
패러다임을 바꾸기로 했다. 수입보험료 확대가 아닌 고객을 앞세운 퀄리티 경영, 내실 경영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2011년엔 보장 유지에 초점을 맞춘 ‘평생든든 서비스’를 선보이며 고객 중심 경영을 한층 강화했다. 재무설계사들이 고객을 정기적으로 방문해 현재 가입 중인 보험상품의 내역을 직접 설명해주고 혹시라도 놓친 보험금이 없는지 꼼꼼히 체크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고객서비스 방식으로 평가받았다.
인본주의 지속가능경영 전도사 … 해외서도 본보기 삼아
선친 때부터 이어져온 국민교육 진흥이라는 창립 이념과 사람 중심의 기업문화는 이해관계자 모두의 균형 있는 성장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지속가능 경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 이는 기업의 존재 이유를 ‘사회적 책임(CSR) 경영’보다 한차원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개념이란 평가다. 신 의장은 회사가 단순한 이익 창출을 넘어 고객, 재무설계사, 임직원, 투자자, 정부, 지역사회 등을 균형 있게 고려할 때 지속가능한 상생의 선순환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는 기업 경영을 산소에 비유해 "사람은 산소가 없으면 살 수 없지만 산소를 위해 살지 않는 것처럼 기업에 이익은 생존을 위한 연료지만 그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기업의 존재 이유도 업의 본질에 집중해 고객에게 가치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에 기여한다는 게 신 의장의 확고한 경영 철학이다. 이 같은 철학과 영업 방식을 두고 시장에선 의사 출신 경영자가 보험업의 특성도 모른채 이상만 좇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신 의장의 선택이 옳았다는 게 입증됐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2019년 미국 최대 경영자단체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은 ‘회사의 목적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는데 그 핵심은 회사의 기본 경영원칙을 ‘주주 중심’에서 ‘이해관계자 중심’으로 선회한 것이다. 주주 뿐 아니라 고객, 종업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들을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선언문에는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을 비롯해 제프 베이조스 아마존 창업자,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메리 배라 제너럴모터스(GM) CEO 등 미국 대기업 CEO 181명이 동참했다. 신 의장은 이들보다 10년이나 앞서 이해관계자 중시 경영을 펼쳐온 셈이다.신 의장의 혁신은 교보생명의 괄목할 만한 재무성과로 이어졌다. 2000년 2500억원이 넘는 적자를 냈던 교보생명은 연간 5000억원대 순이익을 올리는 회사로 탈바꿈했다. 해외 신용평가사들도 좋은 점수를 주고 있다. 무디스 9년 연속 ‘A1’, 피치 11년 연속 ‘A+’ 등 세계 주요 신용평가사로부터 금융권 최고 수준의 신용등급을 부여받고 있다. 업계의 부당한 관행을 거스르며 내실 경영에 집중해 올린 성과라 더욱 돋보인다는 평가다.
신 의장의 인본주의적 지속가능 경영은 국내뿐 아니라 대외적으로도 호평을 얻고 있다. 교보생명은 2010년부터 ‘대한민국 지속가능성지수’ 생명보험부문 13년 연속 1위에 올랐다. 신 의장은 2019년 ‘대한민국 지속가능 경영 최고경영자’ 초대 수상자로 선정됐다. 같은 해 세계중소기업학회(ICSB)가 주관하는 ‘사람 중심 기업가정신 실천 경영자 대상’도 수상했다. 지난 3월에는 세계보험협회(IIS)로부터 ‘보험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2023 보험 명예의 전당 월계관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1996년 명예의 전당에 오른 신 창립자에 이어 세계 보험산업 역사상 최초로 부자(父子)가 함께 헌액된 것. 이 상은 혁신적인 활동을 통해 보험산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을 기리기 위해 1957년 제정됐으며 매년 IIS 임원 회의에서 수상자를 결정한다. 조시 란다우 IIS 대표는 “신 의장은 변화 혁신과 통찰적 리더십, 사람 중심 경영을 통해 ‘보험 명예의 전당’의 정신을 구현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윤리 경영 실천 … 임원 명절 선물도 사비로 직접 챙겨
신 의장의 정도 경영은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올 사람’이라는 얘기가 나돌 정도다. 그는 “세상에는 거저(공짜)와 비밀이 없다”는 선친의 가르침을 새기며 오랜 윤리 경영으로 쌓은 교보생명의 명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신 창립자가 2003년 별세할 때 신 의장 일가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인 1830억원의 상속세를 냈다. 당시 세금을 납부할 현금이 없었던 신 의장과 형제들은 교보생명 주식을 물납하며 납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신 의장은 회사 경비 또한 결코 허투루 쓰는 법이 없다. 매년 명절 때마다 임원에게 보내는 선물세트 역시 모두 사비에서 충당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 의장의 독특한 소통 방식은 중요 포인트마다 임직원들의 행동 변화를 이끌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2000년 회사가 어려울 때 교보생명이 금융감독원에 파산 신청을 냈다는 가상 뉴스를 제작한 게 대표적이다. 마치 지상파 방송 뉴스처럼 만들어진 덕에 당시 연수원에 모여 시청한 임직원들이 실제 상황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는 후문이다.
이는 회사 안팎에 ‘변화와 혁신이 아니면 모두 죽는다’는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신 의장의 개혁 추진에도 큰 도움이 됐다. 2001년 회사 비전과 기업이미지(CI)를 선포하는 자리에서 개그맨 이경규씨의 가면을 쓰고 등장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간판만 바꾼다고 회사가 변하는 게 아니라 임직원들의 행동이 바뀌어야 비로소 진정한 혁신이 가능하다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한 이벤트였다. 고객만족 FP대상 시상식에선 컨설턴트의 수고에 보답한다는 의미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발을 씻겨주는 ‘세족식’으로 감동을 선사했고 임직원들 앞에 통기타를 든 가수로 변신하거나 가짜 수염을 붙인 채 난타공연을 선보이는 등 재벌 회장답지 않은 친근한 면모를 드러내기도 했다.
디지털 전환 드라이브 … 금융지주사 전환으로 ‘제2의 창업’
시대 변화에 걸맞게 도전과 혁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리더십 포인트다. 신 의장은 오너이면서도 전문경영인과 마찬가지로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출근해 경영 현안을 챙기는 것으로 알려졌다.20년 넘게 교보생명 대표직을 수행하면서도 금융당국으로부터 중징계 한번 받은 적 없다는 점도 눈여겨볼만하다. 숱한 금융사고가 끊이지 않는 국내 금융권에서 유례가 없는 사례로 꼽힌다. 모든 책임과 비판을 스스로 짊어지겠다는 책임감 아래 임직원들과 힘을 합쳐 강도 높은 내부통제 노력을 펼친 결과라는 평가다. 2021년부터 급변하는 경영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전사적인 디지털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보험 가입 부문에서는 스마트폰을 활용한 심사 보완 및 청약 확대, 청약 전 답변 조회 서비스(K-PASS) 등을 도입했으며 보험금 지급에서도 인공지능(AI) 자동심사 모델 등을 구축했다.
내년엔 지난 18년간 숙원 사업이었던 금융지주사 전환을 앞두고 있다. 이를 위해 여러 주주들과 적극적인 소통을 통한 공감대 형성에 주력하고 있다. 저출산,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 변화로 국내 생명보험업계의 전망이 밝지 못한 현실에서 지주사 전환은 생존 전략에 가깝다는 설명이다. 신 의장은 “지주사 전환을 통해 신성장동력 발굴, 사업 포트폴리오 다변화, 관계사 간 시너지 창출, 주주가치 제고 등을 통해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제공하고, 궁극적으로 회사의 지속가능한 성장 발판을 마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어피너티와 풋옵션 분쟁 … 지주사 출범이 해결 실마리 될 수도
재무적투자자(FI)와 소송에 휘말린 것은 신 의장이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대목이다. 홍콩계 사모펀드 어피너티를 포함한 베어링PE, 싱가포르투자청, IMM PE 등으로 구성된 어피너티 컨소시엄은 2012년 9월 대우인터내서널이 보유했던 교보생명 지분 24%를 주당 24만5000원에 매입했다. 당시 신 의장과 어피너티 측은 주주 간 계약을 체결하면서 교보생명 기업공개(IPO)가 3년 내 이뤄지지 못하면 주식을 도로 사주는 풋옵션 조항에 합의했다.결과적으로 교보생명의 IPO는 기한 내 이뤄지지 못했다. 저금리, 저성장, 자본규제 등으로 시장 환경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당시 이사회 일원이던 어피너티 측도 동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다 마침내 2018년 12월 이사회 의결을 통해 IPO를 추진하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어피너티 측은 2018년 10월 주당 40만9000원이란 가격에 풋옵션을 전격 행사했고 이어 이듬해 국제상업회의소(ICC)에 국제 중재를 신청하며 신 의장을 몰아부쳤다. 당시 주당 20만원 안팎이던 시장가의 두배가 넘는 가격을 부른 셈이다. 하지만 중재판정부는 신 의장의 손을 들어줬다. 중재판정부는 신 의장과 어피너티 간 풋옵션 계약의 유효성은 인정하지만 신 의장이 주당 40만9000원은 물론 그 어떤 가격에도 주식을 되사줄 의무는 없다고 판정했다. 어피너티는 이 같은 중재 결과에 반발해 지난해 2월 2차 국제 중재를 신청한 상태다. 하지만 어피너티가 2차 중재에서 승소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중재 재판은 기본적으로 단심제로 진행되는 만큼 볼복 소송의 실효성이 크지 않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어피너티 측은 2차 중재에서도 1차 때처럼 신 의장에게 40만9000원의 풋옵션 행사가격을 요구하고 있어 쟁점이 사실상 동일한 상황이다. 투자은행(IB) 업계에선 결국 교보생명의 지주사 전환이 어피너티와 신 의장 간 분쟁을 해소할 실마리가 될 가능성을 점치고 있다. 교보생명이 지주사 전환을 통해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를 완성하면 어피너티 입장에서도 보유지분 가치가 상승해 투자금 회수에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어피너티 경영진이 교체된 것도 주주 간 분쟁에 새 전환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어피너티 창업주 박영택 회장과 한국 투자를 주도했던 이상훈 한국총괄대표가 지난 상반기 회사를 떠난 데 이어 창업 멤버인 이철주 회장도 최근 사의를 표명했다. IB업계 관계자는 “어피너티가 투자 손실을 만회하려고 풋옵션 조항을 활용해 과욕을 부리다 발목을 잡힌 형국”이라고 했다.
이호기 기자 hg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