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솔을 든 여자'(1875).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소장
'파라솔을 든 여자'(1875). 워싱턴 내셔널갤러리 소장
“니 아들놈이 내 딸에게 병을 옮겼다. 네 아들이 내 딸을 죽인 거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분노와 절망을 애써 억누르며, 형은 동생에게 한마디 한마디 꼭꼭 씹어 뱉듯 말했습니다. 공장을 운영하는 형은 늘 동생에게 든든한 버팀목이 돼 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이 돼줬습니다. 동생의 아들을 자신의 공장에 취직시켜 준 것도 그런 도움 중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동생의 아들은 어디선가 의문의 병을 얻어왔고, 공장 직원들에게 그 병을 옮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귀한 딸까지 병에 옮아 세상을 떠났습니다. 동생의 아들이 일부러 병을 옮긴 건 아니었지만, 원망스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동생도 할 말은 많았습니다. “애초에 내 아들이 아팠던 게 뭐 때문인데. 원래 건강했던 애가 그 잘난 공장에 다니고 나서부터 아프기 시작했잖아. 내 아들은 피해자야. 공장에 뭔가 문제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 하지만 이 말을 들은 형의 분노는 폭발하고 맙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 눈앞에서 썩 꺼져. 너는 이제 내 동생도 아니다!” 형은 문을 부서져라 닫고 동생의 집에서 나가 버렸습니다.

동생의 이름은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불리는 화가 클로드 모네(1840~1926), 형의 이름은 레옹(1836~1917). 둘도 없는 사이였던 형제는 이렇게 영원히 인연을 끊게 됐습니다.

집에 홀로 남은 모네는 얼굴을 감싸 쥡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문득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 그날의 그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이제 모네의 남은 삶에서 허락되지 않습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은 이제 곁에 없으니까요. 모네에게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늘은 모네의 삶과 작품, 그리고 그를 만든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배짱 두둑한 화가

혁신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혁신가들은 초창기에 고생을 많이 합니다. 듣도 보도 못한 걸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미쳤다’는 욕을 듣기가 십상이지요. 그럼에도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고집해 혁신을 완수하려면, 배짱이 두둑해야 합니다.
'인상, 해돋이'(1872). 인상주의의 시초로 꼽히는 작품이다. 한 평론가가 이 그림에 대해 던진 “본질 없이 흐릿한 인상만 남긴다”는 비아냥이 그대로 화풍의 이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모네는 거친 붓질로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 르 아브르의 일출 무렵 풍경을 잡아냈다. 그림 속에서는 아침 해가 어둠을 밝히며 솟아오른다. 막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이른 새벽이지만, 바다에는 벌써 부지런한 어부들이 조각배를 몰고 나와 있다. 새벽 안개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바닷가의 공장들도 굴뚝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바삐 돌아간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인상, 해돋이'(1872). 인상주의의 시초로 꼽히는 작품이다. 한 평론가가 이 그림에 대해 던진 “본질 없이 흐릿한 인상만 남긴다”는 비아냥이 그대로 화풍의 이름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모네는 거친 붓질로 프랑스 서북부의 항구 르 아브르의 일출 무렵 풍경을 잡아냈다. 그림 속에서는 아침 해가 어둠을 밝히며 솟아오른다. 막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한 이른 새벽이지만, 바다에는 벌써 부지런한 어부들이 조각배를 몰고 나와 있다. 새벽 안개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바닷가의 공장들도 굴뚝에서 증기를 내뿜으며 바삐 돌아간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소장
인상주의를 개척한 모네도 마찬가지로 배짱이 두둑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전까지 서양에서는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만을 ‘잘 그린 그림’으로 인정했지만, 모네는 여기에 반기를 들고 빛이 주는 찰나의 ‘인상’을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대충 그린 듯한’ 인상주의 그림에 온갖 비판이 쏟아졌습니다. 인상주의자들의 첫 전시에서는 “이걸 그림이라고 그렸냐. 화가 나오라”며 소리치는 관객들이 너무 많아서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고요. “쓰레기나 다름없는 그림이 걸려 있어 태교에 좋지 않으니, 임산부는 관람을 금지해야 한다”는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은 신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네는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1877년 프랑스 파리의 생 라자르 역에서 벌어진 일은 모네의 배짱을 잘 보여주는 일화입니다.

당시 모네는 역에 정차해 있는 기차들의 모습을 직접 관찰하면서 그림을 그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평범하게 부탁해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네는 가장 화려하고 좋은 옷을 입고 고급스러운 지팡이를 휘두르며 생 라자르 역 서부역 사무실을 찾아갔습니다. 역장을 만난 모네는 거드름을 피우며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나는 클로드 모네요. 나 알지?”

모네가 그렇게 유명하지 않을 때였지만, 역장은 그 기세에 눌려 침을 꿀꺽 삼켰습니다. 괜히 모른다고 했다가는 불호령이 날아올 것만 같았습니다. “화가 선생님, 일단 자리에 앉으시지요.” 그렇게 자리에 앉은 모네는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내가 당신네 역을 그리기로 마음먹었소. 북부역을 그릴지, 서부역을 그릴지가 고민이긴 했지. 그런데 오늘 보니 당신이 운영하는 서부역이 더 그릴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같군요. 기차를 역에 멈추고 플랫폼을 폐쇄하시오.” 역장은 생각합니다. ‘무슨 소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일인 것 같다.’

한술 더 떠 모네는 말했습니다. “연기를 뿜는 모습을 더 실감 나게 그리고 싶으니, 연기를 좀 더 많이 뿜어주면 좋겠군.” 이왕 도와주는 거, 역장은 ‘특별 서비스’로 연기가 많이 날 수 있도록 기관차에 석탄까지 가득 채워 줬습니다. 이렇게 모네는 며칠 동안 역을 점거하고 여섯 점의 작품을 완성했다고 합니다.
생 라자르 역(1877). /오르셰미술관 소장
생 라자르 역(1877). /오르셰미술관 소장
이처럼 모네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재능도 확실했습니다. 화가들 사이에서도 군계일학이었습니다. 동료 화가가 “이 사람은 훗날 우리 중 누구보다도 대성할 사람입니다. 그의 작품을 사세요”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세상의 인정을 받는 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모네는 꺾이지 않고 자신의 직감을 끝까지 밀고 나갔습니다. 훗날 모네는 회고했습니다. “나는 위대한 화가가 아니다. 단지 내가 느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으며, 그 과정에서 원래 있던 그림 그리는 규칙들을 자주 잊어버렸을 뿐이다.
생제르망 로제루아 교회(1867). 모네에게 교회와 도시, 사람들은 그 자체로 그림의 소재가 아니라 빛을 반영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소장
생제르망 로제루아 교회(1867). 모네에게 교회와 도시, 사람들은 그 자체로 그림의 소재가 아니라 빛을 반영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베를린 구국립미술관 소장
'생드니 거리'(1878). 일부 연구에 따르면 모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는 장면의 특징을 한 번에 잡아내는, 극도로 민감한 시각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 있는 깃발은 흐릿하고 불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저 위치, 저 상황에서 군중을 내려다보는 사람에게는 깃발이 저런 식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점은 화면보다 그림을 실제로 봤을 때 더 잘 느껴진다. /루앙미술관 소장
'생드니 거리'(1878). 일부 연구에 따르면 모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놓치는 장면의 특징을 한 번에 잡아내는, 극도로 민감한 시각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작품에 있는 깃발은 흐릿하고 불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저 위치, 저 상황에서 군중을 내려다보는 사람에게는 깃발이 저런 식으로 보인다고 한다. 이 점은 화면보다 그림을 실제로 봤을 때 더 잘 느껴진다. /루앙미술관 소장

진정한 사랑, 카미유

배짱 두둑한 천재들이 많이들 그렇듯, 모네는 성격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데다 괴팍한 면이 많았습니다.
'정원의 여인들'(1866). 그림 속 네 사람 모두 카미유가 모델이다. 이 그림을 위해 카미유는 아주 긴 시간동안 여러 포즈를 취하며 모델을 서 줬다. /오르셰미술관 소장
'정원의 여인들'(1866). 그림 속 네 사람 모두 카미유가 모델이다. 이 그림을 위해 카미유는 아주 긴 시간동안 여러 포즈를 취하며 모델을 서 줬다. /오르셰미술관 소장
그런 그를 세상과 연결해준 건 일곱 살 연하의 아내 카미유였습니다. 화가와 모델로 만난 둘은 순식간에 사랑에 빠졌습니다. 카미유는 언제나 힘든 내색 없이 모네의 모델을 서 줬고, 모네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1867년 8월에는 모네의 장남인 장을 낳았고, 3년 뒤인 1870년 모네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하지만 모네의 가족은 둘 사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카미유가 천민 출신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저 여자와 헤어지기 전에는 한 푼도 줄 수 없다.” 모네의 아버지는 말했습니다. 당시까지만 해도 모네는 가난한 무명 화가였습니다. 집에서 용돈을 받지 못하면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당장 밥을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네는 한동안 가족들에게 카미유와 헤어진 것처럼 거짓말을 하고 도움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다가, 작품이 팔리고 형편이 나아지자 처자식 곁으로 돌아왔습니다.
'생타드레스의 정원'(1867). 모네가 부모 곁에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사실주의 화풍이 남아있긴 하지만 빛에 대한 탐구가 돋보인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생타드레스의 정원'(1867). 모네가 부모 곁에 있을 때 그린 작품이다. 사실주의 화풍이 남아있긴 하지만 빛에 대한 탐구가 돋보인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여전히 주머니 사정은 넉넉지 않았습니다. 가끔 작품이 잘 팔려서 형편이 괜찮을 때도 있었지만, 대체로 가난했습니다. 동료 화가들에게 “빵도 다 떨어지고, 기름도 없고, 물감도 없어. 제발 조금만 돈을 빌려줘”라며 여러 번 손을 벌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가족은 행복했습니다. 서로가 함께였으니까요. 모네의 작품이 가장 화사했던 때도 이 시기입니다.
점심(1873). 화가와 카미유, 장의 행복한 일상이 담겨 있다. /오르셰미술관 소장
점심(1873). 화가와 카미유, 장의 행복한 일상이 담겨 있다. /오르셰미술관 소장
하지만 카미유가 병에 걸려 1879년 서른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이런 행복도 끝나게 됩니다. 모네는 절망했습니다. 아내를 잃고 얼마 안 돼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극도의 슬픔에 빠져 있네. 어떤 길로 나가야 할지, 두 아이를 데리고 내 삶을 어떻게 꾸릴 수 있을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비통함이 뼈에 사무치네.”
'카미유의 임종'(1879). 모네는 절망했다.
'카미유의 임종'(1879). 모네는 절망했다. "새벽녘에 나는 내가 가장 사랑했고 앞으로도 사랑할 한 죽은 여인의 옆에 앉아 있었네. 그녀의 비극적인 잠을 응시하고 있었지. 그리고 문득, 내 눈이 죽은 사람의 안색의 변화를 좇고 있음을 깨달았네. 파랑, 노랑, 회색의 색조.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내 곁에서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습을 마음속에 새기고 싶다는 소망이 생기더군. 하지만 소중한 사람을 그리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그 색채가 유기적인 감동을 불러일으켜 나는 반사적으로, 내 인생을 지배해온 무의식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던 거야. 나를 동정해주게, 친구." /오르셰 미술관 소장

든든하게 동생을 지켜줬던 형

그래도 삶은 계속됩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두 아들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인 레옹이 있었습니다.
레옹 모네의 초상(1874). /개인소장
레옹 모네의 초상(1874). /개인소장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던 레옹은 화학을 공부한 뒤 잘나가는 스위스 화학회사의 프랑스 지부에 취직했습니다. 그리고 본사의 신임을 받아 공장장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경제적으로 넉넉했던 레옹은 동생의 작품을 비싼 값에 사주곤 했습니다. 작품을 사준 뒤 다시 돌려주는 식으로 용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경매장에도 나가 모네를 도왔습니다. 1875년 경매에서는 ‘센 강의 일몰’을 당시로서 거금이었던 255프랑에 사 줬습니다. 고가에 작품이 팔렸다는 사실이 화제가 된 덕분에 모네의 명성도 높아졌습니다.

레옹은 물감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화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개발한 인공 물감은 천연 물감보다 색이 선명했고, 19세기 말에는 인상주의자의 80%가 이 물감을 사용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습니다.

카미유가 세상을 떠난 뒤 좌절한 모네를 돌봐 준 것도 레옹이었습니다. 모네는 레옹의 공장이 있던 노르망디 지역의 루앙에 머물며 그의 조수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 모네는 빛과 색을 연구하면서 노르망디 해안가를 주제로 한 수많은 풍경화를 그리는 데 몰두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모네의 마음도 점차 치유됐습니다.
'푸르빌의 절벽 산책'(1882).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푸르빌의 절벽 산책'(1882).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소장
10대 시절부터 늘 사이가 좋았던 둘. 하지만 1914년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모네의 아들은 당시 레옹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레옹의 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사용하던 화학 물질의 독성 때문에 클로드의 아들과 레옹의 딸이 연달아 병에 걸려 목숨을 잃었습니다. 화학 물질의 유독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일로 형제는 서로의 탓을 하며 크게 다퉜고, 다시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이 일은 모네의 마음에 또 한 번 깊은 상처와 후회를 남겼습니다. 1917년 레옹이 세상을 떠난 뒤 모네는 형수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형님의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했던 게 후회됩니다. 안 좋았던 일은 모두 잊고, 형님이 편안히 가셨으면 합니다.”
'포플러 나무'(1891). 모네의 포플러 나무 연작 중 하나다. 그는 생전 수많은 연작을 남겼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을 불태워 버렸다. 모네가 연작을 그렸던 건, 빛에 따라 한 가지 대상이 끝없이 변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테이트 소장
'포플러 나무'(1891). 모네의 포플러 나무 연작 중 하나다. 그는 생전 수많은 연작을 남겼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을 불태워 버렸다. 모네가 연작을 그렸던 건, 빛에 따라 한 가지 대상이 끝없이 변하는 모습을 그리기 위해서였다. /테이트 소장

찰나의 빛을 영원으로

'수련'(1919).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수련'(1919).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모네는 오래 살았습니다. 그 탓에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봤습니다. 카미유와 레옹, 큰아들인 장 뿐만 아니라 르누아르를 비롯한 절친한 화가 친구들과 재혼 상대인 알리스가 세상을 떠나는 것도 두 눈으로 지켜봐야 했습니다. 나이가 든 후에는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백내장으로 실명 직전까지 갔고, 수술 후에도 부작용을 겪었습니다.

빛과 공기의 흐름에 따라 시시각각 바뀌는 순간의 빛.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그 잡을 수 없는 인상을 그림에 잡아내 고정한다는 모네의 목표는 사실 영원히 이룰 수 없는 모순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네는 평생 자기 작품에 만족하지 못했고, 끊임없이 좌절하고 절망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노쇠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런 좌절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래도 홀로 남은 모네는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을 겁니다. 하지만 모네를 믿고 그의 꿈을 전심전력으로 도운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지탱했습니다. 그 사람들의 마음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네는 계속 그려야 했습니다.

모네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수련 연작은 그 결과물입니다. 이 작품은 추상미술의 시대를 열어젖히며 미술사를 새로 썼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저 물에 둥둥 떠 있는 똑같은 수련을 반복해서 그린 희미한 그림일 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색채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깊이와 감동이 느껴집니다.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소장
'수련이 있는 연못'(1917~1920).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컬렉션 소장
아마도 그건, ‘순간을 잡아내겠다’는 불가능한 목표를 생의 마지막까지 추구했던 대가의 의지가 색채에 녹아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 의지를 떠받친 건 모네가 받았던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네가 꿨던 덧없는 꿈은 영원이 되었습니다.

*이번 기사는 최근 룩셈부르크박물관에서 폐막한 전시의 도록 ‘Léon Monet, frère de l'artiste et collectionneur’ (Géraldine Lefebvre 지음), ‘모네’(크리스토프 하인리히 지음, 김주원 옮김, 마로니에북스), ‘모네 - 순간에서 영원으로’ (실비 파탱 지음, 송은경 옮김, 시공사), ‘모네- 빛의 시대를 연 화가’(파올라 라펠리 지음, 최병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모네-빛으로 그린 찰나의 세상’(피오렐라 니코시아 지음, 조재룡 옮김)을 참조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3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