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분 보고 15분 글쓰기' 예술에 다가가는 가장 쉬운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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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임지영의 '예썰'-재밌고 만만한 예술썰 풀기
올여름 더위는 그야말로 "불타오르네!"다. 이글거리는 태양의 눈빛을 피해 어디로든 숨는 게 상책이다. 한여름의 피서지로 미술관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넓지, 시원하지, 느리게 걷다 아예 주저앉아도 누가 뭐라지 않는다.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미술관의 효용은 충분하다.
하지만 이 좋은 미술관에 사람이 많지 않다. 몇몇 흥행 성공한 전시 빼고는 대체로 한산하다. 미술관은 여전히 우리에게 멀리 있고 예술은 낯선 무엇이다. 예전에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사람들을 예술 향유자로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일방적인 강의 위주의 프로그램들이 예술을 공부하는 것으로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예술은 지식이 아니라 감각인데…. 예술에 다가가는 좀 더 재밌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이는 예술을 내려놓고 보는 만큼 느끼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을 콘텐츠로 만들었다. '기획은 단순할수록 좋고 재미있으면 의미는 따라온다'는 진리를 수많은 실패가 깨닫게 해주었다. 그동안 모든 예술의 언어는 '공급자의 언어'였다. 너무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의 언어에 압도됐다. 나의 감상이랄 것은 무식한 사람의 유치한 언어인 것만 같아서 그림 앞에 '입꾹'이 됐다. 그러다보니 예술은 점점 어려워졌다. 무거워졌다. 어떻게 해야 이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다.
그래서 찾은 방식이 감상의 중심을 내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쫄지 않고 담대하게!' '모르는 게 권력이다. 당당하게!'
예술을 즐기는 걸 대상에 두지 않고 심상에 두자 감상자의 자유력과 공감력은 폭발했다. 구체적인 예로 전시를 보기 전에 안내문이나 정보 등을 미리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선입견을 배제한 채 예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리는 그 시간에 집중하라는거다.
예술과 내가 만나는 그 순간에 몰입한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내 두눈과 마음에 담기는 작품을 찾아낸다. 내가 발견한 그림 한 점은 새로운 세계이자 또 다른 나의 자아다.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 깊은데 있던 나를 만나게 된다. 아득하게 잊었던 생의 한장면을 길어올려 안아주게도 된다.
주체적 예술 향유의 방식으로 '3분 응시, 15분 기록'을 제안하고 있다. 지난 3년 예술 교육일을 하며 정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는데, 이 쉽고 간단한 콘텐츠가 가져온 반향은 크고 놀라웠다. 15분은 예술의 주체를 단번에 나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시간이 됐다.
물론 예술이 그리 쉬운거냐고, 만만한거냐고 깊이를 따진다면, 항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술을 너무 태산처럼 높고 심연처럼 깊은 무엇으로 규정해놓은 바람에 대중들과 괴리됐다. 그들만의 섬처럼 외로워졌다. 아무리 영혼을 갈아넣은 위대한 예술이어도 소통되고 향유돼야 비로소 그 가치가 생겨난다. 아, 물론 예술이 그걸 누릴 특별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그에 걸맞는 품격과 품위를 갖추고 경건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존중한다. 하지만 예술은 엄연히 소통의 매개다. 그러므로 수요자, 즉 향유자의 마음과 언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어떤 부분이 어떻게 그들에게 닿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작가가 의도한대로 못 느껴도 괜찮은건지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그 간극을 메꿔보고자 한국미술재단에서 작가들과 함께하는 예술 수업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는데, 매시간 감탄과 감동이 이어진다. 전시를 보러온 다양한 분들이 쓴 15분의 감상글을 듣고 울컥, 눈물을 터뜨리는 작가들도 많았다. 그만큼 예술이 제대로 소통되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림이라는 언어가 쓸쓸히 독백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술로 하는 말도, 예술로 쓰는 글도, 그걸 듣는 사람, 읽는 사람의 언어로 해야한다. 전문적이고 어려운 예술 이야기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 수는 있지만, 예술은 감성의 영역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술 세포를 깨워 재미를 길어올리면 의미와 통찰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더 알고 싶은 지적 욕구도 저절로 생겨난다. 우리 동시대 예술을 주목하는 이유도 먼데 있는 명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 지금의 마음을 나누는 게 진짜 예술의 효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놀랄만한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크고 작은 구멍들도 드러났다. 세대의 언어가 달라졌고 장벽은 높아졌다. 바로 지금이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때다.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소통의 매개가 필요하다.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관계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예술이 그 어려운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영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운 미술관에 가길 바란다. 잠시 팔짱을 풀고서 각자의 속도대로 걷기 바란다. 내 마음에 드는 단 한 점을 찾아내기 바란다. 그리고 3분 응시하며 15분 글쓰기를 하는거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질문하는거다.
당신에게 어떤 그림이 말을 걸어 왔나요? 그림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림을 통해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진짜 대화가 그렇게 시작될지도 모른다. 여름은 길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미술관에서 만나자.
하지만 이 좋은 미술관에 사람이 많지 않다. 몇몇 흥행 성공한 전시 빼고는 대체로 한산하다. 미술관은 여전히 우리에게 멀리 있고 예술은 낯선 무엇이다. 예전에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는데, 사람들을 예술 향유자로 만드는데는 실패했다. 일방적인 강의 위주의 프로그램들이 예술을 공부하는 것으로 인식시켰기 때문이다.
예술은 지식이 아니라 감각인데…. 예술에 다가가는 좀 더 재밌는 방법이 없을까.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이는 예술을 내려놓고 보는 만큼 느끼고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식을 콘텐츠로 만들었다. '기획은 단순할수록 좋고 재미있으면 의미는 따라온다'는 진리를 수많은 실패가 깨닫게 해주었다. 그동안 모든 예술의 언어는 '공급자의 언어'였다. 너무 진지하고 세련된 예술의 언어에 압도됐다. 나의 감상이랄 것은 무식한 사람의 유치한 언어인 것만 같아서 그림 앞에 '입꾹'이 됐다. 그러다보니 예술은 점점 어려워졌다. 무거워졌다. 어떻게 해야 이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까 내내 고민했다.
그래서 찾은 방식이 감상의 중심을 내게로 가져오는 것이다. '쫄지 않고 담대하게!' '모르는 게 권력이다. 당당하게!'
예술을 즐기는 걸 대상에 두지 않고 심상에 두자 감상자의 자유력과 공감력은 폭발했다. 구체적인 예로 전시를 보기 전에 안내문이나 정보 등을 미리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선입견을 배제한 채 예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와 맞닥뜨리는 그 시간에 집중하라는거다.
예술과 내가 만나는 그 순간에 몰입한다. 마치 어린 아이처럼 내 두눈과 마음에 담기는 작품을 찾아낸다. 내가 발견한 그림 한 점은 새로운 세계이자 또 다른 나의 자아다. 가만히 오래 들여다보면 깊은데 있던 나를 만나게 된다. 아득하게 잊었던 생의 한장면을 길어올려 안아주게도 된다.
주체적 예술 향유의 방식으로 '3분 응시, 15분 기록'을 제안하고 있다. 지난 3년 예술 교육일을 하며 정말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는데, 이 쉽고 간단한 콘텐츠가 가져온 반향은 크고 놀라웠다. 15분은 예술의 주체를 단번에 나로 만들어주는 마법의 시간이 됐다.
물론 예술이 그리 쉬운거냐고, 만만한거냐고 깊이를 따진다면, 항변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리는 예술을 너무 태산처럼 높고 심연처럼 깊은 무엇으로 규정해놓은 바람에 대중들과 괴리됐다. 그들만의 섬처럼 외로워졌다. 아무리 영혼을 갈아넣은 위대한 예술이어도 소통되고 향유돼야 비로소 그 가치가 생겨난다. 아, 물론 예술이 그걸 누릴 특별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 그에 걸맞는 품격과 품위를 갖추고 경건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또한 존중한다. 하지만 예술은 엄연히 소통의 매개다. 그러므로 수요자, 즉 향유자의 마음과 언어가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대체 어떤 부분이 어떻게 그들에게 닿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그림을 보며 이렇게 생각해도 되는지, 작가가 의도한대로 못 느껴도 괜찮은건지 마음 한켠이 불편하다.
그 간극을 메꿔보고자 한국미술재단에서 작가들과 함께하는 예술 수업을 1년 넘게 진행하고 있는데, 매시간 감탄과 감동이 이어진다. 전시를 보러온 다양한 분들이 쓴 15분의 감상글을 듣고 울컥, 눈물을 터뜨리는 작가들도 많았다. 그만큼 예술이 제대로 소통되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림이라는 언어가 쓸쓸히 독백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예술로 하는 말도, 예술로 쓰는 글도, 그걸 듣는 사람, 읽는 사람의 언어로 해야한다. 전문적이고 어려운 예술 이야기가 새로운 지식을 축적할 수는 있지만, 예술은 감성의 영역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있는 예술 세포를 깨워 재미를 길어올리면 의미와 통찰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더 알고 싶은 지적 욕구도 저절로 생겨난다. 우리 동시대 예술을 주목하는 이유도 먼데 있는 명화에서 벗어나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이야기, 지금의 마음을 나누는 게 진짜 예술의 효용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모두가 놀랄만한 빠른 성장을 했지만, 그 부작용으로 크고 작은 구멍들도 드러났다. 세대의 언어가 달라졌고 장벽은 높아졌다. 바로 지금이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한 때다. 마음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소통의 매개가 필요하다. 공감하고 공존할 수 있는 관계의 콘텐츠가 필요하다.
예술이 그 어려운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영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과 가까운 미술관에 가길 바란다. 잠시 팔짱을 풀고서 각자의 속도대로 걷기 바란다. 내 마음에 드는 단 한 점을 찾아내기 바란다. 그리고 3분 응시하며 15분 글쓰기를 하는거다. 그리고 눈을 맞추고 질문하는거다.
당신에게 어떤 그림이 말을 걸어 왔나요? 그림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림을 통해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 나의 이야기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의 진짜 대화가 그렇게 시작될지도 모른다. 여름은 길다. 좋아하는 사람과는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미술관에서 만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