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 체르노빌 지역 청소년들이 1991년 8월 5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구 소련 체르노빌 지역 청소년들이 1991년 8월 5일 김포공항으로 입국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1991년 8월 5일, 김포공항은 태극기를 든 푸른 눈의 청소년들로 북적였다. 제17회 고성 세계스카우트잼버리대회에 특별히 초대받은 구 소련 체르노빌 원전 사고 지역 청소년 107명이 입국한 것이다. 이 가운데는 12세 세쌍둥이 자매가 포함돼 언론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 이들은 원전 사고 이후 가족과 떨어져 집단 수용소에서 생활하고 있던 13세~18세 아이들이었다. 고성 잼버리는 이렇게 첫 장면부터 달랐다. 보이스카우트 대원이 아닌 체르노빌 청소년들을 데려오기로 한 주최측의 기획이 행사의 의미를 풍성하게 했다. 체르노빌 청소년들은 잼버리 대회 이후 한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며 올림픽 공원과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 등을 관광했다.
잼버리 참가 청소년들이 1991년 8월 8일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배지를 교환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잼버리 참가 청소년들이 1991년 8월 8일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배지를 교환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고성 잼버리 행사 시작 직후인 1991년 8월 8일 구 소련 캠프 대원들과 미국 대원들이 만났다. 냉전시대 적성국가 청소년들은 이 자리에서 서로 기념배지를 달아줬다. 고성 잼버리엔 헝가리, 폴란드, 유고, 체코 등 동구권 8개국 168명이 참가했다. 또한 앙골라 등 비회원 12개국 청소년들도 초청됐다. 동구권 청소년이 세계스카우트잼버리 행사에 참가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한국 정부는 서울올림픽 이후 적극적으로 ‘북방정책’을 펼치며 구 소련 공산권 국가들과 국교관계를 수립하고 있었다. 동서 냉전의 상징이었던 한국은 고성 잼버리를 통해 동서화합의 장으로 변모할 수 있었다.

고성 잼버리엔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 모레이 유프 모로코 왕자, 알베리 리차노프 구 소련연방최고회의 부의장 등 20여개국에서 53명의 스카우트출신 최고 통치자, 정치인, 국회의원들이 방문했다. 고성이 동서 화해를 상징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세계 각국 청소년들이 1991년 8월7일 강원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입촌 준비를 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세계 각국 청소년들이 1991년 8월7일 강원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입촌 준비를 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대회는 꼼꼼하게 준비됐다. 1만 9000여 명이 참가한 고성 행사장 곳곳엔 742개의 화장실이 설치됐다. 4만3000여 명이 참가한 새만금 행사장 보다 1.5배나 많은 수다. 하루 사용할 물 4000t을 공급할 상수도 시설도 완비됐다. 16개의 의무실이 마련됐고, 135명의 방역기동반이 매일 대회장 구석구석을 돌며 소독작업을 펼쳤다. 기상 악화를 대비해, 대회장 인근의 학교와 체육관을 대피장소로 확보해 놓았다.식재료 공급을 맡은 LG유통은 원활한 공급을 위해 속초 현지에 냉장 및 냉동시설을 갖춘 집배송 센터를 세웠다. 장소 선정도 완벽했다. 행사 기간 중 고성의 아침 최저 기온은 20도, 낮 최고 기온은 30도 안팎이었다. 푸른 숲과 동해를 끼고 있는 행사장은 참가자들에게 최고의 캠핑 장소였다.

대회가 성공적이었다는 것은 대회 깃발의 분실사건이 증명했다. 고성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200여개 잼버리 상징 깃발을 참가자들이 기념으로 가져갔고, 조직위는 다시 설치했지만 재고가 바닥나 곤욕을 치렀다.
청소년들이 1991년 8월9일 강원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유격훈련 체험을 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청소년들이 1991년 8월9일 강원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유격훈련 체험을 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잼버리대회가 끝나고 영국 참가자들 가운데 일부는 출국하지 않았다. 잼버리 기간 동안 경험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더 알고싶은 마음이 생겼던 이들은 귀국 대신 한국 가정에서 민박하겠다고 신청한 것이었다. 당시 133개국 1만9000여 명의 참가자들 가운데 영국,소련 등 26개 국 1495명이 귀국하지 않고 남아서 한국 가정에서 민박을 했다. 이들은 고성 인근 쌍용양회 및 잼버리 유관 기관 임직원 가정에서 민박을 하며 한국을 체험했다. 제17회 고성 잼버리가 역대 가장 성공적인 잼버리 행사였다는 증거였다. 행사 종료후 설문 조사 결과는 놀라웠다. 응답자의 77.5%가 만족한다고 답했고, 조금 만족이 13.1%, 불만족은 9.4% 뿐이었다.
청소년들이 1991년 8월7일 강원 고성 잼버리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있다./한경디지털자산
청소년들이 1991년 8월7일 강원 고성 잼버리 야영장에서 텐트를 치고 있다./한경디지털자산
고성 잼버리가 성공한 배경에는 헌신적인 기업인과 공무원들이 있었다. 한국보이스카우트 연맹 총재였던 김석원 쌍용그룹 회장은 잼버리 준비에 직접 나섰다. 자신의 회사에는 1주일에 1번 출근하고 나머지는 현장에서 행사 준비에 몰두했다. 배계선 강원도 지원단장도 1989년 1월1일 지원단 발족 이후, 직원 30여 명과 함께 임시 건물 야전침대에서 생활하며 준비에 매달렸다. 외국 청소년들이 행사 종료 이후 쌍용양회 임직원과 대회 유관 단체 직원 가정에서 민박한 배경에도 김 회장과 강원 지역 공무원들의 노력이 있었다.
일본과 한국 청소년들이 1991년 8월9일 강원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일본과 한국 청소년들이 1991년 8월9일 강원 고성 잼버리 행사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경디지털자산
고성 잼버리에도 강원도 공무원들이 동원됐었다. 1991년 강원도 공무원들이 2023년 전북 공무원들 보다 더 유능했을 특별한 이유는 없다. 게다가 고성 잼버리 예산은 98억원에 불과했다. 새만금 대회 예산은 1171억원이다. 놀랍게도 고성 잼버리 식사를 담당했던 LG유통은 이번 새만금 행사 식품을 납품한 아워홈의 전신인 회사다. 장소 선정부터 대회 준비까지, 일을 꾸미는 사람들의 진심과 헌신이 얼마나 담겨있느냐에 따라 결과가 하늘과 땅 차이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신경훈 디지털자산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