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 前 치정극'이 다시 관객 앞에 선 이유
이탈리아 영화 ‘붉은 사막’은 수식어가 많은 고전이다.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명작이라는 것, 유럽에서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거장’으로 불리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대표작이라는 것, 지금도 세계적인 감독들이 영화를 만들 때 떠올리는 작품이라는 것 등이다.

이 영화가 제작 60주년을 기념해 한국 극장가를 다시 찾았다. 60년 전 필름으로 찍은 영화를 ‘디지털 리마스터링’(색감, 음악 등을 디지털로 구현한 것)을 거쳐 더 선명하고, 더 깨끗한 화질로 구현해냈다. 무엇보다 그 옛날 촬영됐다고는 믿기 어려운 세련된 테크닉과 강렬한 메시지가 최신 영화들과 비교해도 놀랍다. 도대체 ‘붉은 사막’의 어떤 매력이 이 작품을 60년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다시 서게 했을까.

박찬욱도 반한 ‘예술영화 거장’

‘붉은 사막’의 진가를 알려면 감독이 누군지부터 알아야 한다. 영화의 감독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다. 그는 ‘영화를 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거장’이란 평가를 받는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존재론적 갈등을 겪는 인간의 내면을 독특한 연출로 그려낸 작품들로 칸(황금종려상), 베니스(황금사자상), 베를린(황금곰상) 등 세계 3대 영화제의 최고상을 모조리 거머쥐었다. 그에게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안겨준 영화가 바로 ‘붉은 사막’이다.

줄거리만 놓고 보면 ‘치정 영화’다. 매력적인 미모의 주인공 줄리아나(모니카 비티 분)는 화학공장에 다니는 남편 우고와 귀여운 아이를 둔, 겉으로 보기엔 완벽한 여인이다. 하지만 뒤에선 남편의 친구 코라도(리처드 해리스 분)와 복잡미묘한 관계를 이어간다. 줄리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코라도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당신이 나를 바라보듯이 남편이 나를 바라봤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며.

하지만 이런 시각만으론 부족하다. 영화의 핵심은 줄리아나의 위태로운 심리 상태에 있다. 줄리아나는 교통사고와 자살 기도를 겪은 뒤 정체 모를 혼돈과 불안을 겪는다. 잠을 자려고 누울 때마다 사방이 내려앉는 악몽을 꾸면서 깨기 일쑤고,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는 것조차 힘들어한다. 아이처럼 해맑게 웃다가도 갑자기 공포에 사로잡혀 안갯속으로 뛰어간다. ‘이탈리아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배우 비티는 상영 117분 내내 ‘원맨쇼’라고 느낄 정도로 이런 ‘불안’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안개 장면은 ‘영화 좀 아는 사람’들이라면 익숙하게 느낄 만한 연출. 지금도 많은 국내외 거장들이 참고로 하는 장면이다. 박찬욱 감독도 그중 하나다. ‘헤어질 결심’에서 안개 낀 바닷가 장면을 찍을 때 이 장면을 참고했다고 한다.

‘회색 페인트’ 숲에 담은 불안

색깔은 영화의 불안을 고조시킨다. 59년 전 베니스영화제의 심사위원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색깔을 활용한 상상력 풍부한 연출,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돋보인다.”

영화 초반에 주인공 줄리아나가 남편 우고를 찾으러 가는 배경은 회색빛 그 자체다. 소름 끼치는 기계음이 들려오는 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잿빛 연기는 황량한 사막 같은 느낌을 준다. 안토니오니 감독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담아내지 않고 캔버스에 물감을 칠하듯 필름에 색깔을 입혔다. 그는 생전 인터뷰에서 “야외 촬영을 하면서 물의 빛깔, 길, 풍경 등 현실의 실제 얼굴을 바꿨다”며 “회색빛을 강조하기 위해 영화를 찍을 때 실제 숲 전체를 회색 페인트로 칠했다”고 했다.

중후반 들어서는 붉은색이 계속 등장한다. 인간의 원초적 모습을 보여주는 붉은색 방, 황량한 공장 안에 설치된 붉은색 구조물과 기둥, 안갯속에서 불현듯 나타난 붉은색 선박 등이 그렇다. 회색과 붉은색은 끊임없이 불안감에 시달리는 줄리아나의 모습과 겹쳐 ‘산업화 vs 인간’이란 구도를 만들어낸다. 관객들은 산업화 속에서 소외되는 인간상을 떠올리며 줄리아나에게 자연스럽게 이입된다.

세계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붉은 사막’의 뒤늦은 개봉에서 강력한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이선아 기자 sun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