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유럽 기업들이 직접적으로 입은 손실만 최소 1000억유로(약 144조원)에 달한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6일(현지시간) 600개 유럽 대기업 그룹의 연례 보고서와 올해 재무제표를 조사한 결과 "176개 기업이 러시아 사업 매각, 폐쇄 또는 축소 등으로 인해 자산 손상, 외환 관련 비용 지출, 기타 일회성 비용 지출을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했다. 또한 "이번 집계에는 에너지 등 원자재 비용 상승과 같이 러시아 전쟁의 간접적 영향은 포함되지 않았다"며 "이는 에너지 기업들에는 막대한 수익을 가져다 줬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2월 개전 이후 서방 기업들은 러시아 사업에서 잇달아 철수했다. 일부 사업부나 자산을 남겨둔 기업들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몰수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프랑스 유제품 기업 다논의 러시아 자회사와 덴마크 맥주기업 칼스버그가 소유한 러시아 현지 양조업체 등이 대표적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 이들 기업의 러시아 자산에 대한 외국인 지분을 러시아 연방 국유재산관리청(로시무셰스트보)이 임시 관리하도록 하는 명령에 서명했다. 푸틴 대통령은 올해 4월에도 독일 가스기업 유니퍼와 핀란드 에너지기업 포르툼의 지분을 일시 통제한 바 있다.

우크라이나 키예프 경제대학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전쟁 이전에 러시아에 진출한 1871개의 유럽연합(EU) 소유 기업 중 50% 이상이 여전히 러시아에서 운영되고 있다. 여전히 러시아에서 여전히 사업 중인 유럽 기업으로는 이탈리아 은행 유니크레딧, 오스트리아 은행 라이파이젠, 스위스 네슬레, 영국 유니레버 등이 있다.

컨설팅기업 컨트롤리스크스의 나비 압둘라예프 이사는 "러시아를 떠난 기업이 많은 돈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남아 있는 기업들은 앞으로 훨씬 더 큰 손실을 입을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쟁 시작 무렵 향후 사업을 어떻게 처리할지 결정해야 했던 기업들에 황급히 달아나는 전략(cut and run)이 최선의 전략이었단 사실이 자명해지고 있다"며 "빨리 철수할수록 손실을 줄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안나 블라수크 KSE 연구원은 "러시아에 남아있는 그룹들은 고위험 도박을 하고 있다"며 "러시아 크렘린궁(대통령실)이 외국 기업의 출구전략을 점점 더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기 때문에 러시아 사업에서 배당금을 회수하는 것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가장 큰 대손상각과 비용 등을 기록한 기업은 석유 및 가스 분야다. 올해 1월 독일 최대 화학기업 바스프가 보유하고 있는 원유가스 기업 빈터쉘데아가 크렘린궁의 러시아 사업 몰수 조치로 인해 20억유로 현금을 상각처리했다고 발표한 게 대표적이다.

BP와 셸, 토탈에너지 등 3개 유럽 에너지 기업에서만 406억유로에 이르는 비용이 보고됐다. 하지만 이 같은 손실은 전쟁 발발로 폭등한 에너지 가격에 의해 거둔 950억유로의 총수익보다는 적었다고 FT는 지적했다. 에너지 부문의 뒤를 이어 은행, 보험사, 투자회사를 포함한 금융 부문이 입은 손실은 175억유로다. 이중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이 러시아 로스뱅크, 보험 사업부문을 헐값에 매각하면서 31억유로의 손해를 감수했다고 보고했다.

유틸리티 기업은 147억유로의 직격탄을 맞았고, 자동차 제조업체를 포함한 중공업 분야도 136억유로 손실을 입었다. 이중에서도 르노가 작년 5월 모스크바 공장 지분을 매각한 후 23억유로를 상각 처리했다고 보고하는 등 11개 유럽 자동차 제조사들이 적립한 대손충당금만 64억유로에 달했다.

다만 스위스 생갈대학교의 사이먼 에베넷 경제학 교수는 "큰 타격을 입은 기업은 소수에 불과하다"며 "애초에 러시아 시장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유럽 기업들의 평균 대손충당금은 관리 가능한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러시아 시장은 유럽의 전체 대외 투자의 3.5%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