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늘 흥분되는 경험이지만, 해외에서 찍을 경우에는 한층 더한 것 같다. 왜일까. 관광객 내지는 여행객으로서 느끼는 흥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평소에 접하기 어려웠던 피사체들을 새로운 배경에서 찍는다는 것 자체가 좋아서가 아닐까 싶다.

그런 내게 오케스트라 해외 투어에 동참하는 것은 신나고 값진 경험이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닌데, 서울시향은 내게 그 기회를 두 번이나 제공해 주었다. 처음에는 2012년 북미 투어에 동행했고, 2년 뒤인 2014년에는 유럽 투어에 동행해 사진 촬영 업무를 맡았다. 이 가운데 내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두 번째인 2014년의 투어이다.

내가 담당한 일은 8월 21일부터 27일까지 핀란드 투르크 뮤직 페스티벌, 오스트리아 그라페네크 페스티벌, 이탈리아 메라노, 영국 런던의 BBC 프롬스 등 유럽 4개국 4개 도시의 주요 음악 축제에 서울시향이 참여한 모든 공연과 일정을 사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 12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BBC 프롬스에 아시아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것은 NHK 심포니(1972년, 2002년)와 사이토 키넨 오케스트라(1990년) 이후 처음이라고 했다. 서울시향 입장에서도 충분히 역사적인 일이었겠지만, 나로서도 유럽인들이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투어 6일째 즈음, 세 번째 나라인 이탈리아에 도착했다. 8월 24일 이탈리아 북동부인 볼차노 지방에서도 북쪽에 위치한 메라노(Merano) 마을에서 반나절 즈음 되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장엄한 알프스 산맥과 인상적인 건축물들 사이로 얄궂게 비가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그날 촬영한 이 사진은 이탈리아 메라노에서 세나(Scena)로 이어지는 길에 있는 플란타 성(Castel Planta) 성벽 앞에서 서울시향 오케스트라의 수석으로 활동하고 있는 곽정선 바수니스트를 담은 사진이다.
이탈리아 시골 마을서 찍힌 '오케스트라의 광대' 곽정선
서울에서 우리는 유럽 투어 중 자유시간에 산책하듯 사진 촬영을 해보자고 이야기를 나눴고, 연주자는 촬영에 적합한 의상을 두세 벌 준비해 온 상태였다. 해외 투어를 많이 다니는 연주자이지만 자유시간에는 연습 및 휴식을 취하고 싶을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아이디어에 선뜻 좋다고 승낙했다.

드디어 적당한 때가 왔다는 생각에 우리는 이탈리아 숙소에서 나와 마음이 가는 대로 발길 닿는 곳에서 즉흥적으로 촬영에 임하기로 했다. 나로서야 늘 카메라 장비의 무게를 감당할 수밖에 없지만 연주자는 번거로울 텐데도 악기와 의상 가방을 들고 생글생글 웃으며 함께 걸었다.

좋은 장소가 보여야 할 텐데 걱정이 되긴 했다. 아무리 멋진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아무 데서나 찍어서 될 일은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타고난 낙관주의 성향에 일단 저질렀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했다. 시향 소속 연주자 몇 분이 산책을 나왔다가 합류하면서 길동무가 되어주는가 하면 짐도 나누어 들어주면서 분위기를 한층 더 즐겁게 해주었다.

길을 걷고 있자니 자꾸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길>이 떠올랐다. 펠리니 감독의 초기 네오리얼리즘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과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함으로써 펠리니의 명성을 일약 드높인 영화이다. 앤소니 퀸이 남자 주인공이자 떠돌이 차력사인 잠파노 역을, 펠리니의 아내 줄리에타 마시나가 여자 주인공으로 악기를 연주하는 순진한 처녀인 젤소미나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예전에 봤던 그 영화에서 젤소미나가 짓던 순수한 표정은 이후에도 잊히지 않고 이따금씩 떠올랐는데, 이제 젤소미나의 나라 이탈리아에 오자 그녀의 맑은 얼굴과 함께 그녀의 영혼을 울리는 트럼펫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악기는 다르지만 그녀의 모습은 바순 연주자의 모습과 살짝 겹쳐지는 듯했다.

곽정선 바수니스트는 볼 때마다 큰 눈으로 수줍게 웃곤 했는데, 그 모습은 순수함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금호문화재단 소속이었던 나로서는 금호챔버뮤직소사이어티(KCMS) 단원으로 활동했던 그녀를 공연장에서 자주 보았지만, 그녀는 볼 때마다 어김없이 그런 분위기를 풍겼다. 오케스트라에서 바순 독주 부분을 연주할 때만 돌변하여 박력을 뽐내며 빛나는 실력을 발휘하는 변신의 힘을 가졌다. 2023년 6월에 열린 교향악 축제에서 로시니 ‘바순 협주곡’의 독주자로 나서 묵직하면서도 따뜻하고 깊이 있는 특별한 음색을 만들어냈던 연주자이기도 하다.

바순은 독일에서는 ‘파곳’이라 부르며, 어원은 ‘밤나무 묶음’이라고 하는데 생김새가 막대기 같아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어둡게 느껴지면서도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들다가 때로는 맑고 장난스럽게도 느껴지는 음색을 지니며 목관악기 중에서도 가장 음역대가 낮은 악기인 바순은 ‘오케스트라의 광대’라는 별명도 지니고 있다.

젤소미나는 차력사 짐파노와 함께 어릿광대 분장을 하고 나팔을 불고 춤을 추며 사람들을 모으지 않았던가. 바순만이 지닌 여러 매력적인 음색이 내게 왜 젤소미나를 떠올리게 했는지는 모르겠다. 이탈리아의 길 위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일어난 감정이입일 수도 있고 아니면 맑고 순수한 인상이라는 점에서 겹쳐서인지도 모르겠다.

촬영 시간보다 길을 걸었던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메라노 지역의 자연이 주는 경치와 비가 갠 뒤의 냄새, 지나쳐온 호수에서 유유히 떠다니던 백조들의 소리도 떠오른다. 사람의 감각이란 게 사진 한 장에도 그날의 향이 떠오르고 여러 감각이 서로 침투하며 공존하는 게 신기하기만 하다. 제임스 조이스가 말한 ‘현현’이란 게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이때 촬영한 사진으로 이런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늘 똑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촬영하다 보니 이런 결과도 나오는 것일까. 메라노의 길 위에서 바수니스트는 많은 곡을 연주했지만, 그 소리 자체보다도 인물이 움직이면서 보여주었던 모든 동작이 나에게는 조화로운 음악으로 기억된다. 나의 사진에 당신의 음악을 담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본다.

무대 위가 아닌 낯선 길 위에서 신발을 벗어던지고 시원하게 불어주던 바순 소리가 지금도 귓가에 선연하다. 장 폴 사르트르는 ‘아무리 심사숙고를 하더라도 최종적으로 결정에 작용하는 것은 감정’이라고 했다. 사고는 내가 원하는 바대로 이끌어갈 수 있지만 감정은 그렇지 않다. 감정은 더 깊고 근본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추억에 작용하는 것은 사고가 아니라 감정이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곽정선 바수니스트를 촬영하면서 젤소미나를 떠올렸지만, 그 뒤로 젤소미나를 떠올리노라면 곽정선 그리고 그녀와 함께 걸었던 메라노의 그 길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련해지곤 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추억 속에서 2014년 8월, 그 뜨거웠던 이탈리아의 태양 아래를 되짚어 걸어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