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성시? 미디어아트 같은 '몰입형 쇼'와 새로운 구경꾼의 탄생
-
기사 스크랩
-
공유
-
댓글
-
클린뷰
-
프린트
[arte]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
몰입형 예술의 모든 것 (1)
몰입형 예술의 모든 것 (1)
![파리 시체공시소(morgue) 모습](https://img.hankyung.com/photo/202308/01.34198484.1.jpg)
프로젝션 매핑기술(Projection Mapping)과 음향을 활용해 전시 영상을 관람객의 온몸을 에워싸도록 투사하는 새로운 몰입형 미디어 쇼는 100여 개가 넘는 프로젝터와 수십 개의 스피커를 통해 빠르게 움직이고 변화하는 이미지를 천장과 벽, 바닥을 아랑곳하지 않고 투사해 관객들에게 몰입감을 준다. 팬데믹 이전부터 새롭게 유행처럼 등장해 위세를 떨치는 이런 장르의 전시(?)를 과연 미술로 보아야 할지 아니면 예술로서 유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다. 특히 보수적인 성향을 기본으로 하는 학계 특히 미학이나 예술학 분야에서는 매우 부정적인 것이 사실이다.
물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우리가 예술을 경험하는 방식도 변화하고 발전하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2018년경부터 미술의 대체재같이 등장한 인터랙티브(Interactive) 하고, 몰입적(Immersive)인 경험을 제공하는 관객은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작품에 참여하는 참여자인 동시에 작품을 함께 공유하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의 다양한 측면을 탐색할 수 있고 작가의 비전과 의도에 보다 더 개인적으로 다가가고 연결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파노라마가 전시된 Leicester Square Rotunda를 보여주는 Robert Mitchell의 다이어그램 사진 Wikimedia](https://img.hankyung.com/photo/202308/01.34198975.1.jpg)
그리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미술사적으로 유명한 작가의 작품을 생생하게 거대하게 때로는 관객들을 감싸안 듯 재현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디지털 프로젝터, 홀로그래피와 가상 현실(VR), 증강현실(AR), 모션 트래킹 등을 사용해 보다 더 몰입할 수 있도록 발전하면서 전통적인 미술관과 박물관의 관람객 숫자를 넘어서는 호황을 구가한다.
![베를린 페르가몬 파노라마 2012 고대 극장의 객석과 디오니소스 사원(왼쪽 아래), 성 언덕 왼쪽 트라자네움(Trajaneum), 2층 도서관, 가장 오른쪽 아테나 성소 사진 Wikimedia](https://img.hankyung.com/photo/202308/01.34198480.1.jpg)
다만 예술 또는 미술이란 명칭을 직접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약간 우회해서 예술 또는 미술이란 느낌을 강조하려는 듯 보인다. 이는 사실 일반적인 것으로 몰입형 쇼를 제작 상영하는 회사도 자신들의 작업을 예술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런 류의 예술 또는 미술 또는 기술의 역사는 17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의 미디어 이론가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 1943~2011)에 따르면, 움직임을 ‘시뮬레이션’한 첫째 장치는 마술랜턴이다. 1659년에 등장한 이 기계 장치는 빛을 발하는 광원 앞에 이미지를 놓고 스크린에 투사해 환영을 만들어냈다.
오늘날의 환등기의 원리를 적용해 만든 이 프로젝션으로 주로 해골이나 악마 같은 지옥의 공포를 느끼는 무서운 이미지를 만들었다. 특히 아타나시우스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1~ 80)나 가스파르 쇼트(Gaspar Schott,1608~66)와 같은 예수회 소속 과학자들은 누구도 본 적 없는 지옥을 재현해신도들의 천국에 가려는 영적 수행을 도와주는 도구로 사용했다. 마술랜턴이 만드는 지옥불과 악마의 환영은 쉽게 종교적 수행을 도와주는 대중적이며 기술적인 시뮬레이션으로 신도들의 지난한 종교적 수행과정을 생략하도록 도와주었다.
![마술랜턴의 투사이미지 사진 Wikimedia](https://img.hankyung.com/photo/202308/01.34198482.1.jpg)
그후 18세기 말 파노라마는 지금의 몰입형 전시처럼 하나의 엔터테인먼트로 소비되면서 유럽 각 도시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이후 파노라마는 발전을 거듭해 19세기 중반에는 ‘움직이는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이는 오늘의 영화처럼 새로운 시각적 요소인 동시에 사실적인 느낌을 배가하는 장치였다. 이제 그림이 회전(Scrolling)하면서 관객들은 마치 자신이 그 풍경 속을 거닐거나 지나가는 듯 착각하는 장치로 진화했다. 이런 움직이는 파노라마는 허드슨 강을 따라 나이아가라 폭포 기슭까지 증기선을 타고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는 ‘에이도푸시콘’ 극장은 ‘움직이는 그림’ 또는 ‘풍경 극장’이라 불리면서 근대 기계 극장의 전성기를 열었다.
![에이도푸시콘 극장 1782 사진 Wikimedia](https://img.hankyung.com/photo/202308/01.34198478.1.jpg)
이런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산업혁명이 완성된 19세기의 일이다. 중산층, 즉 프티 부르주아 계급이 등장하고 노동자 계급도 탄생하며, 기계나 동력이 사람의 손을 대체하면서 여가가 생겨났고 여가는 곧 구경꾼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바네사 R. 슈와르츠(Vanessa R. Schwartz)가 쓴 <구경꾼의 탄생>(Spectacular Realities:Early mass,1999)은 책의 서두에서 “감시에 대한 욕망과 평행하게 진행되는 관음의 욕망에 휘말린 구경꾼”들이 탄생시킨 새로운 대중문화를 주목하면서 구경의 대상뿐만 아니라 구경의 주체로 등장하는 군중의 대중문화를 분석하며 근대를 설명하고 있다.
이즈음 새로운 구경거리로 등장한 “놀랍도록 똑같은” 밀랍 인형전시관과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을 관찰할 수 있는 노천카페, 관음증을 공개적으로 충족시키던 시체공시소, 실물보다 작은 모형을 만들어 특정 장면이나 풍경을 재현하는 입체적인 파노라마인 디오라마 등이 소위 새로운 볼거리로 산업혁명 이후 나타났고, 이후 영화와 함께 대중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는 근대기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런던 밀납박물관(마담투소), 영국왕실가족들의 밀납인형들](https://img.hankyung.com/photo/202308/01.34198479.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