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형 전시에는 비평을 하지 않는다…모조품에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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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준모의 아트 노스탤지어
몰입형 예술은 시작부터 예술에 기반을 두고 표현의 한 형식으로 기술과 매체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몰입형 쇼는 관객을 몰입시키는 기술의 적용이 우선한다. 몰입이 수단이 되는 몰입형 예술에 반해 몰입형 전시는 몰입이 목적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목적으로서 몰입은 작가의 예술적 의도나 미학의 실천 또는 실험보다는 기본적으로 상업적이라는 점이다.
몰입형 전시는 기본적으로 입장료 수입에 의존하는 공연산업(Performing Arts Industry)의 일종이다. 다만 예술 또는 현대미술의 “관객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함께하기”의 형식을 빌어 ‘미술’로, ‘예술’로 포장하려 하지만 미술이라기 보다는 기술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비평가의 견해다. 따라서 이들이 몰입형 전시라는 명칭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리뷰 즉 비평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몰입형 전시가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예술의 기본적인 형식인 자기 목적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만드는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예술의 구성 요소인 재료와 매체, 형식과 내용을 통해 매체 즉, 작품의 재료로 사용된 사물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물질을 통해 구성됨으로써 그 형태를 드러내며 관객에게는 ‘관조의 대상’이 된다. 이때 작품은 관객의 감각에 작용하는 물적 형태를 갖춘 ‘형상적 존재’로 감각적 복합체로 정신에 의해 파악되는 물적 표현으로 형성된 ‘실재적 존재’다.
예술품의 마지막 단계는 내용이 지시하는 관객에게 보이는 모습 너머에 있는 이념적 세계, 궁극적 의미로서의 ‘초월적 존재’라야 한다. 이는 예술품이란 형상적, 실제적 존재를 넘어 이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몰입형 전시가 참여 예술(Participatory art) 또는 체험 예술(Experiential art)의 일파로 그 역사적 근거를 다다(Dada), 플럭서스 (Fluxus), 미술의 보여주는 형식과 방법의 변화, 작가와 관객, 작가와 작가, 전시와 작품이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탐색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 )의 “관계 미학(Relational Art)”의 관객의 참여와 소통을 근거로 예술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이런 류의 미술의 키치(Kitsch) 또는 모조품(Imitation)임을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최근 십수 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열린 몰입형 쇼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신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이미 미술사에 등재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1907~54)와 그리고 영원한 거장 고흐(Vicent van Gogh, 1853~90)의 이름을 빌리고 그들의 작품을 시각적으로 확대하고 자극적일 만큼 원색의 밝은 색과 빛으로 눈을 현혹시켜 관객을 끌어 들인 때문이다. 미술전문지 아트넷(Artnet)에 따르면 “몰입형 반 고흐(Immersive Van Gogh)”를 제작한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Immersive)는 “2021년 2월부터 2022년 5월까지 50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해 했고, 이는 미국인 90명 중 1명이 티켓을 구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할 만큼 선풍적인 인가를 모았다. 또한 시장보고서에 의하면 라이트하우스의 반 고흐의 쇼는 총 2억 5천만 달러(3,270억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이외에도 기념품 가게에서 올린 수입만 별도로 3천만 달러(392억 4천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전시는 토론토,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및 뉴욕에서 매진을 기록했다고 한다.
몰입형 체험형 쇼 제작회사의 하나인 슈데넘 프로덕션(Pseudonym Productions)은 2020년 연례 보고서에서 미국의 몰입형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2019년 497억 달러(367억 파운드)보다 19% 성장한 618억 달러(457억 파운드)로 상장했다고 발표했다. 2019년에는 영국에만 1250개의 몰입형 VR 및 AR 전문 회사가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2030년까지 영국 경제에 625억 파운드의 성장과 400,000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측했다.
컬처스페이스(Culturespaces)사는 파리, 서울, 암스테르담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8개의 대규모 몰입형 디지털 아트 센터를 두고 있으며, 국제 예술 집단인 팀랩(teamLab)은 다감각적이며, 무한히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는 설치물을 런던, 도쿄, 브라질 상파울루 등지에서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2001년, 도쿄대학교 공학부 공학과 출신 이노코 도시유키(Inoko Toshiyuki, 1977~ )가 설립한 팀랩은 2018년 일본의 주요 부동산 개발업체 모리빌딩(Mori Building)과 함께 도쿄에 거대한 전시 공간인 <teamLab Borderless>를 운영하고 있다. 개관 첫 해에 보더리스는 약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유치했는데 1인당 입장료는 약 30달러였다. 2019년에는 엡슨(Epson) 프로젝터를 사용하는 팀랩은 엡슨과 공동으로 상하이에 분관을 열었고 미국 뉴욕에도 진출했다. 또 2020년에는 마카오의 고급 호텔 베네티안(Venetian) 안에 그들만의 몰입형 쇼의 브랜드 개념인 ‘신체몰입형(Body Immersive)’ 공간인 슈퍼네이처(SuperNature)를 열었다. 이후 전통적인 미술시장에서 화상으로 성장해온 페이스 화랑(Pace Gallery)은 2020년 특별히 몰입형 체험쇼에 전념하는 기업 슈퍼블루(Superblue)를 마이애미를 시작으로 런던 등지로 확대했다. 역사적으로 관객과 작품이 일체가 되는 몰입형 쇼는 디지털 미디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예술가, 영화 제작자, 저널리스트였던 알베르 플레시(Albert Plécy, 1914~77)는 1975년 레 보드 프로방스(Les Baux-de-Provence)의 석회석 채석장에 “이미지의 대성당 (La Cathédrale d'Images)”을 설립하고, 수십 대의 회전식 프로젝터를 사용해서, 채석장의 우뚝 솟은 흰색 석회석 돌벽에 프레스코화 이미지를 투사했다. 여기에 관객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프로젝션으로 빛을 받는 동안 음악이 울려 퍼졌고, 색다른 이미지를 경험하는 이 방식은 인기를 끌면서 지역은 물론 해외의 관객까지 불러들였다. 이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앤(Anne)이 2002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시가 이 권리를 인수해 “빛의 채석장(Carrières de Lumières)”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8년 제주도 성산에 문을 연 “빛의 벙커Bunker des Lumières)”는 남프랑스 빛의 채석장의 첫 번째 해외 분관이다.
하지만 이들 몰입형 쇼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미술관의 작품 원본이 없는 이런 류의 몰입형 쇼와 같은 전시산업은 몇 가지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면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소셜 미디어(SNS)의 극대화된 환경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촬영하려는 욕구를 자극했다. 디지털 비디오 및 사운드 기술은 더욱 발전했고 성능은 좋아지고 가격이 떨어진 것도 이들 산업의 동력이 되었다. 또 코로나로 인해 많은 도시에 비어있는 규모가 큰 부동산이 양산되면서 이들 건축물을 활용하는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이들은 관객이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내러티브의 능동적인 주인공”이 되며 몰입형 전시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창의성을 자극하고, 장소 및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인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연결되는 방식을 재정의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유하는 경험과 재미를 위한 경험의 차이를 무시한 말이다. 사실 몰입형 쇼는 빛, 소리, 냄새, 질감까지 사용해 관객에게 보다 상호작용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다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또 관객이 공간 전체 속에서 공간을 경험하면서 화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안에 있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감정적 경험을 제공하며,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한 그룹의 사람들과 함께 동일한 환경 속에 노출되기 때문에 사회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관객이 일반적으로 쇼의 중심에서 이를 탐색하는 참여형이란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한다는 경험 자체가 예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몸의 시청각 기관이 피로해질 뿐이다. 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감상한다는 사회적 경험도 실은 공명하는 것은 오직 공간과 공기일 뿐이고 관객은 여전히 주위에 사람은 있지만 그들과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고 고립된 채 철저하게 타자화되어있지만, 다만 한 어항 속에서 함께 유영한다는 점에서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게된다. 마치 물과 기름이 한 병에 들어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몰입형 쇼는 빛이 넘쳐나면서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 소수의 열광하는 이들을 거느린 컬트가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더 이상 분석적인 거리에서 보고 형식적인 용어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몰입형 쇼의 목적은 감각을 제공하고 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각각 독립된 미술사에서 차용 해온 원본의 ‘아우라’가 없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그것과 융합되거나, 폭발하는 색에 휩싸여 일체감을 느낄지라도 이내 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이런 환상과 환각을 위해 4억 7,900만 개 이상의 픽셀의 이미지를 100만 루멘 이상의 밝기로 쏘아내고 150여 개의 이상의 스피커를 사용해 음악으로 가득 채운다. 기술 특히 SNS가 발전하면서 살금살금 그 촉수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침투함에 따라 우리는 따로지만 함께라는 착각 속에서 타자를 자기화한다. 디지털 통신에 대한 사회적 의존도가 증가하면서 고립감과 외로움을 조장해 은둔형 외톨이 즉 ‘히키코모리’나 도시의 ‘외로운 늑대’를 낳았고 무연 사회로 변해갔다. 하지만 역으로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기간, 우리의 정서적, 심리적,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육체적 생존에 관한 생명선으로 SNS가 작동했다.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이나 소통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결 또는 특정 상표의 전자제품이나 신발을 신는 것을 경험을 공유한다는 동류의식으로 착각해 혼자만의 고독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경험의 공유라는 동질감을 통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몰입형 쇼가 현실의 친구나 동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만난 적 없지만 만난 것 같은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대부분의 디지털 기반 블록버스터 몰입형 미디어 쇼는 매우 친숙하고 쉬운 내용을 담도록 설계되어 관객에게 미술관에서 고민했던 의미를 추출하는 지적 작업을 수행할 필요를 없앴다. 생각할 필요나 고민할 기회를 없애는 대신, 편안히 앉아 긴장을 풀고 이미지가 관객을 덮칠(?) 때 편안하고 친숙한 이미지만 아무 생각말고 즐기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사고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몰입형 쇼는 미술사에 등재된 “세대를 넘어 그 메아리가 전해지던” 익숙한 거장들의 이름을 빌어 그들의 삶과 작품을 상품과 미디어 형태로 재구성해서, 패러디되고, 씹어먹고, 다시 뱉어내는 형태로 소진했다. 그들이 시대를 넘어 유명세를 누리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대부분 당시 세상이 인정해주었던 것이 아니라 명성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 없이 암울한 시기에 작업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 생각, 상상력을 자극해 감동시킨 반증이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전시산업을 휩쓸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인 몰입형 전시의 주제가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가장한 오락산업으로 큰 돈을 버는 데 반해 이들은 소위 ‘추급권’에도 해당 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활발하게 상업적으로 활동한다.
몰입형 전시는 기본적으로 입장료 수입에 의존하는 공연산업(Performing Arts Industry)의 일종이다. 다만 예술 또는 현대미술의 “관객의 참여를 기반으로 하는 함께하기”의 형식을 빌어 ‘미술’로, ‘예술’로 포장하려 하지만 미술이라기 보다는 기술에 가깝다는 것이 일반적인 비평가의 견해다. 따라서 이들이 몰입형 전시라는 명칭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리뷰 즉 비평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몰입형 전시가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예술의 기본적인 형식인 자기 목적성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술 작품은 만드는 행위 그 자체에 목적이 있다. 따라서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 예술의 구성 요소인 재료와 매체, 형식과 내용을 통해 매체 즉, 작품의 재료로 사용된 사물의 지위를 결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예술 작품은 물질을 통해 구성됨으로써 그 형태를 드러내며 관객에게는 ‘관조의 대상’이 된다. 이때 작품은 관객의 감각에 작용하는 물적 형태를 갖춘 ‘형상적 존재’로 감각적 복합체로 정신에 의해 파악되는 물적 표현으로 형성된 ‘실재적 존재’다.
예술품의 마지막 단계는 내용이 지시하는 관객에게 보이는 모습 너머에 있는 이념적 세계, 궁극적 의미로서의 ‘초월적 존재’라야 한다. 이는 예술품이란 형상적, 실제적 존재를 넘어 이념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몰입형 전시가 참여 예술(Participatory art) 또는 체험 예술(Experiential art)의 일파로 그 역사적 근거를 다다(Dada), 플럭서스 (Fluxus), 미술의 보여주는 형식과 방법의 변화, 작가와 관객, 작가와 작가, 전시와 작품이 맺는 관계를 중심으로 1990년대 중반 이후 동시대 미술의 가능성을 탐색한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 1965~ )의 “관계 미학(Relational Art)”의 관객의 참여와 소통을 근거로 예술이라 주장하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이런 류의 미술의 키치(Kitsch) 또는 모조품(Imitation)임을 자백하는 것과 다름없다.
최근 십수 년 동안 세계 도처에서 열린 몰입형 쇼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것은 신기술을 사용하면서도 이미 미술사에 등재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 프리다 칼로(Frida Kahlo de Rivera, 1907~54)와 그리고 영원한 거장 고흐(Vicent van Gogh, 1853~90)의 이름을 빌리고 그들의 작품을 시각적으로 확대하고 자극적일 만큼 원색의 밝은 색과 빛으로 눈을 현혹시켜 관객을 끌어 들인 때문이다. 미술전문지 아트넷(Artnet)에 따르면 “몰입형 반 고흐(Immersive Van Gogh)”를 제작한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Immersive)는 “2021년 2월부터 2022년 5월까지 500만 장 이상의 티켓을 판매해 했고, 이는 미국인 90명 중 1명이 티켓을 구매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도할 만큼 선풍적인 인가를 모았다. 또한 시장보고서에 의하면 라이트하우스의 반 고흐의 쇼는 총 2억 5천만 달러(3,270억원)의 수익을 올렸으며, 이외에도 기념품 가게에서 올린 수입만 별도로 3천만 달러(392억 4천만원)에 달했다고 한다. 전시는 토론토,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및 뉴욕에서 매진을 기록했다고 한다.
몰입형 체험형 쇼 제작회사의 하나인 슈데넘 프로덕션(Pseudonym Productions)은 2020년 연례 보고서에서 미국의 몰입형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2019년 497억 달러(367억 파운드)보다 19% 성장한 618억 달러(457억 파운드)로 상장했다고 발표했다. 2019년에는 영국에만 1250개의 몰입형 VR 및 AR 전문 회사가 있다고 보고했다. 또한 보고서는 2030년까지 영국 경제에 625억 파운드의 성장과 400,000개 이상의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할 것으로 예측했다.
컬처스페이스(Culturespaces)사는 파리, 서울, 암스테르담을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8개의 대규모 몰입형 디지털 아트 센터를 두고 있으며, 국제 예술 집단인 팀랩(teamLab)은 다감각적이며, 무한히 인스타그램에 올릴 수 있는 설치물을 런던, 도쿄, 브라질 상파울루 등지에서 전 세계에 전파하고 있다.
2001년, 도쿄대학교 공학부 공학과 출신 이노코 도시유키(Inoko Toshiyuki, 1977~ )가 설립한 팀랩은 2018년 일본의 주요 부동산 개발업체 모리빌딩(Mori Building)과 함께 도쿄에 거대한 전시 공간인 <teamLab Borderless>를 운영하고 있다. 개관 첫 해에 보더리스는 약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유치했는데 1인당 입장료는 약 30달러였다. 2019년에는 엡슨(Epson) 프로젝터를 사용하는 팀랩은 엡슨과 공동으로 상하이에 분관을 열었고 미국 뉴욕에도 진출했다. 또 2020년에는 마카오의 고급 호텔 베네티안(Venetian) 안에 그들만의 몰입형 쇼의 브랜드 개념인 ‘신체몰입형(Body Immersive)’ 공간인 슈퍼네이처(SuperNature)를 열었다. 이후 전통적인 미술시장에서 화상으로 성장해온 페이스 화랑(Pace Gallery)은 2020년 특별히 몰입형 체험쇼에 전념하는 기업 슈퍼블루(Superblue)를 마이애미를 시작으로 런던 등지로 확대했다. 역사적으로 관객과 작품이 일체가 되는 몰입형 쇼는 디지털 미디어가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예술가, 영화 제작자, 저널리스트였던 알베르 플레시(Albert Plécy, 1914~77)는 1975년 레 보드 프로방스(Les Baux-de-Provence)의 석회석 채석장에 “이미지의 대성당 (La Cathédrale d'Images)”을 설립하고, 수십 대의 회전식 프로젝터를 사용해서, 채석장의 우뚝 솟은 흰색 석회석 돌벽에 프레스코화 이미지를 투사했다. 여기에 관객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프로젝션으로 빛을 받는 동안 음악이 울려 퍼졌고, 색다른 이미지를 경험하는 이 방식은 인기를 끌면서 지역은 물론 해외의 관객까지 불러들였다. 이후 그가 사망하자 그의 아내인 앤(Anne)이 2002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 시가 이 권리를 인수해 “빛의 채석장(Carrières de Lumières)”로 변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8년 제주도 성산에 문을 연 “빛의 벙커Bunker des Lumières)”는 남프랑스 빛의 채석장의 첫 번째 해외 분관이다.
하지만 이들 몰입형 쇼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미술관의 작품 원본이 없는 이런 류의 몰입형 쇼와 같은 전시산업은 몇 가지 시대적 상황과 결합하면서 폭발적으로 확산되었다. 특히 소셜 미디어(SNS)의 극대화된 환경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촬영하려는 욕구를 자극했다. 디지털 비디오 및 사운드 기술은 더욱 발전했고 성능은 좋아지고 가격이 떨어진 것도 이들 산업의 동력이 되었다. 또 코로나로 인해 많은 도시에 비어있는 규모가 큰 부동산이 양산되면서 이들 건축물을 활용하는 수단으로 채택되었다.
이들은 관객이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것을 넘어서 내러티브의 능동적인 주인공”이 되며 몰입형 전시가 단순한 기술 혁신을 넘어 창의성을 자극하고, 장소 및 공간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인 동시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연결되는 방식을 재정의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유하는 경험과 재미를 위한 경험의 차이를 무시한 말이다. 사실 몰입형 쇼는 빛, 소리, 냄새, 질감까지 사용해 관객에게 보다 상호작용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다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또 관객이 공간 전체 속에서 공간을 경험하면서 화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화면 안에 있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일부가 되는 감정적 경험을 제공하며, 일반적으로 한 번에 한 그룹의 사람들과 함께 동일한 환경 속에 노출되기 때문에 사회적 경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관객이 일반적으로 쇼의 중심에서 이를 탐색하는 참여형이란 점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한다는 경험 자체가 예술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몸의 시청각 기관이 피로해질 뿐이다. 한 공간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감상한다는 사회적 경험도 실은 공명하는 것은 오직 공간과 공기일 뿐이고 관객은 여전히 주위에 사람은 있지만 그들과 말 한마디 섞어보지 않고 고립된 채 철저하게 타자화되어있지만, 다만 한 어항 속에서 함께 유영한다는 점에서 타자를 자신과 동일시 하게된다. 마치 물과 기름이 한 병에 들어있지만 섞이지 못하는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다.
몰입형 쇼는 빛이 넘쳐나면서 매혹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을 주어 소수의 열광하는 이들을 거느린 컬트가 될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 하지만 이런 경험은 더 이상 분석적인 거리에서 보고 형식적인 용어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몰입형 쇼의 목적은 감각을 제공하고 의식을 바꾸는 것이다. 각각 독립된 미술사에서 차용 해온 원본의 ‘아우라’가 없는 이미지들은 우리가 그것과 융합되거나, 폭발하는 색에 휩싸여 일체감을 느낄지라도 이내 벽을 타고 바닥으로 흘러내려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이런 환상과 환각을 위해 4억 7,900만 개 이상의 픽셀의 이미지를 100만 루멘 이상의 밝기로 쏘아내고 150여 개의 이상의 스피커를 사용해 음악으로 가득 채운다. 기술 특히 SNS가 발전하면서 살금살금 그 촉수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침투함에 따라 우리는 따로지만 함께라는 착각 속에서 타자를 자기화한다. 디지털 통신에 대한 사회적 의존도가 증가하면서 고립감과 외로움을 조장해 은둔형 외톨이 즉 ‘히키코모리’나 도시의 ‘외로운 늑대’를 낳았고 무연 사회로 변해갔다. 하지만 역으로 팬데믹으로 인한 봉쇄 기간, 우리의 정서적, 심리적,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육체적 생존에 관한 생명선으로 SNS가 작동했다. 그리고 직접적인 만남이나 소통이 아니라 간접적인 연결 또는 특정 상표의 전자제품이나 신발을 신는 것을 경험을 공유한다는 동류의식으로 착각해 혼자만의 고독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생까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경험의 공유라는 동질감을 통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몰입형 쇼가 현실의 친구나 동무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되었다.
만난 적 없지만 만난 것 같은 사회적 교류를 가능하게 하는 대부분의 디지털 기반 블록버스터 몰입형 미디어 쇼는 매우 친숙하고 쉬운 내용을 담도록 설계되어 관객에게 미술관에서 고민했던 의미를 추출하는 지적 작업을 수행할 필요를 없앴다. 생각할 필요나 고민할 기회를 없애는 대신, 편안히 앉아 긴장을 풀고 이미지가 관객을 덮칠(?) 때 편안하고 친숙한 이미지만 아무 생각말고 즐기도록 되어있다. 따라서 사고하거나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순간을 즐기기만 하면 된다.
게다가 몰입형 쇼는 미술사에 등재된 “세대를 넘어 그 메아리가 전해지던” 익숙한 거장들의 이름을 빌어 그들의 삶과 작품을 상품과 미디어 형태로 재구성해서, 패러디되고, 씹어먹고, 다시 뱉어내는 형태로 소진했다. 그들이 시대를 넘어 유명세를 누리는 것은 그들의 작품이 대부분 당시 세상이 인정해주었던 것이 아니라 명성에 대한 현실적인 기대 없이 암울한 시기에 작업에 몰두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시간을 초월해 수많은 사람의 마음, 생각, 상상력을 자극해 감동시킨 반증이다. 그들의 작품은 모두 전시산업을 휩쓸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엔터테인먼트인 몰입형 전시의 주제가 되었다. 그들은 새로운 예술을 가장한 오락산업으로 큰 돈을 버는 데 반해 이들은 소위 ‘추급권’에도 해당 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활발하게 상업적으로 활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