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집어지고 뜯어져 '괴물'이 된 피아노, 이걸 연주하는 김재훈
지난 2일 오후 찾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김재훈의 작업실 한편에는 업라이트(upright·수직) 피아노가 아닌, 업사이드 다운(upside down·뒤집힌) 피아노가 놓여있었다.

업라이트 피아노를 그대로 뒤집어놓고 앞판은 확 떼어버린 ‘괴물’. 외계인의 갈빗대처럼 수많은 현은 검시를 앞둔 장기(臟器)처럼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하프라도 다루듯 김재훈의 오른손이 거침없이 그 현들을 훑자 이 뒤집힌 물체는 귀신 같은 불협화음을 토해냈다.

이내 김재훈은 손바닥을 하늘로 향한 채 거꾸로 매달린 건반을 ‘거꾸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피아노 다리(였지만 지금은 머리인)에 양각된 동물 머리 둘은 중세 바이킹의 용선 머리처럼 이 ‘괴악기’의 험악한 위용을 한층 더 키웠다. 피아노는 그렇게 완전히 전복(顚覆)되고 있었다. 이름하여 ‘핸드스탠딩(물구나무선) 피아노’다.
뒤집어지고 뜯어져 '괴물'이 된 피아노, 이걸 연주하는 김재훈
15일까지 열리는 제19회 제천국제음악영화제(10일 개막)에서 한국 장편 경쟁 부문에 오른 김재훈 감독의 화제작 ‘귀신통’에 이 괴물체가 등장한다. ‘귀신통’은 밴드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티미르호의 멤버이자 솔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김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작. 저 ‘물구나무선 피아노’는 그가 만들어낸 새 악기 ‘P.N.O.(Prepared New Objects)’의 일부이자 영화의 주요 소재다.

“20년 가까이 피아노를 치면서 ‘프리페어드 피아노’ 기법은 일부러 멀리했어요. 그러나 ‘인간과 피아노의 고통을 다루기 위해서는 마침내 나도 프리페어드를 택해야겠다. 이왕 하려면 극한까지 몰아붙여 미친 방식으로 하자’고 생각했죠.”(김재훈)

영화 ‘귀신통’은 먼저 한국 피아노의 역사를 짚는다. 1900년 미국 선교사 리처드 사이드보텀이 낙동강 사문진 나루터로 처음 피아노를 들여왔을 때, 조선의 짐꾼들은 상여로 그것을 옮겼는데 덜커덩할 때마다 시커먼 통이 유령처럼 소리를 내니 두려운 마음에 ‘귀신통’이란 별명을 붙였다.
뒤집어지고 뜯어져 '괴물'이 된 피아노, 이걸 연주하는 김재훈
한국에서 피아노의 전성기는 1980년대였다. '한 집 건너 한 대씩' 피아노가 있었고 동네마다 복수의 피아노학원이 성업한 시절. 그러나 주택이 아파트로 수렴하고 층간소음 문제가 생기면서, '중산층의 계급적 열망'을 대변하던 피아노는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다큐는 진단한다.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음악학자, 피아노 조율사와 운반사의 인터뷰가 교차한다.

김 감독은 “2023년 현재 피아노는, 피아니스트는 고통받고 있다”고 진단한다. ‘K-클래식’이라는 화려한 수식어 아래 더욱더 그렇다고.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 보컬리스트는 넘쳐나지만 ‘저는 피아니스트입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죠. 콩쿠르에서 상을 받거나 큰 관현악단과 협연을 했다거나 하다못해 귀국독주회라도 하지 않는 한 그것은 참칭처럼 여겨지거든요.”

김 감독은 한국 피아노의 기괴한 위상을 전복하고 싶었다. 다큐 ‘귀신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해체 악기 ‘P.N.O.’ 개발 과정은 그것을 은유한다. 한 대의 피아노를 풀어헤쳐 타악기, 현악기, 건반악기로 분화시킨다. 피아노 의자에 홈을 파 음정 타악기로 변형한 ‘터틀 체어’, 피아노 현 두 개를 뜯어내 거문고처럼 누인 뒤 활로 아쟁처럼 연주하는 현악기 ‘엘리펀트 첼로’도 그 일부다.

일찍이 서울대 작곡과를 나온 김 감독은 서울시 서초구나 바다 건너로 가는 대신 마포구 서교동으로 향했다. 지금은 없어진 라이브 클럽 ‘살롱 바다비’에서 메탈, 펑크 밴드와 어울려 피아노를 때렸다. “땀 냄새 진동하는 헤비메탈 공연 뒤에 제가 J.S. 바흐를 연주하면 관객들은 메탈처럼 열광해줬어요. 그런 체험은 학교나 콘서트홀에선 할 수 없는 것들이었거든요. 짜릿했죠.”

누구나 한 번쯤 불어본 악기인 리코더를 일부러 리드 악기로 삼은 3인조 ‘티미르호’도 꽤 전복적인 팀이었다. 피아노, 기타, 리코더의 별난 앙상블. 감성적 음표 다발이 세설(細雪)처럼 휘몰아치는 ‘폭설’은 여전히 회자되는 ‘인디 클래시컬’ 명곡이다.

“P.N.O.는 상아탑 위로 올라가 버린 피아노의 위치를 다시 기타나 드럼 같은 대중 악기로 내려놓으려는 상징적 시도입니다. 연주자도 정장을 벗어 던지고 합주 악기로 함께 뒹굴 수 있는 피아노를 상상한 것이죠.”
뒤집어지고 뜯어져 '괴물'이 된 피아노, 이걸 연주하는 김재훈
올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의 화제작은 주로 피아노를 소재로 한다. 개막작인 벨기에 영화 ‘뮤직 샤펠’은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참여한 피아니스트의 심리를 스릴러 장르로 다룬 픽션. 지난해 밴클라이번 콩쿠르의 경연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크레센도’는 티켓 오픈 3분 만에 전석 매진돼 임윤찬 신드롬을 재확인시켰다. 올해 제천영화음악상 수상자인 고 사카모토 류이치는 추모전 일환으로 상영될 다큐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 속에서 동일본대지진 당시 쓰나미에 잠겨 조율이 망가진 고교 강당 피아노를 연주한다.

“사카모토 씨는 ‘인간이 제멋대로 조율한 피아노를 자연이 자기 방식대로 되돌려놓은 것’이라고 했다지요. 저 역시 부족하지만 감히 제 방식대로 피아노에 관해 사유하고 끝내 해체해 보았습니다.”(김재훈)
뒤집어지고 뜯어져 '괴물'이 된 피아노, 이걸 연주하는 김재훈
11일 저녁 CGV 제천에서 성황리에 첫 상영을 마친 ‘귀신통’은 14일 오후 4시 제천시 시민회관에서 특별상영 형태로 다시 선보인다. 60분간의 영화 상영이 끝나면 60분간의 대담과 공연이 이어진다. 여기서 김재훈이 직접 연주하는 ‘P.N.O.’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29개국 104편의 음악영화가 상영된다. 예매나 세부 정보 확인은 영화제 홈페이지 방문이나 전화로 가능하다. 임희윤 음악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