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가스값 또 오르나…자원빈국의 설움 [원자재 이슈탐구]
유럽 LNG 가격 지난주 40% 급등
슈퍼 엘리뇨로 겨울 따뜻하다는데 '화들짝'
에너지 가격 취약한 한국도 안심 못해


유럽 천연가스 가격 변동성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슈퍼 엘리뇨로 따뜻한 겨울이 예상됐지만,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액화천연가스(LNG) 값이 네 배 이상 치솟았던 악몽을 떠올린 트레이더들은 웃돈을 주고 물량을 확보했다. 유럽 각국이 친환경 에너지 전환 정책으로 화석연료 사용을 전면 중단하는 과정에서 석탄 발전 대신 천연가스 발전을 늘리기로 하면서 가스 확보에 더욱 민감해졌다.

지난해 원유와 천연가스 가격 상승으로 대규모 무역수지 적자를 기록한 한국 역시 유럽 천연가스 가격 급등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볼 수 없다. 예상외로 추운 겨울이 닥치거나 LNG 공급처에 변수가 생기면 수급에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아직은 서둘러 물량을 구하기보다는 중국의 경기 불황과 슈퍼 엘리뇨로 인한 겨울철 고온 현상에 기대를 거는 모양새다.
독일 빌헬름스하펜 터미널에 정박한 부유식 LNG저장시설  / AP연합뉴스
독일 빌헬름스하펜 터미널에 정박한 부유식 LNG저장시설 / AP연합뉴스

러시아 가스관 잃은 유럽의 악몽

지난 9일 런던 ICE선물거래소에서 네덜란드 TTF 천연가스 선물 9월 인도분 가격이 전날 대비 40%가량 치솟아 이날 한 때 1메가와트시(㎿h)당 43유로를 넘었다. 호주의 주요 LNG시설 노동자들이 파업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가스값 약세에 베팅했던 트레이더들이 화들짝 놀라 물량 확보에 나섰기 때문이다. 미국 씨티 그룹은 “호주 LNG시설 파업이 장기화한다면 유럽 천연가스 가격은 1㎿h당 62유로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셰브런과 우드사이드 에너지 그룹이 호주에서 운영하는 LNG시설의 노동자들은 최근 압도적인 지지로 파업을 결의했다. 호주 당국에 따르면 이들 공장은 전 세계로 수출되는 LNG의 11%가량을 생산한다. 업계에선 글로벌 LNG시장에 큰 파장이 올 수 있다고 우려했으나, 며칠 지나 파업 여파가 크지 않을 것이란 예상도 나오면서 가격은 다시 떨어졌다. 크레디트 스위스의 애널리스트 사울 카보닉은 로이터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노조와 기업이 대규모 생산 중단을 불사했지만 실제로 일주일 이상 생산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낮고 글로벌 공급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TTF 천연가스 가격은 지난 11일 다시 1㎿h당 35.3달러 수준으로 내려왔다.
올겨울 가스값 또 오르나…자원빈국의 설움 [원자재 이슈탐구]
유럽 트레이더들이 과민 반응을 보인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천연가스 가격이 치솟아 작년 8월엔 사상최고가인 1㎿h당 340유로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독일 등 유럽연합(EU)은 천연가스 수요의 약 40%를 러시아에서 오는 파이프라인으로 수입했다. 그러나 대러 경제 제재가 이뤄지고, 노드스트림 해저 파이프라인이 파괴되면서 패닉에 빠졌다.

지금은 유럽 천연가스 가격이 상당히 진정된 상태며, 유럽 내 가스 저장고는 겨울 수요를 대비해 87.7%까지 채워져 평년 대비 양호한 수준이다. 시장에선 9월 말까지 저장고가 100% 채워질 거란 예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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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셰브런과 우드사이드는 유럽에 LNG를 거의 수출하지 않는데도 유럽 시장이 격하게 반응한 것도 이례적이다. 파업이 예상되는 우드사이드 에너지 그룹의 노스웨스트 셸프와 셰브런의 고르곤, 휘트스톤 LNG시설에선 주로 중국, 일본, 한국, 인도 등의 장기 계약 물량을 생산한다. 그럼에도 트레이더들이 움직인 것은 파업으로 한·중·일을 비롯해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LNG 수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바로 미국과 중동 물량에도 손을 댈 것이란 예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 등은 과거 가장 높은 가격으로 LNG를 수입해왔고 가격 변동 폭도 컸다. 동아시아 시장 LNG 가격 벤치마크인 JKM선물 가격은 지난 11일 MMBTU(열량 단위, 100만 파운드의 물을 화씨 1도 올리는 데 필요한 열량)당 11.8달러가량으로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의 헨리허브 천연가스 가격 2.78달러의 4배 가량이다. 유럽도 러시아 가스관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가스관 등을 통해 1MMBTU 당 3달러 이하에 가스를 사서 썼다.

현재 유럽 TTF가스 선물 가격은 1㎿h(=3.41MMBTU) 당 35.3유로(약 38.6달러)로 JKM시장가격 보다 살짝 높아졌다. 그러나 올겨울 평소 엘리뇨의 패턴을 벗어나는 이상기후가 나타나거나 호주 LNG기업 파업의 여파가 크면 JKM 시세도 유럽 못지않게 치솟을 것으로 예상된다. 유럽 에너지난이 벌어진 작년 8월에 JKM선물 가격은 1MMBTU 당 69달러선으로 연초 대비 129% 상승하기도 했다.
올겨울 가스값 또 오르나…자원빈국의 설움 [원자재 이슈탐구]
세계 최대 LNG수출국 미국의 천연가스 가격과 비교해보면 시장의 취약성이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헨리허브 천연가스 선물은 지난해 초 1MMBTU 당 3.9달러 수준에서 유럽 가스 파동이 벌어진 8월 9.38달러 선으로 오르는 데 그쳤다. 한국 등 동아시아는 미국에 비해 가격 상승 비율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절대적인 상승 폭은 훨씬 컸다. 동아시아와 미국의 가격 격차도 7배가 넘는 수준으로 더욱 크게 벌어졌다.

한편 미국 내 수요 증가로 인한 미국산 LNG가격 상승도 예상된다. 미국의 석탄 발전소 역시 빠르게 천연가스로 대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박영훈 한화투자증권 연구원은 "열량 기준으로 브렌트 유가의 6분의 1에 불과한 미국 헨리 허브 가스 가격은 이제 오를 일만 남아있다"고 분석했다.

이현일 기자 hiuneal@hankyung.com